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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2화 (2/122)

@2화

대공저 뒷마당에 잠입해 밤새 토끼 먹이 챙겨 주며 염탐하기.

익명으로 미리안에게 행운의 편지 44장 보내 저주하기.

대공저 담벼락에 ‘밀러 대공♡린느 뷔 세르트’라고 낙서하기.

유명한 점술사를 매수하여 밀러 대공의 짝이 린느 뷔 세르트라며 헛소문 내기.

대공저 입구에서 피크닉을 핑계로 종일 대공 각하만 기다리기.

태연하게 하녀 복장으로 대공저에 출근하기.

거기에다 대공 각하에게 직접 홍차까지 올린 대범함까지.

“여기까지가 3개월간 일어난 ‘큰’ 사건들입니다. 각하.”

종이에 적힌 ‘세르트 영애의 스토킹 리스트’는 실로 신박했다.

밀러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피곤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세르트 영애라 했던가?”

“네, 각하.”

“하아…. 오늘은 또 뭘 하다가 잡혔나?”

“그게… ‘밀러 대공♡린느 뷔 세르트’라고 적힌 하트에 빨간색으로 색을 칠하다 걸리셨답니다.”

“젠장.”

밀러는 굳게 닫힌 집무실 문을 노려봤다.

저 문밖엔 그 뻔뻔한 스토커가 있을 테지.

밀러는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날카롭게 웃었다.

“그대로 돌려보내. 이따위로 내 얼굴을 볼 수작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테다, 세르트 영애.”

‘세르트 영애’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밖에서 영애의 탄성이 쏟아졌다.

마치, 최애에게 이름을 불린 팬처럼 해맑기까지 했으니, 밀러는 불쾌한 듯 콧잔등을 찡그렸다.

대공저의 집무실 코앞까지 입성했지만, 린느는 결국 세르트 자작가의 마차로 쫓겨났다.

마차 바퀴 움직이는 소리와 덜컹거리는 소리만이 마차 안을 가득 채웠다.

덜컹덜컹.

목적지 없이 달리는 마차 바퀴에 조바심이 일어, 하녀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입을 뗐다.

“아가씨, 자작저로 돌아가시는 거죠?”

하녀의 물음에 린느는 도끼눈으로 하녀를 노려봤다.

“아니? 그전에 들렀던 점술 상점으로 가!”

괜히 잘못 말 붙였다가는 또다시 뺨을 얻어맞고도 남을 터. 하녀는 하려던 말을 삼키며 작은 창을 통해 마부에게 외쳤다.

“저번에 들렀던 점술 상점으로 가야 해요.”

“응? 이미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아가씨께서 가자고 하시니까요…….”

“…….”

마부는 더는 말도 붙이지 않고 곧장 점술 상점으로 향했다. 간단한 대화조차 통하지 않는 린느에게 설명해 봐야 입만 아플 테니까.

먼 길을 돌고 돌아 점술 상점에 도착했다. 그 와중에도 왜 이렇게 늦게 도착했느냐며 죄 없는 마부의 엉덩이를 발로 차 준 후에야, 린느는 허름한 점술 상점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셋……!”

린느의 표독스러운 얼굴을 보자마자 점술가는 입을 어버버 떨며 눈을 끔뻑거렸다.

“그거야? 내가 주문한 약이?”

“어… 그, 그게 그럴지도 모릅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점술가가 들고 있는 약병을 사납게 뺏어 들었다.

“이걸 마시면 나의 대공님과 결혼할 수 있다는 거지?”

점술사가 말없이 뻐근한 미소와 함께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다.

“왜 대답이 없어? 맞냐고!”

“고대 연금술에 의하면 그렇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하여 권해 드리고 싶진 않습…….”

“그래서 결혼할 수 있냐고 없냐고!”

“없, 어있어요!!”

점술가는 린느의 비명에 손을 떨며 귀를 막았다. 그리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골랐다. 찢어지는 듯한 비명에 귀가 아픈 건 둘째치고 고질병이던 심장이 터질 듯이 뛴 탓이었다. 린느는 그런 점술가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진작 말을 똑바로 했어야지! 쓸모없는 노친네 같으니!”

린느는 점술가가 들고 있는 약병을 냅다 뺏어 그대로 한입에 털어 넣었다. 말릴 틈도 없이 약병을 비우자, 점술가는 아연한 얼굴로 그대로 멈춰 섰다.

“돈은 효과가 나오면 그때 줄게! 네가 사기꾼일지도 모르잖아?”

린느는 조소를 뱉으며 마차로 향했다.

달칵. 점술가는 입매를 파르르 떨며 닫힌 문을 바라봤다. 린느의 난폭한 성정에 첨가된 재료들을 묻지 않고 냅다 마셔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점술가는 주섬주섬 재료가 적힌 종이를 구겨 벽난로에 던지며 조수에게 말했다.

“지, 짐 싸거라. 당장, 이 제국에서 벗어나야 한다.”

“네?! 가, 갑자기요?”

점술가는 희게 질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 영애는 분명 죽을 거야! 재료는 너도 봤잖느냐? 세상에 사랑의 묘약 따위가 어딨어! 해, 해가 뜨기 전에 도망가야 해.”

* * *

점술가의 예상대로 린느는 침대에 눕자마자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숨이 막히고 심장이 터질 듯이 뛰길 반복했지만,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 이상해. 이상하다고! 이, 이러다 죽, 죽…… 는…….’

허락 없이 제 방에 드나들지 말라 으름장을 둔 탓에 그녀의 죽음을 알아차린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평소라면 새벽에도 수십 번이나 사용인들을 불러내어 히스테리를 부릴 린느였지만, 오늘따라 그녀의 방은 고요하다 못해 스산했다.

아침이 되었지만, 여전히 굳게 닫힌 방문에 하녀들이 모여들었다. 차마 문을 열고 들어갈 용기는 나지 않았지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문 열어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아가씨께서 밤새 설렁줄을 한 번도 당기지 않으셨다니, 말이 돼?”

“대공 각하 때문에 심려가 크신가 보지. 제발 부탁이니까 노크하지 마. 알았지?”

“하아… 알았어.”

덜컥, 쾅! 하녀들은 난데없이 활짝 열린 방문에 가슴께를 쓸어내리며 린느를 빤히 바라봤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린느를 바라보던 하녀들이 다급히 말을 붙였다.

“아, 아가씨?”

“…헐.”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세요? 말씀하시면…….”

평소라면 하녀들의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아침을 맞이하는 게 일상이건만. 거기에 소리를 꽥 지르며 물건을 손에 집히는 대로 집어 던졌을 아가씨가 아닌가!

하녀들은 손끝을 파르르 떨며 서로의 팔뚝을 어루만졌다. 겁에 질린 얼굴로 어버버 대자, 린느가 숨을 들이켜며 말문을 열었다.

“오늘 일정이 어떻게 돼? …요?”

평소 린느에게서 엿볼 수 없던 따듯한 말투에 하녀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마치 신인류를 마주한 사람들처럼 하녀들은 린느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공저에 들르실 예정이시겠죠? 늘 그러셨으니까요.”

“대공저? 밀러 대공의 저택?”

“네, 저희 제국의 자랑이신 대공 각하의 저택이요.”

“세상에…….”

린느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그렇구나. 제국의 자랑인 대공의 저택에 들러야 하는구나’라며 입꼬리를 올려 실실 웃었다. 그것도 잠시, 웃음을 뚝 멈추며 입을 뗐다.

“그럼 외출 준비하고 나올 테니 기다릴래? …요?”

“네?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그, 그럼 그렇게 해 줘도 좋구.”

우리 아가씨가 저런 미소도 지을 줄 아셨다니! 하녀들은 소리 없는 탄성을 뱉으며 환한 미소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섰다.

‘미친, 나 빙의된 거야? 그것도 돈 많은 세르트 자작가의 영애로?’

하린이는 그렇게 19금 피폐물 <늪, 사랑, 감금>에 빙의했다. 그것도 허술하기 짝이 없는 악녀 린느 뷔 세르트로.

* * *

하린이는 안 해 본 알바가 없었다.

박람회 시연 알바부터 데스코 핑핑, 꿈의 나라 우버랜드, 올림브 영, 강남점 라쉬 알바까지.

주머니 사정이 힘들다기보단, 사고 싶은 게 남들보다 많았다.

그저 남들보다 외로워서 친구가 좀 더 많고, 그저 즐기고 싶은 게 많을 뿐이건만.

그것도 주머니가 넉넉해야 가능한 법! 친구가 많으면 뭐 하나, 숨 쉴 때마다 나가는 게 돈인걸. 하지만 돈 걱정도 이제 끝!

‘세르트 자작가라면…… 금수저 아니야? 이러면 현생하고 맞바꿀 만하지 않나…?’

어차피 가진 거라고는 쥐뿔도 없지 않았던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도 안 되는 부모님을 가족이라 여기며 현생에 치여 사는 거보다야, 이게 낫지.

‘와, 세상 어색해라! 내가 금수저라고? 정녕 일 안 해도 먹고 놀고 즐길 수 있다고? 망할 비위 맞추면서 안 웃어도 돼? 막 연회장도 마음껏 다니고!?’

그것도 남주에게 집착하다가 허무하게 죽는 엑스트라 악녀 역할이라니!

그 뜻은 남주에게 집착만 하지 않으면 괜찮다는 거잖아?

‘크흐, 빙의 최고! K-로판 빙의물 예습하길 잘해따!’

그래 이런 게 천운이지! 인터넷에서 본 제너럴 타로리딩 대로 이건 대운이자 천운이었다.

물론, 밀러가 워낙 잘생겼고 절륜남에 원픽이라 조금 아쉽긴 하다만.

어디 잘생긴 남자가 원작 남주뿐이겠어? 잘생긴 엑스트라와 연애하면 되지?

‘어차피 그놈이 그놈이지 뭐. 잘해줘 봐야 끝은 다 똑같았어.’

인플루언서인 하린이의 이름과 SNS 계정을 팔아 물건까지 판 전남친도 있는데, 뭐!

그뿐이랴? 집에 불났다기에 적금 깨서 보태 줬더니 그마저도 거짓말이지 않았던가.

린느는 결연에 찬 얼굴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의상실 유리에 착 달라붙었다. 들뜬 표정도 잠시, 유리에 비친 자신의 드레스를 보고선 혀를 찼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검은 드레스만 있는 건 너무했어.”

“검은색 드레스야말로 대공저에 숨어들기 좋은 색이라고 하셔서…….”

집착에 진심인 원작 린느의 발상다웠다.

린느는 하녀의 대답에 어색하게 웃어넘겼다.

“의상실에 온 김에 드레스 좀 봐야겠어. 세상에 무슨 블랙 컬러 룩북이야 뭐야?”

린느는 유리에 비친 제 모습을 훑어보며 잘게 혀를 찼다.

며칠 전만 해도 쇼핑이고 나발이고 대공이나 데리고 오라던 아가씨였기에 이상하다 생각은 하면서도 하녀는 싱긋 웃으며 린느의 말에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나 좀 예쁜데? 드레스 색은 마음에 안 들지만, 예쁜 건 여전해!’

린느는 시스루로 처리된 레이스 부분을 펄럭이며 제 모습을 샅샅이 살폈다.

마치 레이스만 만드는 장인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예술이었다.

휴대폰이 있었더라면 이미 셀카 찍어서 SNS에 폭풍 업데이트했을 텐데!

린느는 아쉽다며 쯧 혀를 찼다.

#일상, #OOTD, #강남, #빙의짱, #드레스, #코디, #선팔맞팔, #좋반

이런 해시태그 없이도 좋아요는 잘만 눌렸었는데!

아, 계정은 잘 있으려나? 해킹이나 당하지 않으려나 몰라.

한창 걱정하던 린느가 거울 속 모습을 보며 다시 흐뭇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대로 전남친 결혼식에 가도 되겠어, 이하린! 태어나길 잘해따! 진짜 존예!’

린느는 이리저리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보조개를 접어 웃었다.

‘그러고 보니, 로판에는 SNS 같은 거 없나?’

아니, 마법도 잘 쓰고 마나도 있는데 왜 SNS 없어?

마수도 나오고, 비현실적인 외모의 남주도 있으면서?

비슷한 거라도 있으면 바로 셀럽 되는 건데.

린느는 제 생각에도 웃겼는지 사랑스럽게 픽, 웃었다.

짤랑. 출입문에 붙어 있는 작은 종 소리에 린느는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세요, 올림브 용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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