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제1장 결자해지 (7) (완결)
오전 컨퍼런스는 적막하기 짝이 없었다.
오늘은 강태섭의 리베이트 비리가 세상에 드러난 지 열흘째 되는 날이자 강태섭이 퇴임을 하는 날이었다.
불명예 퇴임이었던 만큼 컨퍼런스 분위기는 좋을 수가 없었다.
스태프들은 되도록이면 강태섭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강태섭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으며 강태섭이 퇴임 연설이 끝났을 때 박수조차 치지 않았다.
모두가 강태섭을 역병 취급하는 공기였다.
스태프들의 푸대접에 강태섭은 퍽 당황한 눈치였다.
그 탓에 주특기였던 달변을 빛이 바라고 녹슬었다.
강태섭은 몇 번이나 말을 더듬었고 몇 번이나 할 말을 잊었다.
회진까지 끝나고 나자 더 이상 강태섭이 설 곳은 없었다.
강태섭은 짐을 정리하기 위해 쓸쓸히 연구실로 향했고 나는 그의 뒤를 조용히 밟았다.
“난생처음 쫓겨나는 기분이 어때요?”
강태섭이 연구실에서 짐을 챙기고 있을 때, 나는 연구실로 들어가 빈정거렸다.
이 순간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려 왔는지 다른 사람들은 몰랐다.
당사자인 강태섭도 까맣게 모를 것이다.
군자의 복수는 10년도 늦지 않다고 하던데.....
내 복수는 무려 40여 년이 걸렸다. 이 복수는 무엇이라 이름 붙이는 게 좋을까.
“이믿음.”
강태섭은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노려보았다.
강태섭의 눈동자는 분노와 적개심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아직 나를 미워할 힘이 남아 있다는 것에 나는 조금 놀랐다.
“과장님, 아니 이제는 태섭 씨라고 해야 하나? 질문을 했으면 대답을 해 주셔야죠. 기분이 어떠냐고요.”
“아주 x 같아. 네 면상처럼.”
“와우, 가면이 벗겨지니까 욕도 잘하시네요. 그 성질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대요?”
나는 미소 띤 채 강태섭을 조롱했다.
마치 전생에서 강태섭이 내게서 신수술을 빼앗고 나를 조롱했던 것처럼.
입장이 바뀌니 시원하고 통쾌했다.
그럼 이 행복한 순간을 최대한 천천히 음미해볼까.
“경찰에서는 뭐라고 하나요? 송치는 됐어요?”
“내게 말할 이유는 없다. 너랑 하고 싶은 말도 없으니까 꺼져.”
“제 충정을 몰라보니 섭섭하네요. 다들 태섭 씨를 외면해서 쓸쓸하잖아요? 전 태섭 씨가 덜 외롭기를 바라서 여기 있는 건데.”
“이 개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휙!
강태섭이 화를 참지 못하고 내 쪽으로 책 몇 권을 던졌다.
출입문 쪽에 서 있던 나는 얼를 문 옆의 벽으로 숨었다.
쿵. 쿵. 쿵.
대리석 바닥에 두꺼운 전공 서적이 나동그라졌다.
지나가던 교수가 호기심 많은 얼굴로 강태섭의 연구실을 쓱 쳐다보고 지나갔다.
“저 사람이 요즘 리베이트로 병원 개망신시킨 강태섭이라는 사람입니다. 오늘부로 불명예 퇴임하는 사람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아, 네.”
나는 지나가던 교수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강태섭을 더 약 올렸다.
그리고 출입구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지금부터는 좀 전과 다른 방식으로 강태섭을 괴롭힐 예정이었다.
사실 내게 남을 괴롭히는 악취미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강태섭 같은 부류는 따끔하게 괴롭혀 줄 필요가 있었다.
“힘든 척하지마. 재활용도 안 되는 위선자야. 네가 달면 삼키고 쓰면 밷었던 사람들은 지금의 너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어.”
“지랄하지 마.”
강태섭이 한쪽 입가를 말아 올리며 반론했다.
“뭐라고?”
“지랄하지 말라고. 날 믿고 내게 이용당한 놈들이 멍청한 거지. 그게 왜 내 탓인지 모르겠군.”
강태섭의 표정이 다시금 차분해졌다. 말투에도 이전의 위압감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끝까지 남 탓을 하시겠다?”
“남 탓이 아니라 그게 현실이야. 멍청한 놈은 이용당하고 똑똑한 놈은 이용하는 게 세상이니까. 세상은 약육강식이라고.”
“악육강식? 말 한번 잘했네. 세상이 약육강식이었으면 당신은 벌써 죽었어. 당신이 버린 사람들이 당신을 가만두지 않았을 테니까.”
나는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강태섭이 궤변 따위에 분위기를 내줄 내가 아니었다.
그나저나 이 지경이 되도록 반성이란 눈꼽만큼도 없는 건가.
강태섭의 추악함에 나는 치를 떨었다.
“이믿음, 지금이야 실실쪼개고 있지만 두고 봐. 넌 반드시 내 손으로 파멸시킬 테니까.”
“소송을 앞둔 주제에 날 협박하는 겁니까?”
“나도 다 알아 봤어. 실형은 없을 거라고 하더군. 벌금에 집형 유예. 얼마간의 의사 면허 정지 처분이 전부라고 허던걸?”
강태섭이 아픈 손가락을 물어 왔다.
리베이트의 처벌 수위는 아직 솜방망이에 불과했다.
수억 원의 뒷돈을 챙기고도 실형을 선고받지 않는다?
더군다나 의사 면허까지 유지된다?
그렇다면 크게 한탕 해 먹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할 양심 없는 의사들이 많을 테니까.
강태섭은 그중에서도 악질이었고.
“지금이야 내 이야기로 떠들썩해도 몇 년이 지나면 사람들은 나를 까맣게 잊겠지.”
“........”
“나는 그때 돌아와서 내가 빼앗긴 것들을 되찾을 거다.”
“그럼 계속 지금처럼 살겠다는 겁니까? 동료들의 피를 빨아먹고 리베이트까지 챙기면서?”
“물론이지. 의사를 생각하는 참된 의사? x 까라 그래. 내 배만 부르면 그만이야.”
강태섭의 이야기를 차분히 듣고 있던 나는 차갑게 웃었다.
그 미소에 섬뜩함을 느꼈는지 강태섭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너 이 새끼, 표정이 왜 그래?”
“제 아무리 교활한 당신이라도 최후의 순간에는 방심하네요.”
“방심?”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 가운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휴대폰의 녹음 버튼을 종료했다.
녹음 파일을 재생하자 방금까지 우리가 나눴던 대화가 고스란히 반복되었다.
녹음 파일의 의미를 깨달은 강태섭의 낯이 챙백해졌다.
“재기할 수 있으면 해 봐요. 당신 재기 소식 들리는 대로 이 녹음 파일 확 뿌려 버릴 테니까.”
“믿음아, 잠깐만. 우리 다시 이야기를 나눠 보자꾸나.”
갑자기 구질구질한 모습을 보이는 강태섭을 향해 나는 썩은 미소를 날렸다.
“당신이랑 하고 싶은 말 없으니까 꺼져.”
***
그 날 저녁.
나는 해운대 모래사장을 거닐고 있었다.
가을이 겨울과 더 친해지면서 저녁 바람이 매서워졌다.
외투를 걸치지 않으면 감기가 걸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날이 저물어 해운대의 바다는 까만색이었으나 파도에 밀려오는 물보라는 하얀색이었다.
까르르 뛰어노는 청춘들.
캔 맥주를 마시며 직장 생활의 여독을 풀고 있는 회사원들을 지나치며 나는 하염없이 걷기만 했다.
전생의 원수 강태섭을 드디어 물리쳤다.
강태섭에게 쏘아붙였을 때는 시원했지만 그 사간이 지나자 막상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기분이었다.
덕분에 알 수 있었다.
강태섭이 차지하고 있었던 내 마음속 비중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뭐, 충치도 빼면 허전한 법이니까.'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돌이켜 보면 강태섭이 내게 꼭 악영향을 끼친 것만은 아니었다.
전생에서 강태섭에게 호되게 당한 덕분에 나는 강태섭 못지않은 교활함을 얻게 되었다.
그 교활함으로 못된 의사들을 물리치며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고.
강태섭은 한마디로 반면교사였다.
그럼에도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과장인 강태섭과 부 교수인 이시형이 의국에서 동시에 아웃됐으므로 의국은 당분간 혼란스러울 것이다.
분위기는 뒤숭숭하고 업무에도 과부하가 걸리겠지.
하지만 그 잠깐의 시련을 극복하면 부산 의국은 본래의 건강한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나 또한 의국의 안정화에 필요한 1년 동안 부산에서 더 근무할 작정이었다.
떠날 때 떠나더라도 말이다.
나 때문에 벌어진 어수선한 상황을 수습하고 떠나야 마음이 편할 듯 했다.
모래사장을 걸으면서 나는 퇴근 전 진료부 원장 성철용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성철용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나를 불러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이번 일, 이 교수가 계획했어?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수술용 로봇 도입과 리베이트를 엮어 강태섭을 내쫓기 위해 부산행을 택했음을 고백했다.
- 참 나, 이쯤 되면 의사가 아니라 모사꾼 아닌가.
“부원장님이 저보다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의료계가 단지 의술만으로 굴러가는 곳이 아니라는 것은.”
-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긴 해. 인간이란 사회적 동물이고 사회적 동물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력이니까.
“수술용 로봇 도입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수술용 로봇은 단순히 강태섭을 위한 미끼만은 아니었다.
나는 진심으로 수술용 로봇을 원하고 있었다.
로봇 수술의 비용은 비록 일반 수술에 두세 배 더 비쌌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절개 부위의 최소화.
수술 시야의 최적화.
수술 후 회복 시간의 단축.
외과의라면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손떨림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술용 로봇이 도입된다면 환자들이 수술을 선택하는 폭이 넓어지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그 선택의 폭이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라들에기만 넓어질 확률이 크긴 하다만....
돈 많은 환자도 환자니까.
그들이 지불한 수술비가 병원의 복지로 사용되면서 경제적 여유가 없는 환자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
- 자네는 이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수술용 로봇 도입이 탐난다는 말인가.
“솔직히 그렇습니다. 리베이트를 챙긴 강 과장이 죄인이지 수술용 로봇이 죄인은 아니니까요.”
- 못 말리겠군, 진짜. 이번 일이 잠잠해지면 그때 다시 진행해 보지.
이어진 대화에서 성철용은 내게 흉부외과 의국을 일임하겠다고 말했다.
과장으로 진급을 시켜 준 건 아니었지만 사실상 과장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인사권이 내게 넘어왔으니까.
쉬이이이융!
퍼퍼퍼펑!
감작스러운 폭죽 소리에 놀란 나는 상념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복수에 성공했다고 해서 내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래사장을 정처 없이 걸으면서 나는 전생의 기억을 뒤졌다.
앞으로 의료계에 벌어질 사건 사고.
내가 동료로 만들어야 하는 의사들과 강태섭처럼 물리쳐야 하는 의사들을 떠올렸다.
극복하기 벅찬 일들이 한가득이었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있었다.
내 의술은 전생을 뛰어넘었고.
내 인맥도 전생을 뛰어넘었다.
나 혼자라면 불가능한 일이라도 동료의 도움을 받으면 해낼 수 있었다.
당장은 부산 의국의 정상화.
길게 보면 찬밥 대접받는 흉부외과의 비루한 현실 타파.
나는 그 두가지 목표를 가슴에 새겼다.
그 덕분일까.
강태섭의 공배으로 텅 비었던 가슴이 충만하게 매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발걸음에도 힘이 생겼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 계속해서 걸어 나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문득 생각해 봤다.
생각에 빠져 걷던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연락하고 싶은 사람.
연락해야 할 사람.
새로운 시작을 맞이한 부산 의국에 꼭 필요한 사람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통화를 연결하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동안 왜 이렇게 연락이 없었냐며 자기를 까맣게 잊은 줄 알았다며 너수레를 떨었다.
나도 괜히 엄살 부리지 말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나 지금 해운대에 있는데 여기 공기가 참 좋다. 너도 부산에 공기 좀 쐬러 올래?”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