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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256화 (256/257)
  • 256화 제1장 결자해지 (6)

    해운대 번화가에 위치한 카페.

    약속 시간보다 한참 일찍 도착한 이시형이 라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원두의 고소한 향, 우유의 부드러운 맛, 포근한 온기가 어우러져 입안이 즐거웠다.

    커피를 마시면서 이시형은 이믿음과의 전쟁이 오늘로 끝날 것을 예감했다.

    잠시 후 사전 연락 없이 이믿음과 함께 강태섭의 자택을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과 이믿음 둘 중 한 명을 심복으로 결정해 달라고 강태섭에게 선택을 맡길 것이다.

    판이 이렇게 커지면 강태섭도 차마 발을 빼지는 못하리라.

    누군가는 선택받고 누군가는 버림받고.

    이시형은 버려지는 쪽이 이믿음이라는 데 손목도 걸 수 있었다.

    관계란 함께 보낸 세월만큼 끈끈해지는 법 아니겠는가.

    그가 보기에 이믿음과 강태섭의 관계는 고작 실 정도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라? 이시형 교수님이 오셨습니까?”

    낯익은 목소리에 창가에 머물렀던 이시형의 시선이 정면으로 향했다.

    강아람이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요? 내가 오면 안 됩니까?”

    “그게… 이번 일은 과장님이 이믿음 교수에게 맡긴 걸로 알고 있어서…….”

    “이믿음 교수는 급하게 조문을 가야 한다고 해서 내가 대신 왔어요. 뭣하면 직접 물어보던가.”

    “그럴 필요까지야 있겠습니까? 어차피 리베이트는 강 과장님께 들어갈 건데.”

    강아람이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음료를 주문하고 이시형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시형 교수님을 다시 뵈니 얼마나 반가운 줄 아십니까?”

    강아람이 너스레를 떨기 시작했다.

    이믿음이 워낙 겁쟁이라 어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오늘로 밀려 버렸다.

    듬직하고 대범하게 일을 처리하던 이시형이 그립다 등등.

    갖은 아양을 떨어 댔다.

    어느 정도 입에 발린 소리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이시형은 기분이 좋았다.

    이믿음보다 잘 났다는 소리를 빈말로라도 들어 보고 싶었으니까.

    “강 팀장도 바쁠 텐데 오래 붙잡아 두는 건 실례겠죠? 작업 시작합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그럼 잠시 일어나 보겠습니다.”

    10분 후 카페로 돌아온 강아람의 손에는 비타민 음료 박스가 들려 있었다.

    박스 안에는 당연하게도 강태섭에게 바칠 리베이트 현금이 담겨 있었다.

    강아람이 소속된 업체에서 수술용 로봇을 도입하는 대가로 받는 비용이었다.

    “이번 일은 몇 장짜리예요?”

    “넉넉하게 열 장 넣습니다. 이 교수님도 최소 한 장에서 두 장은 챙기실 겁니다.”

    이시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비타민 박스를 건네받았다.

    박스에서 전해지는 묵직한 무게감이 만족스러웠다.

    머저리 같은 이믿음.

    고작 지인 조문 때문에 천만 원 돈을 놓치다니…….

    사사로운 감정을 떨쳐 내지 못하는 그 성격 때문에 넌 내게 뒤처질 거다.

    이시형은 속으로 사악하게 웃었다.

    강아람과 용무를 마치고 헤어진 후 이시형은 이믿음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문은 언제 끝나고 부산에는 언제 내려오냐고 물었다.

    - 차가 막히는 바람에 30분 정도 늦을 것 같습니다. 죄송하지만 먼저 과장님 댁에 들어가 계세요.

    “이 교수, 자신 있나 봐? 과장님 댁에 찾아가는데도 지각을 한다고?”

    - 그렇다고 마법으로 날아갈 순 없잖아요.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내가 마지막으로 인심 쓰지, 뭐.”

    - 감사합니다, 교수님.

    통화는 싱겁게 종료되었다.

    휴대폰을 호주머니에 넣으며 이시형은 양 입가가 귀에 닿을 것처럼 웃었다.

    강태섭을 먼저 만날 수 있으면 이시형이 무조건 이득이었다.

    이믿음이 도착하기 전에 강태섭을 최대한 자신 쪽으로 포섭해 둘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믿음은 알고 있을까?

    본인 열심히 파고 있는 무덤의 주인이 놀랍게도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강태섭이 사는 아파트로 걸어가는 동안.

    이시형은 드문드문 뒤를 돌아보았다. 착각인지 몰라도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마치 누군가에게 미행을 당하는 것처럼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참 나, 나도 나이를 먹은 건가? 이렇게 겁이 많아서야.’

    이시형은 스스로를 책망했다.

    산업 스파이도 아니고 해외 공작원도 아닌 자신에게 미행이 붙을 리 없었다.

    아마 해가 일찍 떨어진 데다가 근처에 인적이 없기 때문에 불안해졌으리라.

    그것도 아니면 손에 들린 현금 박스 때문에 예민했던 것일 수도…….

    띵동~

    강태섭이 사는 아파트에 도착해 초인종을 울렸다.

    “이 교수? 이 시간에 웬일이에요?”

    반쯤 열린 현관문 앞에서 잠옷 차림의 강태섭이 모습을 드러냈다.

    “과장님께 드릴 것도 있고 겸사겸사 나누고 싶은 대화도 있어서…….”

    “허… 이게 도대체 무슨 경우지?”

    강태섭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연락 없이 찾아온 것도 그렇고. 돈은 또 왜 이 교수가 가지고 있어?”

    “들어가서 설명드리겠습니다.”

    “난감하네, 진짜.”

    현관 앞에서 두 사람이 실랑이를 하는 사이, 강태섭의 아내가 현관으로 다가왔다.

    “여보, 누구예요? 손님 왔어요?”

    “어, 응. 서재에서 잠깐 이야기 좀 하다가 보낼게.”

    “손님이 왔으면 거실로 모셔야죠.”

    “아냐, 당신이 신경 쓸 필요 없어. 금방 끝나.”

    강태섭은 아내를 안방으로 쫓아내다시피 하고 본인의 서재로 이시형을 데리고 갔다.

    꼬일 때로 꼬여 버린 상황에 강태섭은 심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대체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던가.

    딸칵.

    서재 문을 잠그고서 강태섭은 팔짱을 낀 채 이시형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이 교수, 지금 무례한 짓을 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겠지?”

    “네, 저도 심히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 왜 이런 짓을 벌였는지 말해 봐.”

    이시형은 기다렸다는 듯 설명에 나섰다.

    우선 리베이트를 본인이 운반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둘째로 강태섭의 자택에 깜짝 방문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강태섭은 말이 없었다.

    한숨 섞인 탄식을 추임새로 넣을 따름이었다.

    “자네들 둘 다 정신이 나갔어? 애도 아니고 선택을 받긴 무슨 선택을 받는다고 그래?”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과장님. 저는 유치해서 안 끼겠다고 했는데 이믿음 교수가 하도 졸라 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이시형은 모든 잘못을 이믿음 탓으로 몰고 갔다.

    그래야만 이믿음이 강태섭에게 찍혀 미움을 받을 테니까.

    계획은 아직까지 순탄했다.

    강태섭은 아까부터 주먹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는데 이는 강태섭이 정말 화가 났을 때 하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분노의 대상이 이믿음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럼 조금 있다가 이믿음 교수도 우리 집에 온다는 소리지?”

    “네, 슬슬 올 때가 된 것 같습니다만…….”

    띵동~

    양반은 못 되는지 때마침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이시형은 그 소리가 꼭 축복의 종소리처럼 들렸다.

    “여보, 이믿음 교수라는 분이 찾아왔는데 들어오시라고 할까요?”

    현관 쪽에서 강태섭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태섭은 그러라고 대답한 후 잠갔던 서재의 문을 열었다.

    벌컥!

    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자 원흉이 이믿음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지?’

    이시형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조문을 다녀왔다는 사람이 양복도 아닌 일상복을 입고 있었다.

    집에 다녀 올 여유가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육감이 조심하라는 적색 경고를 보내 왔다.

    “너 제정신이야? 보라는 강 팀장은 안 보고 시형이에게 대타를 맡기질 않나.”

    “…….”

    “시형이를 꼬드겨서 되도 않는 수작을 부리질 않나. 남의 집에 멋대로 찾아오질 않나. 요즘 아주 눈에 뵈는 게 없지?”

    이믿음이 등장하자 강태섭은 성난 목소리로 이믿음을 달달 볶아 댔다.

    그런데 말이다.

    잔뜩 주눅이 들어도 모자랄 이믿음은 오히려 웃고 있었다.

    “과장님, 유언은 그것뿐입니까?”

    “뭐라고? 이 새끼가 돌았나.”

    강태섭이 불같이 화내는 것을 무시하고 이믿음은 성큼성큼 서재로 다가갔다.

    비타민 상자의 윗면을 개봉해 현금 다발을 노출시켰다.

    “크으, 약국에서도 안 파는 이 비싼 비타민을 혼자 드시네요.”

    “인마, 그 더러운 손 못 치워?”

    “더러운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의 시꺼먼 속이죠.”

    이믿음이 말을 마침과 동시에 우람한 체구를 지닌 사내 세 명이 동시에 서재로 쏟아져 들어왔다.

    강태섭과 이시형은 낯선 이들의 침입에 화들짝 놀랐다.

    “다… 당신들 뭐야. 왜 남의 집에 쳐들어오는 건데?”

    “부산 대포 경찰서 특수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강태섭의 지적에 형사가 재킷 주머니에서 형사증을 꺼내 보였다.

    “리베이트 비리 신고를 받고 출동했습니다. 현장에서 현금이 발견된 마당에 딱히 둘러댈 말은 없겠죠?”

    “당신들 무단 침입했잖아. 영장 가져왔어?”

    “현행법 상, 리베이트 관련 조사는 긴급 체포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영장은 필요 없어요.”

    “이이이…….”

    강태섭은 형사를 한번 노려보고 그다음에 이믿음을 노려보았다.

    설마 이 모든 게 저 새파란 애송이의 함정이었을 줄이야.

    그러니까 현금 전달을 이시형에게 맡긴 것도.

    이시형을 자신의 자택으로 끌어들인 것도 현장에서 증거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단 말이지?

    자신은 이번 일에서 쏙 빠진 상태에서?

    강태섭은 이믿음을 당장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일단 이 위기를 빠져나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필사적으로 생각해.

    이대로 왕국을 무너트릴 순 없다고!

    “뭔가 착각하신 모양인데. 사실 이 친구가 저한테 빚이 있습니다.”

    강태섭은 이시형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빌려준 돈을 현금으로 받은 것뿐이에요. 그렇지?”

    “아, 네. 맞습니다. 저기요, 형사님들 빌린 돈을 갚은 것도 죄가 됩니까? 그게 죄라면 빨리 잡아가세요.”

    눈치 빠른 이시형이 강태섭의 말을 거들었다.

    상황이 잠시 반전되는가 싶었는데 이믿음이 헤죽헤죽 얄밉게 웃었다.

    “두 분 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요즘은 빚도 다른 사람이 갚아 줍니까?”

    “…….”

    “강 과장이 현금 인출기에서 현금 인출하는 모습이 CCTV에 다 찍혔고요. 카페에서 현금 박스를 건네는 장면도 CCTV에 다 찍혔어요.”

    “…….”

    “과장님, 당신도 궁지에 몰리니까 핑계가 구질구질해지네요?”

    이믿음의 날카로운 발언은 강태섭을 낭떠러지로 몰기에 충분했다.

    영상까지 확보했다면 강태섭은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진퇴양난.

    게다가 강아람까지 조사를 받게 된다면 그 이전부터 행해진 리베이트까지 전부 까발려질 게 분명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그 속담이 거짓이라는 사실은 강태섭은 오늘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이쯤 되면 정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같이 서로 이동하실까요?”

    형사의 말에 강태섭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쌓아 온 권위와 평판이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 * *

    그로부터 이틀 뒤.

    각종 매스컴은 강태섭의 리베이트 사건으로 도가니 속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비록 강태섭의 이름이 실명으로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의료인들은 K 과장이 강태섭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지금까지 강태섭에게 이용당했다가 버려진 사람들이 기회다 싶어서 주변에 진실을 퍼뜨렸던 것이다.

    의료계가 좁았으므로 소문은 빠르게 확산되었다.

    소문은 결국 진료부 원장의 귀까지 들어갔고 강태섭은 진료부 원장과의 독대를 피할 수 없었다.

    “긴말은 필요 없겠지? 이번 주 안으로 짐 싸게.”

    남을 버릴 줄만 알았지 남에게 버림을 당하는 날이 올 줄이야.

    명백한 축객령을 통보받고 강태섭은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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