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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250화 (250/257)
  • 250화 제5장 도전 (5)

    정규 스케줄을 마친 나는 강태섭의 연구실로 향하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었는데 강태섭이 먼저 나를 호출했다.

    본관을 나오자 미지근한 바람이 두 뺨을 스쳤다.

    겨울에 가까운 봄이 아니라 여름에 가까운 봄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시간에 나오면 하늘이 어둑어둑했거늘.

    요즘은 오렌지 빛 석양이 나를 반겨 주었다.

    퇴근하는 병원 스태프들과 외래 진료를 마치고 귀가하는 환자와 보호자들로 병원 바깥은 북적거렸다.

    인파를 헤치며 연구동으로 향하는 동안.

    나는 이시형을 떠올렸다.

    이시형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악질이었다.

    설마 무수혈 환자의 보호자를 꼬드겨 수혈 수술을 유도할 줄이야.

    그의 사고방식은 지금 떠올려도 악랄하고 괘씸했다.

    내 입으로 말하긴 조금 부끄럽다만 내가 아니라 다른 교수였으면 이시형에게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보호자가 입을 꼭 다물어 준다는데 말이다.

    그 다급한 상황에서 무수혈 수술을 고집할 집도의가 몇이나 되겠는가.

    ‘강태섭하고 같이 처리해야겠어.’

    나는 이시형을 박멸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해충과 공존하는 일은 내 성미와 맞지 않았다.

    “이 교수, 여기!”

    연구동 1층 로비에 도착하자 강태섭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어디를 다녀오는 길이었나.

    왜 연구실에 있지 않고 로비에 있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강태섭에게 다가갔다.

    “영광이네요. 과장님이 다 마중을 나와 주시고.”

    “잘 아는구먼. 이 교수쯤 되니까 내가 마중을 나온 거라고.”

    내 농담을 강태섭도 농담으로 받았다.

    병원 일로만 엮이지 않는다면 강태섭은 꽤 괜찮은 사람이긴 했다.

    유머 감각이 뛰어나고 남의 말을 잘 들어 주고 남이 듣고 싶은 말도 잘해 주니까.

    “오늘은 모처럼 저녁이나 함께 하면서 이야기를 해 보자고. 내가 잘 아는 곰장어 맛집이 있거든.”

    “과장님이 사 주시는 겁니까?”

    “뭐, 엄밀히 말하면 병원이 사는 거지. 법인 카드를 쓸 거니까.”

    강태섭을 따라 나는 가까운 곰장어 집으로 향했다.

    이동하는 동안 강태섭은 친형처럼 나를 아끼는 척했다.

    혼자 부산에 내려와서 자취하니 힘들지 않냐.

    식사는 제대로 챙겨 먹고 있냐.

    일하는 데 불편한 점은 없냐 등등.

    이 화법은 전생의 내가 강태섭에게 깜빡 속아 넘어갔던 화술 중 하나였다.

    [과장님이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있구나. 그러면 나도 과장님의 관심과 애정에 보답해야지.]

    전생의 나는 강태섭과 사적인 대화를 나누고 나면 항상 그런 마음을 가지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멍텅구리 같은 짓이었다.

    사람들이 돼지를 살찌우는 이유는 돼지를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돼지를 잡아먹기 위해서였다.

    전생의 나는 내가 사육당하는 돼지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신수술 강탈이라는 도축장에 끌려갈 때까지.

    10분여를 걸어 도착한 식당.

    식당은 강태섭의 말대로 맛집처럼 보였다. 손님들이 그득한 탓에 가장자리 테이블에 간신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치이이익.

    연탄불로 굽는 곰장어가 석쇠 위에서 노릇노릇하게 익어 갔다.

    술에 취하고 흥에 취한 주변 테이블에서는 왁자지껄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곰장어 굽는 고소한 냄새도 환상적이었는데 냄새만으로 밥 한 공기를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때? 분위기 죽이지?”

    강태섭이 콧대를 세우며 물었다.

    “정말 장난 아니네요. 이러다 저도 응급실에 실려 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자네 넉살도 참.”

    강태섭은 곰장어에 반주를 곁들였고 나는 곰장어만 먹었다.

    당연하게도 의국에서 언제 응급 콜이 올지 몰라서였다.

    걱정 없이 술을 마시려면 아마 은퇴할 때쯤은 되어야 할 것이다.

    “어제 집도했던 무수혈 수술, 잘 봤네. 특히 부족한 시야를 내시경으로 확보할 때는 무릎을 쳤지.”

    “…….”

    “제임스 홉킨스에서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나?”

    “아니요, 즉흥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럼 더 놀랍군. 패닉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아무리 위기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길이 보이더군요. 저는 단지 포기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래, 내가 그래서 이 교수를 좋아하지.”

    강태섭이 고개를 끄덕이고 잔을 비웠다. 나는 강태섭의 빈 잔에 소주를 채웠다.

    “그건 그렇고 말이야.”

    강태섭의 화제 전환에 나는 느슨했던 긴장감을 팽팽하게 당겼다.

    그건 그렇고 말이야.

    강태섭의 단골 멘트 중 하나였다.

    이 멘트 뒤에는 항상 안 좋은 이야기가 나왔다.

    “자네 검사를 너무 부실하게 하는 거 아닌가? 오늘 교수들 검사에 관련된 통계를 뽑았는데 자네가 꼴찌였어.”

    “…….”

    “검사가 적으면 자연스레 병원 수익은 줄어. 내가 진료부 원장님을 뵐 면목도 없고.”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였나?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교수님, 아까 초진 환자 검사 루틴 말씀드렸는데요. 심전도, 흉부 엑스레이, 피 검사에 심초음파, 운동 부하 검사, 24시간 감시 심전도 검사까지입니다.]

    한 달 전 최경훈이 내게 알려 준 검사 루틴은 총 여섯 개였다.

    하지만 나는 그중에서 심전도, 흉부 엑스레이, 피 검사, 심초음파 정도만 사용했다.

    이유라면 하나뿐이었다.

    환자의 진료비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서.

    하지만 실적밖에 모르는 강태섭이 내 방식을 달가워 할 리 없었다.

    “나라고 자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야. 하지만 결국 병원도 돈으로 돌아간다네. 돈이 없으면 병원도 망하고 우리도 일자리를 잃게 돼.

    “병원이 굴러가는 돈도 결국 환자의 호주머니에서 나오지 않습니까? 환자에게 덤탱이를 씌우다 보면 환자가 오히려 병원을 멀리하게 되지 않을까요?”

    “허허, 답답한 소리를. 그래서 계속 지금처럼 검사를 하겠다는 소리인가?”

    둥글고 완만하던 강태섭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날카로워졌다.

    “내가 자네를 아끼지만 실적을 평가하는 일은 별개야. 계속 이런 식이면 나도 교수 평가 점수를 낮게 줄 수밖에 없어.”

    “과장님.”

    나는 차분하게 운을 뗐다.

    슬슬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던져 볼까.

    “비록 제가 검사 건수는 뒤처져도 다른 교수보다 수익을 더 낼 방법이 존재합니다.”

    “그게 뭐지?”

    “로봇 수술입니다.”

    나는 로봇 수술을 입에 올렸다.

    현시점에서 로봇 수술을 하는 흉부외과는 그리 많지 않았다.

    빅5 병원의 흉부외과 본원만이 수술 로봇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로봇 수술은 비보험입니다. 일반 수술보다 두 배 가까이 수술비를 받을 수 있죠.”

    “자네 로봇 수술도 할 줄 아나?”

    “물론입니다. 제임스 홉킨스에서 배웠죠.”

    전생의 나는 로봇 수술을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

    로봇을 사용하면 손의 감각이 둔해지는 느낌이 들어서.

    당연히 로봇 수술을 능숙하게 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번 생은 달랐는데 제임스 홉킨스에서 근무하며 나는 로봇 수술에 통달하게 되었다.

    동양인 출신 외과의로 받은 무시와 차별을 갚아 주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

    “로봇 수술은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환자들이 선택할 겁니다. 그런 분들에게 수술비를 더 받는다면 저도 죄책감이 없겠죠.”

    “그러니까 검사에서 모자란 수익을 로봇 수술로 때우겠다?”

    “네, 그런 셈입니다.”

    나는 말을 마치고 강태섭의 표정을 살폈다.

    강태석은 손을 턱에 괸 채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고민이 되기는 할 것이다.

    수술용 로봇의 가격은 무려 20억에서 30억 사이였고 월 유지비도 만만치 않았다.

    따라서 수술 로봇을 도입했다가 결과가 좋지 않다면 강태섭은 과장 자리를 내놓아야 할 판국이었다.

    본인의 명줄이 달린 문제이니만큼 신중할 수밖에 없으리라.

    “제가 알기로 부산에 수술용 로봇을 도입한 흉부외과는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거야 그렇지.”

    “이 기회에 저희가 로봇 수술을 선점하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마침 제가 의료 정보 프로그램에 나와서 주가도 올라간 상황이고요.”

    “…….”

    “무수혈 수술을 참관하셨다면 과장님도 제 실력에는 이견이 없으리라 판단합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시죠?”

    나는 일부러 강태섭의 대답을 재촉했다.

    강태섭이 전생의 내게 써 먹었던 방법을 고스란히 되갚아 주었다.

    자, 어서 물어.

    이것보다 더 맛 좋은 미끼는 없다고.

    한참 고민하던 강태섭이 소주를 털어 넣고 말을 이었다.

    * * *

    모처럼 찾아온 주말.

    나는 해운대 주변을 거닐고 있었다.

    주변 사람에게는 너그러우면서 정작 내게는 너무 엄격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바람을 쐬기 위해 찾았다.

    모래사장에 서서 바다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가로막는 건물이 없어 탁 트인 시야.

    철썩철썩 리듬감 있는 파도소리.

    모래사장에서 뛰노는 청춘들의 꺄르르 소리.

    하늘과 맞닿아 있는 푸른 바다는 그 자체로 안식처였다.

    이 좋은 걸 왜 지금까지 못 즐기고 살았나 후회가 될 정도였다.

    ‘아직은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어.’

    바다 풍경을 즐기며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 강태섭과 가진 술자리에서 강태섭은 수술용 로봇 도입을 승낙했다.

    조만간 진료부 원장을 만나 설득을 해 보겠다고도 말했다.

    내가 파 놓은 함정에 강태섭이 한 발자국 성큼 다가온 것이다.

    수술용 로봇 도입이 함정인 이유는 리베이트 때문이었다.

    리베이트란 의료 장비 업체나 제약 회사가 의사들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뇌물이었다.

    뇌물을 줄 테니 우리 물건을 좀 써 달라는 방식이었다.

    전생에서부터 강태섭은 리베이트에 환장한 놈이었다.

    아마 수술용 로봇을 도입하면서도 뇌물을 챙길 생각에 한껏 부풀어 있겠지.

    나는 그 부분을 공략할 예정이었다.

    리베이트를 폭로한다면 강태섭은 형사상의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왕좌에서 내려오는 일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리라.

    물론 리베이트 폭로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강태섭은 영리하고 교활했다.

    본인이 탈 나지 않는 방법으로 리베이트를 받을 확률이 높았다.

    내가 리베이트에 관해서 까막눈이라는 점도 문제였고.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전생의 나는 미련한 곰이었지만 이번 생의 나는 눈치 빠른 여우였다.

    강태섭이 방심한 틈을 타서 목덜미를 문다면 승산은 충분했다.

    지이이잉.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갑자기 떨려 왔다.

    주말에 누구지? 가족인가?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더니 주인공은 강태섭이었다. 역시 강태섭은 양반이 못 되었다.

    “네, 과장님. 전화받았습니다.”

    - 이 교수, 통화 괜찮아?

    “그럼요, 과장님 전화라면 자다가도 받아야죠.”

    - 용건부터 말할게. 수술용 로봇 도입 말이야. 일이 살짝 꼬였단 말이지.

    강태섭의 말에 내 미간이 좁아졌다.

    강태섭을 가장 확실하게 쳐 낼 수 있는 방법은 리베이트 폭로였고.

    리베이트 폭로를 완성하기 위해서 수술용 로봇은 반드시 도입되어야 했다.

    “진료부 원장님이 반대하시나요?”

    나는 다급한 마음에 먼저 물었다.

    - 그건 아니야.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하셨는데 다른 문제가 생겼어. 아무래도 자네가 소아 흉부외과 수술을 해줘야 할 것 같아.”

    “수술용 로봇 도입하고 소아 흉부외과 수술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는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소아 흉부외과 수술이라면 소아 흉부외과에서 처리하면 그만 아닌가.

    그런데 그 수술을 왜 내게 맡긴다는 거지?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이어지는 강태섭의 설명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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