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제5장 도전 (4)
‘역시 이 교수님이야.’
최경훈은 이믿음의 처치를 지켜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절개창이 작아서 가뜩이나 수술 시야가 좁음에도 불구하고.
심장이 사납게 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믿음은 멋진 봉합술을 펼치고 있었다.
적어도 최경훈이 알기로는 말이다.
오프펌프로 MIDCAB을 소화하는 교수는 의국에 없었다.
에세이로만 봤던 우상의 수술을 도우며 최경훈은 커다란 감동을 느끼는 중이었다.
자신도 이믿음처럼 정의롭고 환자를 위하고 실력 좋은 의과의가 되고 싶다는 동경도 품었다.
찰칵!
수술 매듭을 자르고서 최경훈은 참관용 수술실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과장 강태섭과 부교수 이시형이 수술방을 굽어보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언제 또 여기까지 행차했지?
“혹시 참관 중인 사람이 있니?”
수술에 열중하던 이믿음이 최경훈에게 물었다.
‘바쁜 와중에 내 눈짓까지 읽어 내신 건가?’
최경훈은 이믿음의 신기에 다시 한번 놀랐다.
“아, 네. 과장님하고 이시형 부교수님이 있습니다.”
“수술하다가 체하겠네.”
이믿음의 농담에 스태프들 몇몇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믿음은 카리스마와 유머 감각을 동시에 갖춘 몇 안 되는 의사였다.
“우회 혈관 한쪽만 더 연결하면 끝나니까 다들 힘냅시다.”
“네, 교수님.”
훈훈한 분위기 속에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마취의가 비보를 전하기 전까지는.
수술이 2시간째로 접어들 때쯤이었다. 마취의는 환자의 바이탈이 추락하고 있음을 알렸다.
혈압은 별안간 90mmHg/75mmHg로 뚝 떨어졌다.
심전도 리듬은 불규칙한 형태를 띄우며 상하좌우로 날뛰었다.
그 좋았던 수술방 분위기가 무겁고 서늘해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아니 대체 왜 이러지?’
최경훈은 크게 당황했다.
수술 중에 실수나 사고가 있었다면 모를까.
관상 동맥 우회술은 지루할 정도로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환자의 바이탈이 흔들릴 이유는 손톱만큼도 없었다.
“최경훈, 강심제하고 헤파린(항응고제) IV 믹스.”
“네, 교수님.”
최경훈은 이믿음의 지시를 따라 다급하게 약물을 투여했다.
하지만 약물이 들어갔음에도 환자는 간신히 현상 유지만 하고 있었다.
환자에게 더 근본적인 문제가 숨어 있는 듯했다.
“출혈이 있나 보네.”
이믿음이 낭패라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교수님의 수술은 완벽하지 않았습니까? 갑자기 왜 출혈이…….”
“수술의 완성도와는 상관없이 출혈은 언제 어디서나 발생할 수 있어. 장기와 혈관은 인간이 다 이해하기 힘들 만큼 복잡하고 민감하니까.”
‘최악의 상황이네요.’라고 내뱉고 싶은 것을 최경훈은 간신히 삼켰다.
하필이면 무수혈 수술 도중에 출혈이라니…….
최경훈은 문득 수액대에 걸려 있는 혈액 팩을 응시했다.
총 3개의 자가 혈액 팩.
그중에서 두 번째 혈액 팩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교수님, 혈액 팩을 갈까요?”
“그래야지. 셀 세이버에 비축한 혈액은 140밀리미터 정도지?”
“네.”
대답을 마치고 최경훈은 마지막 잎새와도 같은 마지막 혈액 팩을 매달았다.
그 의미와 상징성 때문일까.
마지막 혈액 팩이 유달리 무겁게 느껴졌다.
“…….”
“…….”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스태프들은 어미 새를 바라보는 아기 새처럼 이믿음을 쳐다보았다.
다들 이 위기를 이믿음이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걱정하고 있었다.
“교수님, 소(小) 흉부절개를 해서 출혈 부위가 보이질 않습니다. 절개창을 좀 더 넓힐까요?”
제1보조 조하늘이 의견을 제시했다.
이믿음이 고개를 저으며 반론을 펼쳤다.
“절개창을 넓히면 출혈이 가속화될 거야. 남은 혈액으로 감당 못 할 수준으로.”
“하지만 이대로라면 수술 시야가 너무 좁아서 출혈 부위를 찾을 수 없지 않습니까? 출혈 부위를 못 찾으면 결국 혈액이 모자라게 될 텐데…….”
이믿음과 조하늘의 의견을 듣고 있자니 최경훈은 가슴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
출혈을 멈추려면 출혈 부위를 찾기 위해 절개창을 넓혀야 한다.
그런데 말이다.
절개창을 넓히면 출혈이 더 심해진다는 모순적인 상황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한단 말인가.
교수님이라면 해내실 수 있죠?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최경훈이 이믿음을 향해 흔들림 없는 믿음을 보내던 바로 그 타이밍이었다.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던 이믿음이 최경훈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흉강경.”
단 한마디로 상황은 180도 뒤집혔다.
아하!
절개창을 넓히지 않고 내시경으로 수술 시야를 확보하시겠다는 거구나.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하셨지?
다른 스태프들의 표정을 보니 그들도 이믿음의 결정에 퍽 감탄한 눈치였다.
“여기 있습니다, 교수님.”
최경훈은 재빨리 흉강경을 이믿음에게 전달했다. 흉강경과 모니터를 연결하기도 했다.
스으으윽.
이믿음이 내시경을 좁은 절개창 내부로 밀어 넣었다.
심장 주변 혈관에서는 출혈 소견이 없었다.
하지만 심장 상단에 위치한 대동맥 분지의 혈관이 터져 있었다.
현재로서는 한 방울도 아까운 혈액들이 웅덩이로 고여 있었다.
“내시경용 보비(전기 소작기)하고 석션.”
이믿음은 양손을 동시에 사용했다.
오른손으로는 터진 혈관을 지져서 출혈을 막아냈고 왼손으로는 피 웅덩이를 빨아들였다.
출혈을 바로 잡으면서 이전에 투약한 약물들이 더욱 효과를 내기 시작했다.
환자의 바이탈은 곧 정상 범위로 돌아왔다.
자칫 망할 수도 있었던 수술이 순식간에 본래 궤도에 진입한 것이다.
이 모든 기적은 이믿음이 집도의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최경훈은 생각했다.
“우회 혈관 후딱 봉합하고 수술 마무리 지읍시다.”
“네, 교수님.”
스태프들의 우렁찬 대답과 함께 재개된 수술.
그로부터 40분 만에 무수혈 오프펌프 MIDCAB은 종료되었다. 성공적으로.
* * *
‘어째 만만한 게 하나도 없네.’
수술방을 나서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예정보다 일주일 가까이 앞당겨진 무수혈 수술.
거기에 뜻하지 않은 대동맥 분지 출혈까지.
의술의 신은 마치 나를 골탕 먹이려고 작정한 것처럼 보였다.
만약 수술에 실패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환자의 죽음에 내 가슴은 반으로 찢어졌을 것이다.
보호자를 다시 볼 면목이 없었을 것이고.
이시형은 의기양양하게 나를 비웃었을 것이며 강태섭은 나를 탈곡하듯 탈탈 털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술이 성공하면서 그 끔찍한 일들은 이제 한낱 상상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힘겹게 쟁취한 해피 엔딩에 만족하며 수술 복장을 정리했다.
“수혈 없이 수술은 무사히 끝났습니다. 환자분은 중환자실에서 회복하다가 일반 병실로 돌아가실 겁니다.”
나는 보호자들에게 미소를 띤 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두 자매가 고개를 꾸벅 숙여 가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 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제가 갑자기 수혈을 고집하는 바람에…….”
“아버님 목숨이 위중하셨으니까요.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사실은요. 예전에 저희 아버지 진료를 봐 주셨던 교수님을 우연히 마주쳤거든요. 그분이 수혈 수술을 권하시길래 저희도 순간적으로 혹해서…….”
큰딸의 설명을 듣던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예전에 진료를 봐 줬던 교수가 수혈 수술을 권해?
그렇다면 보호자는 단순히 이용을 당했던 건가.
이야기를 듣고 나니 번뜩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이시형 부교수.
느지막하게 수술을 끝낸 그가 수술실을 나오다가 보호자와 마주쳤다면 충분히 보호자에게 수혈을 부추길 수 있었다.
이시형의 의도는 깊게 고민할 가치가 없을 만큼 명백했다.
그저 나를 엿 먹이겠다는 것이었다.
만약 내가 보호자의 말을 듣고 수혈 수술을 했다면 나중에 수혈 사실을 환자에게 고자질했겠지.
설령 무수혈 수술을 하더라도 보호자와 실랑이하면서 수술 시간을 소비하게 만들 수 있다는 부분까지 계산했으리라.
누가 강태섭의 오른팔이 아니랄까 봐.
이시형의 사고방식은 추잡하고 사악하기 그지없었다.
“선생님, 피곤하시죠? 표정이 안 좋으신데…….”
큰딸이 내 표정을 읽고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습니다, 늘 있는 일이라서. 보호자분도 기다리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푹 쉬었다가 중환자실로 올라가시죠.”
보호자와 대화를 마친 나는 휴게실로 이동했다.
* * *
‘밥맛 떨어지는 놈.’
오전 컨퍼런스가 진행되는 내내 이시형은 이믿음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제 무수혈 수술을 참관한 이후 이시형의 기분은 계속 가라앉아 있었다.
우울한 이유는 당연하게도 전부 이믿음에게서 비롯되었다.
수술이 일주일 가까이 앞당겨졌음에도.
수술 중 큰 출혈이 발생했음에도.
심지어 이시형이 보호자를 유혹해 수혈 수술을 유도했음에도.
이믿음은 그 모든 위기를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전생에 나라라도 구한 걸까, 이믿음은 운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이름을 이운빨이라고 고쳐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한편 이시형의 기분이 언짢은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바로 과장 강태섭이었다.
수술을 같이 참관했던 강태섭은 이믿음의 실력을 높이 샀다.
이믿음은 과연 부교수가 될 만한 재목이라는 말도 했다.
강태섭의 오른팔로 6년을 보낸 이시형이 듣기에는 실로 거북한 언사였다.
‘나도 영어만 좀 했으면 유학 가서 저 인간만큼은 배워 올 수 있었다고.’
강태섭의 면전에서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이시형은 간신히 삼켜야 했다.
어쨌거나 이믿음의 무수혈 수술은 이시형을 지독하리만큼 불편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그림이 좋지 않았다.
이시형이 거절한 수술을 이믿음이 보기 좋게 성공시키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스태프들은 자신보다 이믿음의 실력이 한 수 위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는 이시형으로서는 차마 받아들이기 힘든 굴욕이었다.
“이 교수님, 잠깐 저 좀 보시죠?”
컨퍼런스와 회진이 끝난 후, 웬일인지 이믿음이 이시형을 불렀다.
이시형은 이믿음을 따라 순순히 회의실로 이동했다.
이믿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우선 들어나 보자는 생각이었다.
“할 말이 뭐예요?”
텅 빈 회의실에서 이시형은 전자 담배부터 입에 꼬나물었다.
전자 담배는 냄새도 적고 덜 독하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예열 시간이 있다는 게 단점이었다.
궐련을 피우던 습관대로 담배를 빨아 당겼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솔직히 어제 일은 너무 치사하지 않았습니까?”
“바쁜 사람 불러 놓고 뭔 소리예요?”
이시형은 모른 척 오리발을 내밀었다.
뭐야, 이 자식.
설마 보호자에게 수혈 유도한 사실을 눈치챈 건가?
“나를 싫어하면 나를 공격하면 되지. 왜 애꿎은 보호자와 환자까지 엮냐 이 말입니다.”
“거참,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시치미 떼도 소용없어. 보호자에게 이야기 다 듣고 왔으니까.”
이믿음이 갑자기 도끼눈을 뜨고 반말을 했다.
하지만 이시형은 무례함을 느끼기 전에 이믿음의 기백에 당황부터 하고 말았다.
그의 계략을 알아챈 것도 모자라 이렇게 직접 들이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이시형도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금방 냉정을 되찾은 이시형은 예열된 전자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예전에 담당 교수였는데 보호자에게 그 정도 충고도 못 하나?”
“그건 충고가 아니야. 당신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함정이지.”
“이 교수, 이 기회에 정신과 상담 좀 받아 봐. 아무래도 피해망상 중증인 것 같은데.”
“꼴값 떠네.”
“뭐… 뭐라고? 방금 한 말 다시 해 봐.”
“꼴값 떤다고 했다. 왜? 정곡을 찔리니까 당황스러워?”
이믿음이 한 발짝 더 다가와 이시형과 얼굴을 가까이했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이게 마지막 경고야. 다시 한번 환자와 보호자로 장난치면 당신 죽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