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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244화 (244/257)

244화 제4장 귀국 (4)

의사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나는 본관 1층으로 이동했다.

가는 내내 이시형이 했던 협박과 시비들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이 교수, 한국에서는 한국의 법을 따라야 하는 거 잘 알지? 너무 설치면 곤란해질 거야.]

[러셀을 구워삶은 것처럼 강 과장님도 구워삶았나? 어린 나이에 정치질에 도가 텄나 보군.]

[직급은 같은 부교수라도 난 자네와 경력과 경험이 달라. 앞으로 내 말 잘 들어. 혹시 알아? 떡이라도 나올지.]

이시형은 처음부터 내 기를 꺾으려고 들었다.

본인이 나보다 윗사람이라는 점을 각인시키려고 들었다.

꼴같잖은 짓거리에 나는 웃음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적어도 내 경험상으로는 말이다.

아랫사람을 겁박하는 놈치고 능력 있고 인성 좋은 놈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만 강태섭은 오히려 이시형의 이런 돌격 대장 같은 면모에 흠뻑 빠지지 않았을까.

강태섭 본인이 해야 할 더러운 말과 행동들을 이시형이 대신해 줄 테니까.

‘재밌네, 재밌어.’

외래 진료실에 도착할 무렵, 나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능력주의가 판치는 미국 의사 생활은 솔직히 지루했다.

능력 좋은 나를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했기에.

그런데 한국에 복귀하고 나니 한국식 위계질서가 매운 고춧가루처럼 나를 자극하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매콤한 의사 생활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현재 시간 오전 8시 30분.

오전 진료 시작 30분 전이었지만 병원은 벌써부터 환자와 보호자로 가득했다.

비어 있는 진료 대기 좌석이 없었다.

원무과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접수·수납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길게 줄 지어 서 있었다.

세상에는 아픈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았다.

아파도 병원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을 포함하면 그 수는 훨씬 더 많으리라.

생노병사.

그 어떤 인간도 피해 갈 수 없는 숙명을 나는 잠시 떠올려 보았다.

나는 어떻게 늙고 어떤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나게 될까.

“안녕하세요, 교수님.”

흉부외과 제1진료실에 도착하자 외래 간호사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간호사의 이름은 강효진이었다.

날다람쥐처럼 잽싸게 생긴 것이 일을 잘할 상이었다.

강효진이 교통정리를 잘해 준다면 내 외래 진료도 한결 편해지겠지.

“반가워요, 효진 씨.”

“오래 볼 텐데 말씀 편하게 하세요, 교수님.”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죠.”

강효진과 짧게 잡담을 나누고 나는 진료실로 들어갔다.

진료실에는 두 개의 컴퓨터 책상이 놓였다.

하나는 내가 진료를 보는 책상이고 다른 하나는 레지던트가 사용하는 책상이었다.

문 바로 옆에는 의학 서적이 빽빽하게 꽂힌 2단 책장이 놓여 있었다.

책장 바로 옆에는 심장의 구조를 그려 놓은 지도가 한 장 붙어 있었다.

[흉부외과 전문의 이믿음]

책상 위에 놓인 명패를 나는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명패에 적힌 직함이 마치 내 인생을 요약해 놓은 것 같았다.

나는 태어나서부터 흉부외과의였고, 지금도 흉부외과의였고, 눈을 감을 때까지도 흉부외과의일 테니까.

진료실 책상에 앉아서 나는 병원 의료 프로그램을 작동시켰다.

“하아…….”

숨길 수 없는 한숨이 입술 사이로 삐져나왔다.

첫 진료를 개시하는 날이라서 그럴까.

진료 예약 환자가 3명뿐이었다.

심지어 오전에만 3명이었던 것도 아니고 오늘 하루 종일 3명 말이다.

* * *

환자가 없었으므로 할 일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전에 봤던 1년 차 레지던트 최경훈과 수다를 떠는 것뿐이었다.

최경훈의 역할은 곁에서 나 대신 차트를 입력하는 것이었다.

최경훈은 내 팬임을 자처했다.

진료실에 들어오자마자 예전에 내가 썼던 에세이를 들이밀며 사인을 부탁했다.

내 에세이를 읽은 후 흉부외과를 전공으로 선택했다고도 했다.

내가 뿌려놓은 씨앗을 내가 거두게 될 줄이야.

오묘하면서도 뿌듯한 기분이 감출 수가 없었다.

“교수님, 실례가 안 된다면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대화의 열기가 식어갈 무렵 최경훈이 운을 뗐다.

“뭔데?”

“아침에 봐주셨던 환자 말입니다. 그 환자가 폐렴이라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흉부 엑스레이를 촬영하기도 전에 알고 계셨던데.”

“그거야 어렵지 않지.”

나는 최경훈의 열정을 높이 사며 간단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노년의 환자의 경우 폐렴에 걸리더라도 증상이 미약한 편이다.

따라서 노년 환자의 폐렴을 알아차리려면 주치의의 세심한 관찰과 간호 기록지의 꼼꼼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식욕 부진, 전신 무력감, 가래 끓는 소리 등을 중점적으로 봐 두면 좋다.”

“감사합니다.”

“나도 궁금한 게 있는데 넌 강 과장님을 어떻게 생각하니?”

이번엔 내가 질문을 던졌다.

물론 최경훈이 내 앞에서 강태섭을 욕할 리는 없었다.

그래도 말투나 목소리, 메시지를 읽어 보면 괜찮은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제가 감히 과장님에 관한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해 봐.”

“으음… 제가 생각하는 과장님은 스태프들을 잘 챙겨 주는 분입니다. 가끔 사비로 레지던트 야식비까지 챙겨 주세요.”

“…….”

“교수님들도 다 과장님을 잘 따르시고. 제가 이 교수님 다음으로 존경하는 분이 과장님입니다.”

최경훈은 강태섭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듯했다.

거짓말을 한다거나 본심을 숨기고 있다는 기색은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강태섭이 무서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강태섭은 주변 사람들이 강태섭을 선한 사람이라고 믿게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이용해 자신의 사욕을 챙길 줄도 알았다.

전형적인 위선자라고 해야 할까.

따라서 의국에서 강태섭의 추악한 면모를 알고 있는 사람도, 밝혀낼 수 있는 사람도 나밖에 없었다.

나는 앞으로 펼쳐질 강태섭과의 싸움이 고독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 * *

점심시간이 오기 전까지 나는 단 한 명의 환자도 받지 못했다.

병원에서 나를 월급 도둑이라고 몰아붙여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었다.

물론 진료 개시 첫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전생의 나도 외래 교수로 자리 잡는데 1년이 넘게 걸렸으니까.

하지만 상황을 이해한다고 해서 자괴감이나 초조함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무슨 방법을 써야 할 텐데…….’

구내식당으로 이동하는 동안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강태섭이 1년씩이나 나를 기다려 줄 리는 만무했다.

강태섭에게 나는 차근차근 키워 먹어야 하는 먹잇감이 아니라 당장 피를 빨아야 하는 먹잇감이었으니까.

나를 부교수로 임명하고 연봉을 2천만 원 올려 준 것도 다 그런 맥락이었다.

즉 이제는 내가 강태섭에게 내 가치를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됐다.

“이 교수, 밥이 입으로 넘어갑니까?”

구내식당에서 줄을 서는데 등 뒤에서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시형이 희죽희죽 웃고 있었다.

“무슨 뜻이죠?”

“옛말에 일하지 않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하던데. 이 교수, 오늘 오전에 환자 한 명도 안 봤던데요?”

“진료 첫날이라서 그렇습니다.”

“과연 첫날이라서 그런 걸까요? 앞으로도 마음고생이 심할 것 같은데.”

“어째 제가 잘 안 풀리기를 기도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나는 눈썹을 치켜뜨며 되물었다.

이제 보니 이시형은 깐족거리는 데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럴 리가요. 다 같은 흉부외과 식구인데. 다만 이 교수가 의국 명성에 먹칠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장 말싸움을 하면 불리한 건 나였다. 내세울 만한 성과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받은 치욕은 이자를 톡톡히 쳐서 갚아 주리라.

“이시형 교수님이 왜 저렇게 까칠하신지 모르겠습니다. 평소에는 안 저러신데…….”

식판에 음식을 담고 식탁에 앉자 동행한 최경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 밥그릇 싸움이야. 자기 밥그릇을 내게 뺏기고 싶지 않다는 거지.”

“밥은 사이좋게 나눠 먹으면 되는 거 아닐까요?”

“순진한 녀석. 세상에는 남보다 밥 한 숟가락이라도 더 많이 먹으려고 하는 사람들로 넘쳐 난단다.”

“만약 제가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혼내 줘야지. 그런 놈들은 한번 양보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거든.”

나는 식탁에 앉은 이시형 교수 패거리를 힐끔거렸다.

“교수님, 저는 어쩐지 슬퍼졌습니다.”

최경훈이 어쩐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의사는 병하고 싸워야 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말씀을 듣고 보니 동료 의사들과도 경쟁을 해야 하는 것 같아서요.”

최경훈이 서글퍼하는 이유를 나는 누구보다 알았다. 승진과 평판을 두고 동료들과 경쟁하는 마음이 어찌 편할 수 있을까.

심지어 성격이 온순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고통스러우리라.

하지만 말이다.

최경훈은 중요한 포인트를 잘못 짚었다.

“경훈아.”

“네, 교수님.”

“경쟁이 꼭 나쁜 건 아니야. 너나 나를 무시하고 깔보면서 자기 사리사욕을 챙기는 사람이 나쁜 거지.”

“…….”

“에세이에 악당 의사를 처리하는 법은 안 적었던 것 같은데. 앞으로 직접 보여 주마.”

식사를 마친 나와 최경훈은 산책 삼아 본관 내부를 크게 훑었다.

그런데 본관을 돌던 중 나는 치과 외래 진료실에 걸려 있는 전광판에 확 꽂혔다.

한 치과 의사가 의학 정보 프로그램에 나온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이름과 얼굴을 알리기엔 의학 정보 프로그램만 한 것이 없지.

출연만 할 수 있다면 인지도를 단번에 끌어 올릴 수 있어.

“교수님, 어디 편찮으세요?”

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자 최경훈이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젓고 내 인맥을 검색했다.

연예계 쪽 인맥이라면 너구리의 매인 래퍼 오진호가 유일하긴 한데…….

나는 미친 척하고 오진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진호의 기획사를 통한다면 의료 정보 프로그램에 한 번 정도는 출연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실로 낯부끄러운 부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찜찜했으나 지금은 물불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내가 쪽팔린 것보다 이시형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주는 게 우선이었다.

- 네, 선생님. 안녕하세요.

통화가 연결되자 오진호가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나도 인사를 하고 오진호의 근황과 건강 상태를 물었다.

“진호 씨, 정말 죄송한데 제가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 생명의 은인이 부탁한다면 뭐든지 들어드려야죠.

“그게…….”

나는 심호흡하고 지금 처한 상황을 솔직하게 전했다.

오진호는 맞장구도 치지 않고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이용당한다는 느낌 때문에 불쾌했던 걸까. 오진호의 침묵이 나는 암묵적인 부정처럼 읽혀졌다.

- 살짝 긴장했는데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네요. 기획사에는 제가 잘 말해 놓을게요.

“정말이에요, 진호 씨? 진짜 고마워요.”

- 고맙기야 제가 고맙죠. 선생님 덕분에 아직까지 가수 생활도 잘하고 있는데.

오진호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부산에 계신다고 하셨죠? 제가 조만간 진료 보러 선생님께 갈게요. 그럼 선생님께 더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

오진호의 파격적인 선언에 나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했다.

오진호가 병원을 찾아 내게 진료를 받는다면 그 파급력은 무시무시할 것이다.

내가 작성한 에세이와 해외 수련 경력까지 다시 한번 조명을 받을 테고.

이시형에게 한 방 먹이고.

강태섭에게 내 가치를 증명하는 일은 생각보다 빨리 이루어질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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