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제4장 귀국 (3)
검은색 정장 바지에 하늘색 체크무늬 셔츠.
넥타이를 챙겨 매고 구두를 신은 후 나는 오피스텔을 빠져나왔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오전 6시.
쌀쌀한 아침 공기가 살갗을 스쳤다.
이른 시간이라 출근하는 직장인들도, 자동차들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평소와 다른 단정한 복장이 불편해 나는 셔츠 자락과 바지 자락을 몇 번 매만졌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외래 진료를 보는 어엿한 교수가 된 만큼 복장에 신경을 써야 했다.
안 그래도 나이가 어린데 복장마저 가벼우면 환자와 보호자들이 못 미더워할 수도 있었고.
전생의 나는 이 시기에 조교수가 아니었다.
심장 파트 펠로우를 마치고 외래 강사 비슷한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회귀를 한 지금은 무려 의국에 2인자 부교수가 되었다.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빌딩 사이로 보이는 병원 건물을 응시하며 나는 터벅터벅 걸었다.
부산에서 시작하는 의사 생활.
가장 큰 목표라면 당연하게도 전생의 원수 강태섭을 왕좌에서 끌어내리는 것이었다.
다만 반역을 위해선 힘이 필요한 법.
그래서 당분간 의국에 적응하고 동료 교수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내 의술을 증명하는 탐색전을 펼치지 않을까 싶었다.
흉부외과 병동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당직실부터 찾았다.
“참, 나 아니라고 하잖아. 나대지 말고 가만히 있어. 원래 수술하고 나면 다 그래.”
“그래도 이상해요. 윤상호 환자, 근래에 유독 힘들어하고 가래도 끓었어요.”
“내 말이 그 말이잖아. 수술 환자가 팔팔하면 그게 정상이니?”
미닫이 문 너머로 레지던트들의 격렬한 대화가 오고 갔다.
환자 진단을 두고 의견 다툼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내부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노크를 했다.
똑. 똑. 똑.
당직실로 들어갔더니 레지던트들이 부엉이처럼 휘둥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레지던트들의 눈동자는 ‘그쪽은 누구세요?’라고 묻고 있었다.
“반가워요. 오늘부로 새로 부임한 부교수 이믿음이라고 해요.”
“아… 새로 오신다는 교수님이셨구나.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나는 레지던트들과 통성명을 나눴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친구가 1년 차 최경훈.
갈매기 눈썹을 가진 친구가 2년 차 엄철우였다. 편한 대화를 위해 나는 반말을 제안했고 레지던트들은 받아들였다.
“컨퍼런스는 8시부터 시작인데 너무 일찍 오신 것 같습니다.”
“일부러 일찍 왔어. 너희들이랑 이야기 좀 하려고.”
“저희와 말씀이십니까?”
“그래, 의국에 얼굴은 누가 뭐래도 레지던트 아니겠니?”
나는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의국의 수준을 알고 싶으면 레지던트를 보아라. 스승 양 교수님이 남겼던 말씀이었다.
이어지는 대화 속에 질문은 대부분 내 차지였다.
부산 근무 첫날이라 모르는 정보도, 알고 싶은 정보도 많았으니까.
아직 겪어 보지는 않았으나 대화를 통해 파악한 의국은 의외로 양호해 보였다.
환자 관리도 잘되고 있고 레지던트 수련도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과장이 강태섭이니까, 당연한 건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피식 웃었다.
강태섭은 보통 악당들과는 궤가 달랐다.
노예로 삼은 스태프들을 마냥 혹독하게 수탈하지는 않았다.
노예를 통통하게 살찌워 노예의 힘과 체력을 키운 뒤 오래도록 써먹었다.
그 교묘한 수법 때문에 노예들은 스스로가 노예인 줄도 까맣게 몰랐고 말이다.
대화 중인 레지던트들이 여유로워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강태섭이 그들에게 먹이를 주는 단계이기 때문에 말이다.
“과장님이 특별히 친하게 지내고 있는 교수님이 있니?”
나는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알기론 이시형 부교수님과 사석에서 자주 뵙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두 분이 단둘이 계신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1년 차의 대답을 2년 차가 지원 사격했다.
증인이 두 명이므로 증언의 신빙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강태섭의 오른팔은 이시형일 확률이 높았다.
앞으로 자주 충돌할 이름 석 자를 나는 가슴에 새겼다.
출근 전 탐색전은 이쯤하면 충분하겠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화제를 돌렸다.
딱 하나 해결하지 못한 호기심이 남아 있었다.
“당직실 들어오기 전에 말이야. 너희 둘이 환자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던데. 무슨 일 있었니?”
“경훈이가 환자에게 너무 민감하길래 제가 주의를 줬습니다.”
“자세히 말해 볼래?”
“승모판막 치환술 받고 회복 중인 60세 남자 환자가 있는데요. 그 환자분이 너무 힘들어한다며 검사해 보자고 떼를 쓰는 겁니다.”
엄철우가 세상 답답하다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고령의 환자가 가슴을 여고 4시간이나 수술을 받았으면 힘든 게 당연하지 않냐고 덧붙였다.
하지만 듣고 있던 최경훈도 억울하다는 듯 맞받아쳤다.
“제가 보기엔 환자가 많이 아파 보였어요. 전에는 제가 회진 가면 웃어 주고 그러셨는데 요즘은 통 웃질 않으세요.”
“그러니까 수술을 받아서 그런 거라고.”
“그거랑은 느낌이 조금 달랐어요, 선배.”
“요즘 의사는 느낌으로 진료하니?”
두 사람은 아웅다웅 다투다가 이내 나를 쳐다보았다.
내게 솔로몬의 선택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기왕 일이 벌어진 김에 레지던트들의 환심을 사 볼까.
혼자 적진에 침투한 상황인 만큼 레지던트라도 내 편이 된다면 든든할 것 같았다.
“환자 차트 띄워 볼래?”
“네, 교수님.”
최경훈이 띄운 차트 중 나는 간호 기록지를 주목했다.
간호 기록지는 입원 환자의 일기나 다름없었다.
환자와 제일 많이 접촉하는 스태프는 사실 의사가 아닌 간호사이기 때문이다.
내가 간호 기록지를 살피는 동안 최경훈과 엄철우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둘 중 한 명의 진단은 반드시 옳고 나머지 한 명의 진단은 반드시 틀리게 될 테니까.
그리고 내가 손을 들어 주는 쪽이 승자가 되겠지.
간호 기록지를 확인한 나는 최경훈과 엄철우에게 차례대로 꿀밤을 먹였다.
콩!
콩!
“너희 둘 다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잘못했다.”
* * *
회의실에서 컨퍼런스 준비를 마치고 엄철우는 서둘러 당직실로 돌아왔다.
PACS(Picture Archiving and Communication System, 의료 영상 저장 전송 장치)를 통해 환자의 흉부 엑스레이 사진을 확인했다.
과연 이믿음의 말이 옳았다.
환자의 우측 폐에 폐렴으로 인한 하얀 음영이 발견된 것이다.
‘대박이네. 낙하산이 아니었던 건가?’
엄철우는 이믿음을 다시 보게 되었다.
사실 이믿음의 부교수 임명을 두고 의국 내에 안 좋은 소문들이 떠돌았다.
대부분 이믿음이 인맥발로 부교수가 됐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이믿음은 부교수가 되기에는 너무 어렸다.
조교수만 되어도 감지덕지할 시기에 무려 의국의 2인자인 부교수에 올랐으니까.
이믿음의 제임스 홉킨스 경력을 두고도 잡음이 많았다.
연수 프로그램이 형편없다고 하던데 시간만 때우고 온 것 아니냐.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싱글 포트 흉강경 수술의 개발은 운이 아니겠느냐 등등.
엄철우도 이믿음을 불신하는 쪽이었지만 오늘 사건으로 시선이 조금은 바뀌었다.
이믿음은 부교수임에도 거만하지 않고 정중했다.
환자를 보는 눈도 깊었다.
흉부 엑스레이를 촬영하기도 전에 환자의 폐렴 사실을 알아맞추는 신들린 진단력을 뽐냈다.
드르르륵.
당직실 문이 열리고 환자 엑스레이 촬영을 다녀온 최경훈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배, 흉부 엑스레이 어떻게 나왔어요?”
“폐렴이야. 지금 오더 넣고 있다.”
“그럼 제 말이 맞았던 거죠? 유후~”
“인마, 환자가 폐렴인 게 신날 일이냐?”
“환자가 폐렴이라서 신난 게 아니잖아요. 환자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돼서 신나는 거죠.”
엄철우의 타박을 최경훈은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 냈다.
하여간 저 쾌활한 성격은 감당 못하겠다니까.
“이 교수님 이야기, 그새 잊고 설치니? 너도 잘한 거 없다고 하셨잖아.”
엄철우는 오더를 넣으며 아까 전 이믿음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믿음은 먼저 최경훈의 잘못을 꼬집었었다.
- 경훈이 너는 너무 근거 없이 감에 의존해서 진단을 했어. 간호 기록지만 잘 살펴봐도 폐렴의 근거를 찾을 수 있었는데 그 근거들을 무시했지.
- …….
- 근거 없이 주장만 펼치면 선배가 네 말을 들어 주지 않는 것도 당연해.
그다음 차례는 엄철우였다.
- 철우 너는 부주의했어. 수술을 받은 환자가 아픈 건 당연해. 네 말이 맞아.
-…….
- 하지만 그 통증이 수술로 인한 것인지, 수술 후 감염이나 후유증으로 인한 것인지 꼼꼼하게 살폈어야 해.
-…….
- 둘 중에 책임을 따지자면 네 비중이 더 커.
이믿음은 설명을 마치고 엄철우에게만 꿀밤을 한 대 더 때렸다.
때리는 시늉만 한 것이라 아프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후배인 최경훈에게 한발 뒤처진 것 같아서.
“주의할게요, 선배. 앞으로 근거 있는 노티를 드릴게요.”
“그래, 말로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근데 선배, 이 교수님 너무 멋있지 않아요?”
최경훈이 흥분한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최경훈은 이믿음의 광팬이었다. 이믿음이 쓴 에세이를 읽고 흉부외과를 전공으로 선택했을 정도였다.
동경하던 사람을 직접 만나 들뜬 그 마음을 엄철우는 알 것도 같았다.
엄철우도 한때는 열렬하게 존경하던 교수님이 있었으니까.
그 사람의 어두운 실체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내 눈에도 멋있는 사람처럼 보이네. 적어도 아직까지는.”
* * *
오전 컨퍼런스는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강태섭의 부름을 받아 단상에 올라 자기소개를 할 때는 조금 쑥스러웠지만.
나를 향한 스태프들의 시선이 대체적으로 곱지는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었다. 내 능력이 해결해 줄 일이었다.
스태프들의 불신을 종식시키는 일은 분명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정말 어려운 일이라면 역시 강태섭의 왕국을 무너트리는 일이 될 것이다.
“이 교수, 잠깐 나 좀 봅시다.”
회진까지 끝난 후 부교수 이시형이 나를 회의실로 따로 불러냈다.
이시형은 역삼각형 형태의 뾰족한 얼굴을 지닌 중년 사내였는데, 나는 레지던트를 통해 그가 강태섭의 오른팔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이시형은 전자 담배를 입에 물었다.
허연 연기를 뱉어 냈다.
마피아나 건달을 흉내 내는 모양새가 꼴불견이었다.
“무례하시네요. 회의실에 담배를 피우는 것도, 제 의사를 묻지 않는 것도.”
“우리 의국에선 다 이렇게 해요. 이 교수가 적응해야 할 겁니다. 그나저나 담배 안 피워요?”
“네, 안 피웁니다.”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실 동료가 담배 피우는 일에 거부감은 없었다.
흉부외과에서 버티려면 어디든 기댈 곳이 필요한데 담배는 좋은 버팀목이었으니까.
문제는 이시형이 회의실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점.
연기를 내 쪽으로 뿜어낸다는 점이었다.
“독한 사람이네. 어쩐지 이 교수하고는 친해지기 힘들 것 같아.”
“피차일반입니다. 외래로 내려가야 하니 용건부터 말씀하시죠.”
“성질도 급하셔라. 내가 먼저 부교수로 있던 입장에서 몇 가지 충고를 해 주고 싶어서 말이에요.”
이시형이 차분하게 운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