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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242화 (242/257)
  • 242화 제4장 귀국 (2)

    차창 너머로 풍경이 휙휙 지나가고 있었다.

    탁 트인 시야와 푸르른 자연 경관에 눈이 즐거웠다. 모처럼 운전대를 잡지 않아 한가롭게 여행을 떠나는 기분도 들었다.

    나는 KTX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며칠 전 강태섭의 부름을 받았다.

    강태섭은 내가 신원 대학교 부산 분원에 합류했으면 좋겠다고 노골적으로 제안했다.

    전생과 마찬가지로 마수를 뻗은 것이다.

    강태섭의 시꺼먼 손을 나는 선선하게 잡았다.

    애초에 연락이 없었으면 내가 연락을 할 생각이었는데 마침 잘됐구나 하면서.

    강태섭은 전생 때부터 회귀한 지금까지 내 가슴속에 남은 응어리이자 찌꺼기였다.

    강태섭만 처리하고 나면 진짜 내 삶을 되찾을 수 있을 듯했다.

    어떻게 하면 강태섭을 물리칠 수 있을까.

    부산으로 내려가는 내내,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답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왜냐고?

    내가 회귀하면서 강태섭의 시간선도 180도 뒤틀려 버렸으니까.

    내가 알고 있는 강태섭의 비리는 다 그가 서울 본원에서 저지른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번 생의 강태섭은 서울에서 근무하지 않았다.

    즉 내가 알고 있던 부정부패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나는 전쟁에서 병장기를 잃어버린 병사처럼 황망했으나 금세 침착함을 되찾았다.

    본질은 변하지 않는 법.

    강태섭은 분명 부산에서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고 또 저지르고 있겠지.

    내 역할은 그 숨겨진 부정행위들을 파헤치는 일이 되리라.

    마치 형사나 탐정처럼.

    잡념에 빠져 있음에도 나는 스쳐 지나가는 산자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가을의 산자락, 울긋불긋 익어 가는 단풍잎이 아름다웠다.

    나 말고 다른 승객들도 꽤 많이 창밖의 풍경을 즐기고 있었다.

    강태섭을 응징하러 가는 길에 나는 마지막 호사를 최대한 음미했다.

    * * *

    신원 대학교 병원 부산 분원은 부산역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나는 캐리어를 끌고 도보로 이동했다.

    조금이라도 걸어서 부족한 운동량을 채우자는 심산이었다.

    낯선 도심을 좌우로 살펴 가며 걷다 보니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여기구나.’

    정문에 들어선 나는 주변을 훑으며 계속 걸었다.

    건물 외관이나 내부 인테리어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약간 구닥다리 같은 느낌도 들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지어진 지 워낙 오래됐으니까.

    빵! 빵! 빵!

    지하 주차장 진입로 쪽에서 자동차 클랙슨 소리가 요란하게 퍼지고 있었다.

    대여섯 대의 차가 주차장 앞에서 병목 현상을 일으켰다.

    대학 병원치고는 너무나 열악한 주차 환경, 차를 끌고 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나는 본관에 진입해 4층 흉부외과 병동을 찾았다.

    병동의 구조나 환경은 내가 경험해 온 다른 병동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차이가 하나 있었다면 사투리였다. 병동 복도를 가로지르던 도중 나는 나이 지긋한 중년 환자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걍, 마 치아라. 나는 이딴 거 안 묵는다.”

    “와? 무화과가 얼마나 달달하고 맛있는데.”

    “무딘 자슥아, 그 요상한 과일은 너나 많이 처묵으래이.”

    무화과를 먹네, 마네로 환자 두 명이 아웅다웅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아직은 사투리가 어색하게 들렸지만 환자를 진료하고 회진을 돌다 보면 금방 익숙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똑. 똑. 똑.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회의실에 입장하니 ‘一’자 테이블에 문제의 강태섭이 앉아 있었다.

    강태섭은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검색하고 있었는데 나를 발견하곤 노트북을 덮었다.

    “이 선생, 어서 와.”

    강태섭이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나를 맞았다.

    누가 보면 우리 둘의 친분이 돈독하다고 착각할 만큼.

    ‘드디어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왔구나.’

    나는 느슨했던 마음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며 강태섭의 맞은편에 앉았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어.”

    “아닙니다. 고생은 제가 아니라 KTX가 했죠.”

    “재밌는 말이군. 시장하지는 않고?”

    “열차 타기 전에 식사를 해서요. 부산 음식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먹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건 좀 아쉽네. 식사를 안 했으면 밀면이라도 같이 하려고 했는데. 근처에 밀면 맛집이 있거든.”

    아쉬워하는 강태섭을 지켜보며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강태섭은 중요한 이야기를 꼭 식사 자리에서 하는 버릇이 있었다.

    상대의 마음을 느슨하게 만든 뒤 본인 뜻대로 조종하려는 수작질이었다.

    단순하지만 꽤 타율이 좋은 수법이었다.

    이어지는 대화의 초점은 전적으로 내게 맞춰졌다.

    강태섭은 내가 제임스 홉킨스에서 이룩한 업적을 침이 마를 정도로 치켜세웠다.

    내 성을 딴 싱글 포트 흉강경 수술이 전 세계로 퍼지고 있어 뿌듯하다고도 했다.

    하지만 전형적인 립 서비스라서 딱히 기분이 좋진 않았다.

    나는 건성건성 대답하다가 화제를 돌렸다.

    강태섭과의 전쟁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그래서 근무 조건은 어떻게 맞춰 주실 겁니까?”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강태섭이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 선생, 생각보다 성미가 급하네?”

    “근무 조건을 빨리 매듭지어야 대화가 더 편해지지 않겠습니까? 저는 단지 과장님과 편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 껄끄럽긴 해도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긴 하지.”

    온순하던 강태섭의 눈동자가 한순간 날카로워졌다.

    “조교수, 연봉은 1억 1천만 원.”

    “과장님, 설마 진심으로 하신 말씀은 아니겠죠?”

    나는 어이가 없어 혀를 차며 되물었다.

    조건이 너무 박해서 나를 거저먹겠다는 심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심장 파트와 폐·식도 파트.

    흉부외과의 양대 파트 펠로우 과정을 밟은 흉부외과의는 대한민국에서 나밖에 없었다.

    러셀의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최근 개발한 신수술이 각광을 받고 있었고.

    그런데 내게 이따위 대접을 한다고?

    “이 선생에게는 정말 미안하게 됐어. 나도 이런 말을 하면서 얼마나 면목이 없는지 몰라.”

    강태섭이 고개를 숙이며 말을 계속했다.

    “흉부외과 교수 T.O.는 이미 가득 찼어. 없는 자리를 만들려다 보니 이 정도 제안밖에 할 수 없었단 말이지.”

    강태섭이 한참 동안 우는 소리를 했다.

    야속하지만 지금 한 제안이 최선이라고도 했다.

    “다만 내 이름을 걸고 한 가지만큼은 약속하겠네.”

    “그게 뭡니까?”

    “2년 뒤에 장동수 교수가 퇴직을 한단 말이지. 장 교수가 퇴직하면 그 자리에 반드시 이 선생을 앉히지. 이러면 자네 화도 풀리지 않겠나?”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근무 조건이 박해서 화가 나고 답답했다.

    자리를 박차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강태섭을 응징하려면 강태섭 곁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 어쩔 수 없이 저 거지 같은 조건을 수락해야 하나.

    반쯤 체념하던 나는 급하게 발상을 전환했다.

    “부교수, 연봉은 1억 3천만 원으로 하시죠.”

    “이 선생, 그건 너무 무리한 요구야. 내 입장도 생각해 줘야지.”

    “어차피 교수 T.O.는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기왕 없는 교수 T.O.를 만든다면 부교수 T.O.를 못 만들 이유가 있습니까?”

    “기존 근무 중인 교수들이 반발할 걸세. 자네라면 그 정도는 헤아릴 줄 알았는데.”

    “저는 그저 실력에 맞는 자리를 요구하는 것뿐입니다. 조건을 맞춰 주시지 못한다면 과장님과 더 할 말이 없습니다.”

    나는 당당하게 최후통첩을 날렸다.

    사실 이번 계약의 약자는 나였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부산에서 근무하며 강태섭에게 복수를 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말이다.

    그런 내 사정을 강태섭은 까맣게 몰랐다.

    즉 표면상으로는 이번 계약의 우위가 내게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부분을 무기 삼아 강하게 밀고 나갔다.

    암, 근무 시작부터 후려치기를 당할 수는 없지.

    강태섭의 말발에 홀라당 넘어가는 비극은 전생으로 충분했다.

    “과장님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제 입장도 살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본원이나 다른 병원은 저를 붙잡기 위해 어떤 조건을 내걸었을까요?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휴우.”

    내가 전방위로 압박하자 강태섭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일부러 들으라는 듯.

    “좋아, 내가 큰맘 먹고 진료부 원장님께 이야기를 드려 보겠네. 자네 같은 인재를 놓칠 수는 없지.”

    “감사합니다, 과장님.”

    “고맙기는 나야말로 고맙지. 이렇게라도 자네를 잡을 수 있어서.”

    강태섭과 근무 조건을 조정한 나는 곧바로 원무과로 이동했다.

    계약서에 사인하고 당장 내일부터 출근하기로 했다.

    미약하게나마 강태섭을 골탕 먹일 수 있어서 기뻤다.

    앞으로 강태섭의 간섭과 계략과 반격도 만만치 않겠지만 나는 이겨 낼 자신이 있었다.

    전생의 나와 이번 생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미리 봐 두었던 병원 근처 오피스텔과 계약하면서 나는 새로운 거처도 마련했다.

    오피스텔에 짐을 풀고 잠깐 여유 시간을 갖던 도중.

    어떤 유명 인사가 최고의 복수는 용서라고 말했던 것을 나는 문득 기억했다.

    하지만 용서는 성인들이나 현자들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강태섭을 철저하게 짓밟고 뭉개 버릴 것이다.

    * * *

    “이거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놈이었네.”

    회의실에 혼자 남은 강태섭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사실 이믿음과 계약을 낙관했던 그였다.

    이믿음이 누구던가.

    군의관 신분일 때도 총상 환자를 응급 수술 하고 동료의 3D 프린트 신수술을 도울 만큼 정에 약하고 정의감이 넘치는 친구였다.

    그런 이믿음이라면 당연히 계약을 후려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적당히 사연을 팔고.

    적당히 미래를 보장해 주면서 말이다.

    그런데 웬걸?

    막상 맞닥뜨린 이믿음은 당당하게 제 몫을 요구했다.

    심지어 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부산에서 일을 하지 않겠다며 은근히 협박도 했다.

    강태섭은 어쩔 수 없이 이믿음에게 굴복해야 했다.

    당장 기분은 상했지만 앞으로 이믿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치가 훨씬 컸기에.

    ‘봉급 이상으로 쭉쭉 빨아먹어 주마. 살점 하나,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강태섭은 이믿음을 떠올리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먹잇감을 발견했을 때 그가 의식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하는 버릇이었다.

    이믿음이 부교수로 부임하면 교수 간의 서열과 위계질서가 흔들릴 것이 뻔했기에 강태섭은 앞으로 어떻게 교통정리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교통정리를 하든 강태섭에게 피해가 갈 일은 없을 것이다.

    강태섭은 인간의 욕망을 읽고 이간질을 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다.

    그러니 아귀다툼은 온전히 교수들과 이믿음의 몫이 되리라.

    생각에 잠겼던 강태섭이 휴대폰을 들었다.

    서울 본원에서 근무 중인 후배 흉부외과의 김호열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통화가 연결되어 안부 인사를 하다가 중요한 용건을 꺼냈다.

    “호열아.”

    - 네, 선배.

    “얼마 전까지 너희 본원에 있던 이믿음 알지?”

    -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죠, 그 친구야 워낙 레지던트 때부터 유명했으니까요.

    “이믿음에 대해서 아는 게 있으면 다 말해 봐.”

    강태섭은 김호열을 통해 이믿음의 과거를 캤다.

    의국에 들여놓은 것이 개인지, 호랑이인지를 미리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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