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제3장 금의환향 (5)
지이이잉.
수술방을 빠져나온 나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갑자기 중력이 몇 배로 작용하는 것처럼 온몸이 무거웠다.
팔다리에 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집도의와 제1보조의.
혼자서 1인 2역을 맡아서 수술을 마쳤다는 뿌듯함 또한 찾아보기 힘들었다.
‘위험했어. 다음부터는 조심해야지.’
수술을 마치고 나서 나는 오히려 경계심이 생겼다.
한국에 복귀한다면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닌 이상, 오늘처럼 무리한 수술은 진행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이야 수술 건수가 적은 데다가 수술 간의 간격이 넓어서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은 달랐다.
오늘 같은 수술을 집도한 다음에도 곧장 다음 수술에 들어갈 위험이 존재했다.
그랬다면 천하의 나라도 피곤한 나머지 실수를 저지를 수밖에 없으리라.
곤충이 허물을 벗듯이 나는 수술모와 가운, 마스크 등을 벗었다.
땀에 젖은 수술 복장 등을 제거하고 나니 좀 살 것 같았다.
“리, 마지막까지 화려한데? 설마 혼자서 싱글 포트 수술을 완성할 줄은 몰랐어.”
뒤따라 나온 제이슨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수술은 세상에 없어. 너희들의 도움도 컸다고.”
나는 빈말이 아니라 진심을 담아 말했다.
영화나 드라마에는 주인공이 있을지언정 현실에는 주인공이 없었다.
모두가 자신의 인생에서 주인공인 법이었다.
“크으, 겸손하고 멋있어. 그래서 네가 떠난다는 사실이 더 아쉽고. 앤써니는 어떻게 할 거야?”
“좀 쉬었다가 달래 줘야지.”
“앤써니가 수술 중에 화내는 거 처음 봤어. 아마 쉽지는 않을 거야.”
“이번 수술만큼 어렵지는 않을걸?”
“그건 부정 못 하겠네.”
나는 제이슨과 잡담을 나누며 수술실을 나왔다.
보호자 대기실에 있던 보호자와도 짧게 이야기를 나눴다. 수술이 성공했다는 이야기였다.
보호자들은 고맙다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보호자들이 환자 걱정에 애간장을 태우는 것은 미국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세 시간 정도 후에 있을 심장 판막 수술까지 끝내면 제임스 홉킨스와는 정말 안녕이구나.
제이슨과 휴게실로 이동하면서 나는 병원의 풍경을 하나하나 가슴에 담았다.
연수 프로그램이 쓰레기였고
동료 중에 인종 차별주의자가 있어 고생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얻은 것이 많았다.
우선 양대 펠로우 과정(심장, 폐·식도)을 1년 6개월 만에 마쳤다.
전생에서 강태섭에게 빼앗겼던 싱글 포트 수술을 내 이름으로 발표했다.
월급으로 모아 놓은 금액 또한 꽤 컸고.
하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은 이다음부터였다.
복귀한 한국에서 의사 생활을 어떻게 할 것이냐.
누구와 어디서 함께 하느냐가 될 것이다.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휴게실이 목전일 무렵, 묵직한 저음이 등 뒤에서 나를 붙잡았다.
고개를 돌리니 고집이 세어 보이는 중년 사내가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통성명을 나누지 않았음에도 나는 사내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러셀 교수, 맞죠?”
* * *
본관 지하 1층 카페.
나는 러셀과 단둘이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러셀 교수는 머리가 벗겨진 중년 사내로 옆으로 길게 찢어진 매서운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신수술 킬러라는 별명이 외모 때문에 생긴 것 같기도 했다.
“혹시 제 수술이 성에 안 찼나요?”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나와 러셀의 교집합은 오늘 있었던 싱글 포트 흉강경 수술밖에 없었으니까.
“내 평가 이전에 자네의 평가를 듣고 싶군. 자네는 자네 수술을 어떻게 생각하지?”
“별난 질문이네요. 집도의인 제 소감을 먼저 묻다니.”
“소크라테스가 그랬어. 성찰하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고. 나는 이렇게 말하곤 하네. 성찰하지 않는 수술은 가치가 없다고.”
소크라테스의 명언을 들먹이는 러셀을 나는 괴짜라고 생각했다.
러셀은 내 대답을 기다리며 아인슈패너라는 괴상한 이름의 커피를 홀짝거렸다.
“솔직히 마음에 안 듭니다.”
“어떤 점에서?”
“핵심 스태프를 제 손으로 수술에서 배제시켰으니까요.”
“그 친구 수전증이 있던 것 같던데? 같이 있었으면 오히려 위험하지 않았을까?”
러셀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참관용 모니터로는 볼 수 없는 부분을 봤던 것이다.
러셀은 단순히 남의 수술을 깎아내리는 사람이 아니다. 본인 기준에 미달하는 수술을 냉정하게 지적하는 사람이다.
나는 러셀에게 가졌던 선입관을 일부 수정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친구를 잘 끌고 갔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스태프의 마음까지 헤아리는 게 집도의의 역할이니까요.”
“의외로 마음이 여리군.”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나오죠?”
“능력이 없으면 버려야 하는 거야. 사람이든 물건이든 마찬가지지.”
“과격한 발언이네요. 저는 동의 못 하겠습니다.”
“뭐, 굳이 이해해 달라고 하지는 않겠어. 남의 이해를 구할 만큼 난 빈곤하지 않거든.”
러셀이 한 손을 턱에 괸 채 말을 이었다.
본격적으로 싱글 포트 흉강경 수술에 대해 평가했다.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것과 달리 러셀의 평가는 호의적이었다.
일반적으로 2-3개씩 사용하는 포트를 단 하나로 줄인 과감한 발상.
그 발상을 녹여 낸 섬세한 수술 방식 등등.
극찬을 아끼지 않아 오히려 내 귓불이 뜨거워질 지경이었다.
“소문으로 듣던 바와는 딴판이네요. 칭찬에 인색한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끔찍한 오해군. 나라고 칭찬을 할 줄 모르겠나? 나는 그저 머저리 같은 수술을 개발해 놓고 칭찬을 바라는 놈들을 욕했던 것뿐이야.”
러셀은 곧바로 희소식을 전했다.
내 싱글 포트 흉강경 수술의 우수성을 논문으로 발표하고 본인이 근무하는 칼슨 대학교 병원의 주력 폐 절제술로 삼겠다고 했다.
문제는 그다음의 이야기였다.
“그럼 자네는 내게 뭘 해 줄 건가?”
러셀이 차갑게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 전부 대가를 바라고 하신 말씀입니까?”
나는 어이가 없어서 혀를 찼다.
어쩐지 일이 너무 술술 풀린다 싶더니…….
러셀에게는 내가 모르는 꿍꿍이가 있었다.
“물론. 내가 자네 수술에 감탄한 것과 자네 수술을 유행시키는 건 전혀 다른 영역이야. 설마 그 둘을 구분 못 하는 건 아니겠지?”
러셀이 내민 손을 잡느냐, 마느냐.
나는 짧은 순간 고민했다.
섣부른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먼저 간을 보는 게 좋겠다 싶었다.
“제게 뭘 원하죠? 혹시 물질적인 보상을 원한다면 방금까지의 이야기는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
“날 너무 과소평가하는군. 내가 도둑놈인 줄 아나?”
러셀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난 단지 자네와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하고 싶네. 자네의 연락처와 메일 주소만 있으면 돼.”
“저와 관계를 유지해서 러셀이 얻는 이득은 뭐죠?”
생각보다 시시한 요구 조건에 나는 경계 태세를 강화했다.
러셀은 아직 본인이 가진 패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았다.
“자네와 나. 일본의 아사다. 독일에 루카. 이 네 사람의 공통점이 뭔지 아나?”
“다 러셀 입에서 처음 듣는 사람들입니다. 공통점 따위는 몰라요.”
“우리 넷은 각자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는 흉부외과의들이지.”
러셀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원대한 포부를 밝혔다.
러셀은 지금까지 자신이 지켜본 최고의 흉부외과의들을 모아 최고의 수술 팀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머릿속으로만 구상해 둔 신수술을 완성하고 싶다고도 밝혔다.
러셀의 깐깐한 성격을 보면 나머지 두 사람에 대한 검증도 이미 끝난 것 같은데…….
나는 아사다와 루카의 실력.
그리고 또 러셀의 실력이 궁금해졌다.
나 같은 경우 회귀라는 기적을 통해서 말도 안 되는 실력을 손에 넣었다만…….
설마 나머지 세 사람도 회귀를 한 건가?
아니면 초능력이라도 가지고 있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말 그대로 천재?
“그럼 러셀은 제가 러셀의 팀에 합류하길 바라는 겁니까?”
“맞아, 긴 시간은 안 바라. 1년 정도면 될 거야. 시기가 명확해지면 그때 합류 시기를 알려 주지.”
말을 마친 러셀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묵묵하게 내 결정을 기다렸다.
“나쁘지 않은 거래네요. 받아들이겠습니다.”
나는 러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 * *
그날 저녁.
스태프들과 송별회를 마치고 나는 기숙사에서 짐을 꾸리고 있었다.
사실 짐이라고 부를 것도 없긴 했다. 입국할 때 챙겨 온 옷 몇 벌이 전부였으니까.
사실 제일 큰 짐은 내 몸뚱이였고.
떠날 채비를 마친 뒤 나는 창가에 서서 석양을 바라보았다.
3년 6개월,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면서 제임스 홉킨스에 나름 정이 들었던 모양이다.
출국한다는 사실이 마냥 기쁘지는 않았다.
내 가슴 속에는 아쉬움도 있었고 그리움도 있었고 추억도 있었다.
똑. 똑. 똑.
노크 소리에 들어오라고 말했다.
손님의 정체는 송별회 때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앤써니였다.
정규 수술 후 그토록 찾아다녀도 만날 수 없었던 앤써니였다.
“리, 시간 괜찮아?”
“물론이지. 어렸을 때 술래잡기를 잘했나 봐? 꽁꽁 숨어 있어서 찾지를 못하겠던데?”
내 농담에 앤써니가 피식거리며 창가로 다가왔다.
“마음을 정리하는 데 오래 걸렸어. 내가 못났다는 걸 인정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
앤써니는 오전 수술에 있었던 일을 먼저 사과했다.
나는 나야말로 실수를 했다며 사과했다. 서로 자기가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꼴이 우스워 우리는 금방 웃고 말았다.
그 웃음으로 해묵은 감정들은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수술 끝나고 러셀 만나 봤어. 네게 왜 트라우마가 생겼는지 알겠더라.”
나는 러셀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능력이 없으면 버려야 하는 거야. 사람이든 물건이든 마찬가지지.]
러셀이 카페에서 내게 한 말이었다.
이 말로 비추어 봤을 때 러셀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사람이었다.
앤써니처럼 여리고 감성적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에 딱 좋았다.
러셀을 만나 보고야 나는 앤써니가 왜 그렇게 수술에 집중할 수 없었는지를 깨달았다.
“다 내가 모자란 탓이지. 제이슨에게 듣기론 나 때문에 고생 많았다고 하던데…….”
“그걸 말이라고 해? 수석 어시스트가 빠졌는데 수술이 잘 돌아가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아쉽네. 만회하고 싶었는데 오늘이 네 마지막 근무일이라서.”
“그럼 한국으로 넘어와.”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어.”
우리는 창밖의 석양을 바라보며 계속 대화를 나눴다.
대화가 깊어질수록 우리의 얼굴은 오렌지 빛 석양을 더욱 닮아갔다.
“수술 끝나고 러셀이 따로 보자고 하지 않았어?”
“맞아, 그걸 어떻게 알았어?”
“내가 그 인간을 잘 알거든. 러셀은 잘나가는 의사들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 인간이야. 아마 너를 포섭하려고 안달이 났을 거야.”
앤써니는 내가 알지 못하는 러셀에 대해 알려 주었다.
지독한 성과주의자.
의사로서의 재능은 천부적이지만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형편없는 사이코패스 등등.
앤써니가 러셀에게 원한이 있다는 걸 사실을 알기에 적당히 걸러 듣긴 했지만 앤써니의 말에 나는 상당 부분 공감했다.
러셀은 정상인이 아니었다.
마음 어느 한쪽이 모나고 깨진 인간이었다.
“그러니까 너도 조심해. 그 악마에게 이용당하지 말고.”
“걱정 마. 내가 러셀을 이용하면 이용했지. 내가 러셀에게 이용당하는 일은 없어.”
나는 똑 부러지게 대답했다.
강태섭을 통해 악당들에 대한 면역력을 한껏 키운 나였다. 러셀에게 당하고 싶어도 당할 수가 없었다.
앤써니와 오해를 풀고 난 다음 날, 나는 후련하게 제임스 홉킨스를 떠날 수 있었다.
그리운 고국이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