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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237화 (237/257)

237화 제3장 금의환향 (2)

“많이 실망했겠지만 받아들여야 해, 리. 이게 현실이야.”

안드레가 위로하며 내 어깨를 건드렸다.

그 위로만큼은 고맙게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2년 7개월 동안의 인턴 생활은 결코 고맙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인턴 잡은 벌써 두 번이나 해 봤다.

전생에 한 번, 이번 생에 한 번.

세 번은 못 할 짓이었다.

“너, 포기한 눈빛이 아니구나.”

“맞아. 난 순순히 인턴 잡을 할 생각이 없어. 눈꼽만큼도.”

“그렇다고 사고 치면 안 돼. 오늘 준 규정집 봤어? 병원은 언제든지 연수를 취소할 권한이 있어.”

안드레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내가 삐뚤어져서 막 나갈 것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내가 칠 사고는 좋은 쪽의 사고였다.

제임스 홉킨스가 나를 수련시키지 않고는 못 배길 만한 그런 사고.

“넌 날 지켜보기만 하면 돼. 어쨌든 좋은 정보 고맙다.”

나는 안드레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기숙사로 복귀했다.

연수 프로그램의 실체를 깨닫고 나서 화도 나고 답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발상을 전환해 보니 오히려 도전 정신이 샘솟았다.

제임스 홉킨스 병원은 회귀와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장소였다.

즉 회귀라는 계급장을 따로 떼어 놓은 상태에서 내 처세술과 의료 솜씨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누가 이기나 한번 해 보자고.’

나는 창 너머에 있는 병원 본관을 야망에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 * *

안드레는 터덜터덜 기숙사로 복귀하는 중이었다.

리와 하루 종일 붙어 다니면서 잡무를 처리했더니 피곤하기 짝이 없었다.

머리가 무겁고 팔다리도 무거웠다. 침대에 누우면 10초 안에 잠들 자신이 있었다.

‘정말 괜찮으려나?’

피곤했음에도 안드레는 아직도 리가 걱정되었다.

연수 프로그램의 진실을 들려주었을 때 연수생의 반응은 보통 두 가지였다.

하나는 체념이요, 다른 하나는 자국으로의 도피였다.

대부분이 전자인 체념을 선택하고 병원에 남았다.

설령 인턴 잡을 하더라도 제임스 홉킨스 병원에서 근무를 했다는 건 훈장이었다.

자국으로 돌아가 자랑거리로 삼기에 충분했다.

반면 리의 판단은 다른 연수생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마치 제3의 길을 준비하고 있는 듯했다.

동양인 외과 의사 한 명이 제임스 홉킨스를 상대로 과연 무슨 일을 벌일 수 있을까 의심스럽긴 했지만.

“안드레, 오늘은 얼굴 보기 힘드네.”

“연수생 열심히 챙겨 줘 봐야 소용없다니까? 대충 안내만 해 주고 푹 쉬지.”

“안드레가 너네랑 같은 줄 아냐?”

안드레는 기숙사 앞에서 대학 동기 친구들을 마주쳤다. 친구들의 손에는 담배와 캔 맥주 따위가 들려 있었다.

그들 역시 오늘부로 해외 연수생을 각각 한 명 씩 담당하게 되었다.

“내가 맡은 일본인 친구는 엄청 고분고분하더라. 대답이라고는 ‘네’밖에 몰라.”

무리의 리더 격인 르브론이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그뿐인 줄 알아? 영어를 잘 못해서 똑같은 말을 몇 번이고 되물어. 그것도 엄청 미안해하면서.”

“의사소통이 안 되면 짜증 날 텐데…….”

“천만의 말씀. 차라리 잘됐지.”

친구의 지적에 르브론은 이렇게 말했다.

말이 안 통하면 오히려 연수생을 노예처럼 부려 먹기 편하다는 것이다.

항의다운 항의를 하려면 일단 의사소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적당히 상황 봐서 내 일까지 떠넘겨야지. 크크크.”

“르브론, 타지에서 온 사람들을 꼭 그렇게 이용해야겠니?”

안드레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르브론의 악행을 지적했다.

르브론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어떻게든 벗겨 먹으려고 들었다.

“뭐야? 너 지금 연수생 편 들어?”

“편 가르기를 하자는 게 아니야. 네 행동이 올바르지 못하니까 지적하는 거지.”

“꼬우면 자기들 나라로 돌아가라고 해. 우리 병원에서 걔네들 붙잡은 것도 아니고.”

“암, 그건 르브론 말이 맞지.”

“남의 나라에 왔으면 남의 나라의 법을 따라야 하는 법 아니겠어.”

다른 친구들마저 르브론의 잔인한 사고방식에 동의를 표시했다.

너희들 벌써 잊었어?

너희들이 저지른 잔인한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켰는지?

너희들은 양심도 없니?

안드레는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삼켰다. 르브론 패거리와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기숙사로 돌아온 안드레는 씻고 침대에 누웠다.

부디 리가 르브론과 엮이지 않길 기도하며 잠에 들었다.

* * *

하루가 지나고 대망의 연수 첫날.

안드레가 이야기해 준 것보다 연수 프로그램은 훨씬 형편없었다.

나는 한국에서 흉부외과 전공했던 것을 인정받아 흉부외과에 배치되었는데 대접이 개차반이었다.

ABGA 채혈, 심전도 검사, 드레싱(소독) 등등.

내게 주어진 업무는 인턴 잡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간호사들까지 나를 부려 먹으려고 들었다.

얼마 남지 않은 수액을 교체하라고 시키지를 않나.

환자의 바이탈 사인을 체크라고 하지 않나.

말만 연수생이지 처우는 노예와 다를 바 없었다.

현지 간호사와 레지던트를 황소처럼 들이받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일단 참았다.

나는 주어진 업무를 완벽하고 빠르게 해치우는 데 집중했다.

그것은 굴종이 아닌 인내였다.

내 목표는 현지 스태프들이 나를 의지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이 나를 꼭 필요한 존재라고 여기게끔 각인시키는 것이었다.

내가 소모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할 테니까.

기회는 의외로 일찍 찾아왔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병동으로 복귀했더니 레지던트 1년 차가 한 병실 앞에서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스태픈, 왜 그러고 서 있어?”

“흉관 삽관을 해야 하는데 자신이 없네. 선배들은 다 수술실에 들어갔고.”

스태픈이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볼을 긁적거렸다.

“내가 도와줄까?”

“리, 네가? 흉관 삽관 할 수 있어?”

흉관 삽관이 뭐냐, 당장 심장 이식 수술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을 나는 간신히 참았다.

“물론이지. 일단 맡겨 봐. 삽관 요령까지 알려 줄 수 있으니까.”

“네가 삽관에 실패하면 욕은 내가 먹을 텐데…….”

“그래도 내가 실패하는 게 나을걸? 그럼 스태픈은 선배들에게 내 탓을 할 수 있잖아? 리가 삽관할 수 있다고 해서 맡겼더니 처치가 엉망이 됐다고.”

나는 1살부터 숙성시킨 말빨로 스태픈을 구워삶았다.

스태픈은 당연하게도 홀딱 넘어갔다.

스태픈과 병실로 들어간 후 나는 단번에 흉관 삽관에 성공했다.

그러자 스태픈이 ‘리, 넌 정말 대단해’ 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흉관 삽관의 상세한 요령까지 알려 주며 스태픈을 내 편으로 만들었다.

“스태픈, 궁금한 게 있는데.”

“뭐든지 물어봐.”

“원래 연수생이 너스(Nurse. 간호사) 잡까지 맡아서 해? 제니퍼가 나한테 너스 잡까지 시키던데?”

“암묵적으로 시키기는 하는데 그게 옳은 건 아니지.”

“내가 너스 잡을 안 하면 네 업무를 더 도와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나는 두 번째 미끼를 던졌다.

스태픈을 통해 지긋지긋한 너스 잡을 끊어 버릴 계획이었다.

너스 잡만 해치워도 내 활동 반경은 훨씬 넓어질 테니까.

“으음… 내가 가서 말해 볼게. 따라 와.”

스태픈이 앞장서고 내가 그 뒤를 따랐다.

스태픈은 다른 간호사들이 보는 앞에서 제니퍼에게 면박을 주었다.

왜 내게 너스 잡까지 떠넘겼냐고 따져 물었다.

제니퍼는 관례라고 항변했지만 스태픈은 그런 관례는 없다고 못을 박았다.

“제니퍼, 리는 간호사로 연수를 온 게 아니야. 다시는 간호사 업무를 시키지 마. 알았어?”

스태픈의 지시에 제니퍼는 못내 억울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고.

모든 것이 계획대로였다.

* * *

스태픈을 시작으로 나는 현지 흉부외과 스태프들을 야금야금 집어삼켰다.

그들이 못 하는 업무와 처치를 나는 할 수 있었다. 그들이 내게 의지하게 되는 일은 어쩌면 필연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현지 스태프들은 무슨 일만 터졌다하면 리를 찾았다.

리가 없으면 병동도, 수술방도 돌아가지 않는다고도 했다.

차차 능력을 인정받고 나니 연수 생활은 의외로 편해졌다.

미국은 한국과 같은 계급 문화가 아니라 능력 문화였다.

능력이 있으면 우대를 받았다.

다른 나라 연수생들이 인턴 잡으로 헤매고 있을 때 나는 이미 인턴 잡을 졸업했다.

연수를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이룬 쾌거였다.

병원 생활에 적응하면서 남는 시간 동안 나는 USMLE(미국 의사 시험)을 준비했다.

USMLE를 취득해야만 진짜 의사가 될 수 있었다.

집도의로서 수술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USMLE이라고 해서 내 적수가 될 리 만무했다.

일단 의학 용어를 사용해서 언어의 장벽이 크지 않았으며 시험 문제가 한국에서 치른 것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나는 USMLE Step 1,2,3을 최단기간인 1년 만에 획득했다.

시험 성적은 물론 만점이었다.

면회를 획득하면서 나는 현지 스태프들과 동등한 위치까지 올라갔다.

나는 더 이상 평범한 연수생이 아니었다.

제임스 홉킨스 흉부외과의 어엿한 스태프가 되었다.

연수생 중에 의사 면허를 획득한 사람은 나뿐이었으므로 스태프들도 나를 더 각별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마침내 나를 자기들의 식구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단 한 명, 르브론이라는 고참 레지던트를 제외하고.

르브론은 오래 전부터 나를 사사건건 물고 늘어졌다. ‘동양인치고는 쓸 만하네’하고 인종 차별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딴에는 나를 열받게 하려고 그랬던 모양인데 나는 코웃음 치며 넘어갔다.

어리석기는…….

본인이 쌓은 업보가 어떻게 돌아올지도 모르고 나대는 꼴이라니…….

미국 의사 면호를 취득한 후 나는 르브론과 함께 심장 파트 펠로우 과정을 밟았다.

펠로우 과정을 밟는 사람이 우리 둘뿐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우리 둘은 서로 비교가 되었다.

압도적인 성취를 보인 건 당연히 내 쪽이었다.

나는 전생에 흉부외과 교수였고 심지어 회귀를 하면서 전생을 뛰어넘는 실력까지 갖추었다.

르브론 따위는 내 발끝에도 못 미쳤다.

하루는 자괴감에 빠진 르브론에게 내가 한마디 했다.

“너무 낙담하지 마. 너도 흑인치고는 꽤 쓸 만하니까.”

“너 이 자식, 방금 뭐라고 했어?”

르브론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지만 나는 겁먹지 않았다.

“왜? 네가 얕잡아보던 동양인에게 무시당하니까 못 견디겠니? 근데 어쩌나. 난 내가 당한 거에 10퍼센트도 아직 못 갚아 줬는데.”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 까짓건 눈 깜짝할 사이에 추월할 수 있어.”

“해 봐. 할 수 있으면.”

나는 르브론과 노골적으로 대립각을 세웠다. 인종 차별주의자와 하하 호호 웃으며 지낼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렇게 시간은 흘러 1년이 지났다.

나는 제임스 홉킨스로 날아올 때 품었던 청운의 꿈을 전부 이루었다.

심장 파트와 폐·식도의 펠로우 과정을 전부 마친 것이다.

한국이었다면 무려 4년이나 걸렸을 수련 과정을 4분의 1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

제임스 홉킨스 병원만이 가진 독특한 수련 제도.

패스트 트랙 덕분이었다.

물론 그때까지 르브론은 심장 파트 펠로우 과정을 마치지 못했고.

연수가 끝난 후 나는 취업 비자를 연장해 1년가량 더 제임스 홉킨스에 머물렀다.

이유는 간단했다.

전생에 강태섭에게 도둑맞았던 신수술.

흉강경 싱글 포트 수술을 미국에서 먼저 선보이고 싶어서였다.

신수술의 시연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내 명성은 한층 드높아졌다.

내 소식을 유명 언론 매체에 기사로 다룰 정도였다.

이제 남은 숙제는 한국으로 금의환향하는 것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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