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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232화 (232/257)
  • 232화 제2장 출국(2)

    손정남을 엿 먹인 그 길로 나는 과장 서인석을 찾았다.

    녹음 파일을 들려 주자 서인석의 표정이 악귀처럼 변했다.

    서인석이 그런 악독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어쨌거나 서인석의 역린을 건드렸으므로 손정남은 살아날 길이 없어 보였다.

    전개는 과연 내 예상대로면서 내 예상 밖이기도 했다.

    손정남에게 처벌이 내려진 일은 예상대로였지만 처벌의 수위가 강력한 것은 내 예상 밖이었다.

    “손정남, 이런 개새끼를 봤나. 너는 오늘부로 해고다. 앞으로 흉부외과 취직은 꿈도 꾸지 마.”

    “…….”

    “신원 대학교 계열 병원은 물론이요, 내 인맥을 동원해 네가 다른 대학 병원 흉부외과에 취직하는 것도 봉쇄해 버릴 테니까.”

    손정남 사건이 터지고 나흘째가 되던 오전 컨퍼런스 시간.

    서인석은 마녀가 저주를 걸 듯 악독한 말들을 내뱉었다.

    손정남은 별다른 저항도 없고 핑계도 없었고 변명도 없었다.

    컨퍼런스가 끝난 후.

    곤충이 허물을 벗는 것처럼 가운을 벗고 병동을 떠났을 뿐이었다.

    손정남이 병동을 순순히 떠난 이유 중 하나는 강태섭에 대한 믿음이 한몫했을 것이다.

    강 과장님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를 거둬 주시겠지.

    하지만 그것이 무지막지한 착각이라는 것을 나는 이미 경험으로 알았다.

    강태섭에게 사람은 소모품일 뿐이었다.

    쓰다가 용도를 다하면 버리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니 쓰레기통에 처박힌 손정남을 앞으로 강태섭이 찾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 조금만 더 기다려 봐. 내가 백방으로 손을 써보고 있으니까.

    아마 이런 식의 희망 고문만 받다가 흉부외과계를 은퇴하게 되겠지.

    “…….”

    터덜터덜 병동을 가로질러 떠나는 손정남을 나는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손정남을 향해 연민의 감정이 손톱만큼이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전생의 손정남은 꽤 괜찮은 선배였고.

    무엇보다 그가 나 대신 강태섭에게 당했다는 죄책감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넌 죄가 없어.’

    나는 죄책감으로부터 스스로를 변호했다.

    강태섭의 영향이 있었다고 해서 손정남이 면죄부를 손에 넣을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손정남이 레지던트를 착취한 것도.

    본인의 실적을 위해 일부러 수술을 피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 모든 악행은 결과적으로 손정님이 책임져야하는 것이었다.

    “손 교수가 잘못한 건 맞는데 그래도 처벌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그러게, 너무 가혹하지. 면전에서 욕까지 해 버렸으니.”

    “우리도 나중에 저렇게 쫓겨나는 건 아닌지 몰라.”

    한편 교수급 스태프들 사이에서는 서인석의 처벌이 과하다는 여론이 퍼져 나갔다.

    대놓고 말은 못 했지만 내심 서인석에게 불만도 있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서인석의 결정을 존중하고 환영했다.

    손정남은 이미 악에 물들어 버렸다.

    검게 물든 종이를 흰색으로 되돌릴 방법이 없는 것처럼, 손정남을 전생의 손정남으로 되돌릴 방법 또한 없었다.

    그렇다면 손정남을 도려 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외과의사가 절제를 하듯이.

    ‘나라도 손을 써야 해.’

    서인석을 향한 여론이 좋지 않음을 깨달은 후 나는 적극적으로 서인석을 옹호하고 다녔다.

    서인석은 전생의 내 멘토였고.

    지금도 내가 존경하는 대선배님이고.

    본원 흉부외과를 정의롭게 이끌 수 있는 몇 안 되는 주춧돌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수술실이나 휴게실에서 교수들을 마주칠 때마다 나는 교수들에게 손정남의 악행을 고발했다.

    녹음 파일까지 손수 들려 주었다.

    “와, 이거 완전히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였구먼.”

    “그 논문들이 다 레지던트를 쥐어짜서 나왔었단 말이지? 어쩐지 태우 그 녀석, 어시스트를 할 때마다 눈이 썩은 동태 눈깔이다 싶긴 했는데.”

    “과장님이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변호사를 자처한 덕분이었을까. 교수들은 서인석을 향한 존경심을 되찾았다.

    교수들이 서인석의 결정을 과하다고 여긴 가장 큰 이유.

    그것은 의외로 서인석 본인에게 있었다.

    서인석은 녹음 파일을 교수들에게 들려 주지도 않았다.

    손정남이 레지던트들을 착취해 왔다는 사실도 밝히지 않았다.

    그저 손정남이 본인의 실적을 위해 수술을 거부했다는 이야기 정도만 전했다.

    아마 교수들까지 분개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리라.

    이번 일로 속을 썩는 건 자기 혼자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리라.

    그런 서인석의 마음을 나는 섬세하다고 생각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답답하다고도 생각했다.

    타인을 배려하는 섬세함이 오히려 서인석 본인의 평판을 깎아 먹고 있었으니까.

    교수들로부터 서인석에게 무죄 판결을 받아 냈던 날.

    나는 서인석을 찾아가 돌직구를 던졌다.

    “과장님, 앞으로 의국에 문제가 생기면 다른 교수들과 속 시원하게 대화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니?”

    “교수님 모르는 사이에 이런 말들이 떠돌았습니다.”

    나는 교수들 사이에서 형성되었던 서인석의 안 좋은 여론들을 전했고 그것들을 내가 바로 잡았다는 사실까지 전했다.

    서인석은 이 이야기를 처음 듣는다는 눈치였다.

    퍽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본인이 정의로운 행동을 하면 세상과 주변 사람이 본인의 정의를 알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

    서인석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순진하고 순수한 사람이었다.

    “허허, 하마터면 내가 공공의 적이 될 뻔했구나.”

    “네, 과장님이 아무리 선의를 가졌다고 해도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도 몰라줍니다. 그러니까 주변에 자주 표현을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내가 다른 사람의 고통까지 안고 가는 게 멋있다고 생각해 왔단다.”

    서인석이 추억에 젖은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우리 아버님이 대표적이었지. 막 일을 하면서 자식을 키우는 와중에 힘든 내색 한번 안 하셨으니까.”

    “과장님은 아버님을 닮으셨던 거군요.”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구나. 아버지를 존경하지만 아버지처럼 무뚝뚝한 사람은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서인석은 말을 중간에 끊고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서인석이 본인의 경험을 성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나도 침묵을 지켰다.

    ‘지금보다 더 단단해지셔야 합니다, 과장님.’

    나는 속으로 서인석을 응원했다.

    지금이야 본원에 있지만 해외 연수를 마친 나는 반드시 부산으로 가야했다.

    강태섭이 부산에 있었으니까.

    강태섭을 왕좌에서 끌어내려야만 나는 전생을 벗어나 진정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해묵은 과업을 끝내기 전까지 본원 흉부외과를 지탱해 줄 사람은 서인석뿐이었다.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으로는 쉽지 않구나.”

    한참 만에 말을 하는 서인석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떤 점에서 말씀이십니까?”

    “내 속내를 이야기하면 괜히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나눠 주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

    “…….”

    “행복이야 나눌수록 좋다지만 고충이나 고민은 그렇지 않으니까.”

    서인석은 여전히 마음씨가 여렸다.

    하지만 그 여린 마음씨가 환자를 살필 때는 큰 장점이 되어도 교수들과 레지던트들을 다룰 때는 큰 단점이 되었다.

    이번 손정남 사건이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이대로는 안 되는데.’

    나는 서인석의 사고를 전환시킬 방법을 치열하게 고민했다.

    지인에게 고충이나 고민을 토로하는 일이 결코 나쁘지 않다는 근거를 찾아야 했다.

    그래야만 서인석이 변할 수 있었다.

    그래야만 제2의 손정남 사건이 반복되지 않고.

    그래야만 서인석이 혼자 욕먹는 상황도 피할 수 있었다.

    짧지만 깊은 고민 끝에 나는 1살 때부터 수련한 말빨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과장님, 사람들이 보통 자신의 고민이나 고충, 약점을 누구한테 털어놓을까요?”

    “아마도 가족이나 믿을 만한 지인이겠지.”

    “바로 그겁니다. 과장님이 요즘 힘드셨던 일을 제게 털어놓았다고 가정해 볼게요.”

    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럼 저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과장님이 나를 믿어 주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라 여기고 있구나 하고 말이죠.”

    “으음… 그런 생각은 꿈에도 못 해 봤는걸?”

    턱을 쓸어내리는 서인석.

    나는 기세를 몰아붙였다.

    속내와 고충을 털어놓는 것이 꼭 동료에게 마음의 짐을 떠넘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동료에게 신뢰를 줄 수 있다.

    동료와의 거리를 좁히며 자신의 답답함까지 해소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강조했다.

    성심성의껏 주장을 펼치고 나니 목이 마르고 입술이 메말랐다.

    나는 테이블에 놓인 물을 한잔 마시고 서인석의 대답을 기다렸다.

    “믿음아.”

    “네, 과장님.”

    “예전부터 느꼈지만 넌 여러 면에서 예사롭지 않구나. 외과의로서의 재능을 물론이고 사람들의 마음까지 꿰뚫어 볼 줄 아니까 말이야.”

    서인석의 목소리에 감탄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유별나게 잘났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회귀를 했기 때문에.

    전생의 저질렀던 바보 같은 실수들을 냉정하게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에 남들보다 앞서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기적처럼 얻은 특권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을 뿐이었다.

    “아닙니다. 저야 과장님을 쫓아가려면 아직도 멀었죠.”

    “원, 녀석도.”

    서인석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믿음이, 네게 처음 말하는 건데 말이다. 요새 내가 손목이 좀 좋지 않구나.”

    “저는 까맣게 몰랐습니다.”

    나는 놀라서 눈을 깜빡거렸다.

    “흉강경 폐 절제술을 전담하다 보니 손목에 무리가 간 모양이야. 그래서 당분간 수술 건수를 줄이고 싶은데 네가 내 수술을 몇 건 맡아 주겠니?”

    “물론입니다.”

    서인석의 부탁에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서인석이 내 조언을 곧바로 써 먹었기 때문이다.

    서인석이 교수들에게 기대고.

    교수들이 서인석에게 기대는 선순환을 나는 벌써 본 것도 같았다.

    사람인(人)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기댄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하던데…….

    앞으로 사람 냄새 나는 의국을 기대해 봐도 좋으리라.

    서인석과의 대화를 흡족하게 마치고 나는 병동으로 복귀했다.

    다음 수술 스케줄은 한 시간 뒤에나 있었다.

    * * *

    서인석은 서서히 그리고 확실히 변해 갔다.

    시간을 따로 내서 교수들과 개별 면담을 가지기도 하고.

    정규 스케줄이 끝난 후 스태프들을 모아 회식을 갖기도 했다.

    손정남이 떠난 후 의국은 더욱 단단해지고 있었다.

    내가 수술한 환자들의 경과 역시 훌륭했다.

    래퍼 오진호와 다운 증후군을 앓는 강희망은 닷새 만에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복귀했다.

    폐렴에 걸린다거나, 수술 부위에 출혈이 생긴다거나, 원내 감염에 시달린다거나 등등.

    우여곡절 없이 무사하고 건강하게 회복 중이었다.

    한편 출판사 담당자에게 오진호의 수술 성공 소식을 전했을 때 담당자는 마치 제 일처럼 기뻐했다.

    에세이 출간 일을 최대한 앞당기겠다고 했다.

    오진호 특수를 누릴 수 있는 만큼 누리자는 것이었다.

    통화를 마치고 보름이 지난 후.

    에세이는 전국 서점에 퍼져 나갔다.

    <당신의 심장이 뛰는 거리, 25억 킬로미터>

    인간의 수명을 70세로 계산했을 때 심장이 평생 펌핑하는 혈액량을 미터로 환산해서 지은 제목이었다.

    에세이를 향한 세간의 관심이 어땠냐고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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