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231화 (231/257)
  • 231화 제2장 출국 (1)

    당황한 손정남을 지켜보며 나는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하나의 감정은 통쾌함이었다.

    환자를 사지로 내밀고 나와 황은우를 위기로 빠트린 손정남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반대로 그가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손정남에게 크게 한 방 먹여 줄 수 있어서 속이 시원했다.

    또 하나의 감정은 통쾌함과는 정반대 편에 있는 안타까움이었다.

    전생의 손정남은 여린 마음의 소유자였다.

    환자와 보호자를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주변 스태프까지 잘 챙겼다.

    그랬던 손정남은 도대체 왜 분리수거도 안 되는 쓰레기로 타락했을까.

    “왜요? 내 휴대폰만 없애 버리면 다 해결될 것 같아요?”

    나는 손정남이 내 휴대폰을 향해 손을 뻗으려고 하는 낌새를 눈치채고 빈정거렸다.

    그러자 속내를 들킨 손정남이 슬며시 내게 뻗던 손을 거두었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잘 익은 사과보다 더 빨개져 있었다.

    “머리가 안 돌아가는 걸 보니 급하긴 급했나 보네요? 이 대화를 녹음한 건 제가 아니라 황 선배예요.”

    “…….”

    “그러니까 제 휴대폰을 제거한다고 해도 황 선배에게 원본 파일이 남아 있죠.”

    “믿음아, 내가 진심으로 뉘우칠 테니까 그 파일은 없애 주면 안 되겠니?”

    손정남이 내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오전에는 잠깐 자기 정신이 아니었다.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최악의 판단을 내리고 말았다.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약속할 테니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했다.

    나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지하 1층 카페에서 좀 더 이야기를 나눠 보자고 제안했다.

    손정남을 처벌하기에 앞서서 손정남이 악마로 변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 이유를 알아야 다음에도 같은 패턴의 비극이 벌어지는 걸 막을 수 있을 테니까.

    카페로 향하는 동안, 나와 손정남은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우리의 관계는 이미 산산조각 났으며, 우리의 관계는 이미 은하계만큼 멀어졌다.

    우리는 남보다 못한 사이였다.

    냉랭한 분위기 속에 도착한 카페는 환자와 보호자, 스태프들, 외부인들로 붐볐다.

    커피 원두 냄새는 고소했으며 손님들의 대화는 생기가 넘쳤다. 병동에서 비실거리던 환자들도 카페만 오면 활기를 띠었다.

    우리는 커피를 주문하고 하나 남은 창가 자리를 차지했다.

    먼저 운을 뗀 사람은 목마른 손정남이었다.

    “그래, 뭐가 궁금하니? 뭐든지 다 물어봐.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다 말해 줄 테니까.”

    “선배, 왜 이렇게 변하셨어요? 제가 병동에 있을 때는 이러지 않았잖아요.”

    “내가 왜 변했냐고?”

    손정남이 피식 웃었다.

    한쪽 입꼬리만 말려 올라간 탓에 웃음이 비틀려 있었다. 그의 비틀린 인생처럼.

    “펠로우를 마치고 어떻게든 교수로 살아남아야 했어. 흉부외과는 교수가 못 되면 끝장이니까. 떠돌이가 되어 버리니까.”

    손정남은 흉부외과의로 살아남기 위해 악독해졌다고 대답했다.

    말투와 눈빛을 보면 진심인 것 같기는 한데 어쩐지 나는 중요한 핵심이 빠진 기분이 들었다.

    단팥 빠진 단팥빵을 먹는 기분이 들었다.

    펠로우의 불안정한 처우와 환경을 불안해했던 건 전생의 손정남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현생의 손정남처럼 전생의 손정남도 타락했어야 이치에 맞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 시점은 언제죠?

    나는 본격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손정남 타락에 관련된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지금부터는 내 역량이 중요했다.

    “아마 펠로우 2년 차쯤이었을 거야.”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나요?”

    “잠깐, 이믿음. 너, 나 데리고 탐정 놀이 하냐?”

    질문이 거듭되자 손정남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은 죄가 있어서 대놓고 화도 못 내는 눈치였다.

    “내 성격이 변한 게 그렇게 중요해?”

    “저는 중요하니까 대답해 주세요. 말할 수 있는 건 다 말해 준다고 했던 건 선배입니다.”

    “알았다.”

    손정남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손정남이 독한 마음을 먹기 시작한 건 어떤 인물을 만나면서부터라고 했다.

    그 인물은 손정남의 물렁물렁한 성격을 지적했다.

    그 성격으로는 경쟁에서 밀려 교수 자리는 오르지 못할 나무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드디어 범인을 찾았다는 생각에 나는 조금 흥분했다.

    그러면 그렇지.

    누군가 바람을 넣지 않고서야 손정남이 이 지경까지 사악해질 리가 없지.

    “그 사람이 누구죠?”

    “강태섭이라고 부산 분원 흉부외과 과장님.”

    쓸개 대신 되뇌며 복수를 다짐했던 인물.

    설마 강태섭이 손정남의 배후에 있을 줄이야. 충격을 받은 나는 잠시 말문을 잃었다.

    “뭐야? 너 강 과장님 알아?”

    “네, 아~주 잘 알죠. 세상 그 누구보다.”

    “이상하네? 네가 강 과장님을 볼 일은 없었을 것 같은데?”

    나와 강태섭의 연관 고리를 찾지 못한 손정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목이 마른지 커피를 길게 한 모금 마셨다.

    그런 손정남을 나는 묵묵히 쳐다보았다.

    순간 손정남의 얼굴 위로 전생의 내 얼굴이 겹쳐졌다.

    나는 전생에서, 손정남은 이번 생에서 강태섭의 희생양이었다.

    * * *

    ‘잘하면 빠져나갈 구멍이 있겠는데?’

    손정남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은 사실인 듯했다.

    녹음 파일을 들었을 때만 해도 손정남은 자신의 커리어가 박살 났다고 생각했다.

    저 파일이 과장의 귀에 들어가면 손정남은 죽은 목숨이었다.

    환자 바보인 서인석 과장 아닌가.

    그런 과장이 환자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손정남을 용서할 리 없으니까.

    그런데 웬걸?

    이믿음의 태도가 의외로 미지근했다.

    과장에게 곧장 보고하러 가는 대신 자신과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손정남의 성격이 변한 이유도 들어 보고 싶다고 했다.

    피치 못할 사연이 있으면 이번 일은 눈감아 줄게.

    …라고 해석할 만한 여지를 충분하게 남긴 것이다.

    손정남은 한 줄기 희망을 발견하고 지금까지 이믿음이 보여 주었던 행동들을 낱낱이 분석했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해법을 찾아냈다.

    이믿음은 강태섭 과장에게 큰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성격이 변한 이유를 전부 강태섭 탓으로 돌리면 될 것 같았다.

    거기에 적당한 감성 팔이를 곁들인다면 금상첨화.

    ‘이번 일만 순조롭게 넘어가면 내 손으로 직접 널 뭉개 주마. 이믿음, 오늘의 치욕은 열 배로 갚아 주겠어.’

    손정남은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겉으로는 세상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복수는 먼 훗날의 일.

    당장은 눈앞의 위기를 모면하는 일이 최우선이었다.

    “그 나약한 성격으로는 절대 교수가 못 된다는 이야기를 강 과장님에게 들으니까 마음이 조급해졌어.”

    “…….”

    “그래서 다시 물었지. 성격이 어떻게 바뀌어야 교수가 될 수 있냐고.”

    “…….”

    “강 과장님은 아랫사람을 부려 먹으라고 했어. 다들 그렇게 교수가 되는 거라고 했지.”

    손정남은 차분하게 강태섭에게 화살을 돌렸다.

    ‘나를 못된 인간으로 만든 건 강태섭이야’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손정남이 사연을 풀어놓는 동안.

    이믿음은 아무런 대답도, 맞장구도 없었다.

    표정조차 없어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너무 강태섭 탓만 했나?

    슬슬 뉘우치는 기색도 보여 줘야겠지?

    “아니다. 생각해 보면 다 핑계고 변명이지. 강 과장님 말에 홀라당 넘어간 내 잘못이 제일 커. 내가 죄인이야.”

    손정남은 일부러 고개를 푹 숙였다.

    이믿음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으나 손정남은 그 침묵을 긍정의 신호로 읽었다.

    - 까불고 있는 건 당신이야. 당신은 외과의 할 자격 없어. 가운하고 면허 반납하고 병원에서 껴져 버려.

    - 당신은 당신의 잘난 성과 때문에 환자를 죽음으로 몰았잖아. 당신은 의사의 가운을 걸친 악마일 뿐이야.

    불과 30분 전 이믿음이 손정남에게 날렸던 독설들이었다.

    손정남의 사연이 효과가 없었다면 이믿음은 분명 아까처럼 독설을 내뱉었을 것이다.

    독설이 날아오지 않는다는 건 분명 이믿음에게 심경 변화가 있다는 뜻이리라.

    ‘이믿음, 인정에 약한 건 여전하구나. 넌 그래서 안 돼. 상대를 밟을 땐 철저하게 밟아야 한다고.’

    손정남은 이믿음을 비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음에도 없는 죄책감을 간신히 쥐어짜며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차마 용서해 달라는 부탁은 안 할게. 대신 내 잘못을 속죄하고 회개할 기회를 줘. 너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하… 진짜 곤란하게 만드시네요.”

    이믿음이 모처럼 입을 열고 커피를 길게 빨아 당겼다.

    한 모금 만에 무려 아이스 커피의 절반이 사라졌다. 그만큼 속이 탄다는 증거였다.

    손정남은 자신이 바라던 고지가 코앞에 왔음을 직감했다.

    “부탁이다. 믿음아, 제발.”

    “좋아요. 그럼 선배 말대로 속죄하고 반성할 기회를 드릴게요.”

    “정말?

    “네, 지금 바로 과장님께 가서 녹음 파일 들려드린다고요.”

    이믿음이 얄밉게 웃으며 말했다.

    순간 손정남은 무언가가 단단히 잘못됐음을 느꼈다. 이건 결단코 손정남이 바라던 그림이 아니었다.

    갑자기 손발이 차가워지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지? 분명 기회를 준다고 했잖아!”

    “에이, 순진하게 왜 그러세요? 반성하고 속죄는 처벌로 이뤄지잖아요.”

    “그… 그게 무슨 뜻인데?”

    “범죄자들을 감옥에 보내는 건 반성하라고 보내는 겁니다. 선배도 분원으로 쫓겨나거나 그에 상응하는 조치가 있어야 진심으로 반성하지 않을까요?”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이번 일을 없던 걸로 하고 넘어가자는 거였어.”

    손정남은 다급하게 해명했다.

    아무래도 이믿음이 자신의 의도를 심각하게 오해한 것 같았다.

    “이번 일, 너랑 은우만 입 닫으면 조용히 넘어갈 수 있잖아. 난 그걸 바랐다고.”

    “슬슬 본색을 드러내시는군.”

    점잖게 대화하던 이믿음이 아까처럼 반말하는 어투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돌이킬 수 없는 악몽이 시작되었음을 손정남은 직감했다.

    “손 선배, 정말 아쉬웠어. 사실 나도 당신에게 깜빡 속을 뻔했거든. 그런데 막판에 방심을 해 버렸지 뭐야?”

    “…….”

    “내가 과장님에게 녹음 파일을 들려 주겠다고 했을 때 말이야. 당신이 순순히 그러라고 했으면 난 기회를 줬을 거야.”

    이어지는 이믿음의 설명은 이랬다.

    손정남이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쳤다면 테이프 공개를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잘못을 뉘우친다는 것은 처벌을 달게 받겠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손정남은 테이프 공개를 두려워했다.

    그 말인 손정남은 즉 잘못을 제대로 뉘우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얼렁뚱땅 이번 상황만 넘어가겠다는 뜻이었다.

    “어때? 내 말이 틀려?”

    “너… 끝까지 나를 시험하고 있었구나.”

    손정남은 허탈하게 웃었다.

    이믿음이 자신의 함정에 걸렸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자신이 이믿음의 함정에 걸린 것이었다.

    이런 요물 같은 놈을 봤나.

    “당연하지. 환자를 내팽개친 당신 말을 내가 곧이곧대로 다 믿을 줄 알았어?”

    이믿음이 코웃음을 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은 커피를 다 들이켜고 얼음까지 와드득 씹어 먹었다.

    손정남은 이믿음에게 씹히고 있는 얼음이 꼭 자신의 처지와 똑같다고 느꼈다.

    “만나서 불쾌했고 다시는 보지 말죠, 우리.”

    이믿음이 떠나고 손정남만 혼자 카페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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