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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230화 (230/257)

230화 제1장 충돌 (5)

보호자와 상담을 마치고 나는 복도 끝 휴게실을 찾았다.

휴게실에는 먼저 온 황은우밖에 없었다. 웬일로 소파가 텅텅 비어 있었다.

식탁에는 황은우가 사 놓은 것으로 보이는 컵라면과 간식들이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

먹을 것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잊었던 식욕이 되살아났다. 위액으로 속도 쓰려 왔다.

오진호 수술이 1시간 30분.

복부 대동맥 파열 환자 수술에 4시간.

총 5시간 30분 동안 음식은커녕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

기력이 떨어진 나는 황은우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쿠션감을 잃은 소파가 딱딱했다.

“보호자에게 폭행 사실 알려 주고 왔어?”

“네, 아내 쪽은 아니고 남편 쪽이었어요.”

“확실해? 양쪽 이야기 다 들어 봐야 하는 거 아니야? 난 겉만 봐선 잘 모르겠던데.”

황은우가 내 선택에 의문을 제기했다.

나는 방금 전까지 보호자와 나눈 대화를 들려 주었다.

여자 보호자의 이름은 윤정희.

남자 보호자의 이름은 최민협.

윤정희는 환자의 친모지만 최민협은 의붓아버지, 쉽게 말해서 계부였다.

다만 두 사람은 진짜 결혼한 것은 아니고 사실혼 관계로 3년 가까이 동거를 하고 있다고 했다.

- 그이가 술을 마시면 말과 행동이 거칠어진다는 건 알았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희망이를 때릴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윤정희가 흐느껴 울며 내게 전한 사실이었다.

술주정뱅이가 홧김에 장애를 가진 의붓아들을 폭행하는 일은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뉴스에도 단골손님처럼 나오는 사건이었다.

너무 익숙해서 짧게 다루거나.

아니면 자막으로 처리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아예 다루지도 않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말이다.

같은 사건이라도 뉴스에서 대충 흘려듣는 것과 관계자가 되어 병원에서 사건을 경험하는 것은 차원이 틀렸다.

나는 생사를 오고 갔던 환자를 직접 수술하고 어머니의 눈물까지 목격했다.

느끼는 감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환자와 보호자를 향한 연민과 안타까움.

또 비정한 의붓아버지를 향한 분노와 적개심 등등.

내 마음은 다양한 감정들로 들끓고 있었다.

“너도 징하다, 진짜. 수술이 끝나서 피곤했을 텐데… 폭행한 사람이 누구인지까지 관찰하고 있었던 거야?”

“마침표는 확실히 찍어야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나와 황은우가 먹을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받은 후 자리로 돌아왔다.

“보호자는 앞으로 어떻게 하겠대?”

“남편이 담배 피우고 돌아오면 추궁하고 이혼도 하겠대요. 아동 학대 신고는 제가 하기로 했어요.”

“당분간 몸 좀 사려야겠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나는 따뜻해진 컵라면 용기를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의료인은 아동 학대가 의심되면 112에 신고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신고를 꺼려 하는 의료인도 더러 존재했다.

괜히 신고를 했다가 멀쩡한 집안에 소란을 끼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신고가 껄끄러운 이유는 보호자의 보복 때문이었다.

‘네가 뭔데 남의 집 일에 간섭이야’ 하며 병원을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보호자가 꽤 있었다.

그들은 제 자식을 때린 것처럼 병원 스태프들도 때리려고 했다.

인간 말종이 아닐 수 없었다.

후루룩. 후루룩.

대화가 잠시 끊기고 면 넘어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퍼졌다.

나와 황은우는 대화를 잊은 채 배를 채우기 바빴다.

라면을 다 먹고 샌드위치를 베어 물고 삼각 김밥까지 먹어 치웠다.

레지던트 때 하던 짓을 전문의와 펠로우가 돼서도 똑같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음식 맛이 쓰게 느껴졌다.

“야, 너 국물 남겼냐? 라면에 대한 예의가 없네.”

먼저 식사를 마친 황은우가 국물이 절반 넘게 남은 내 컵라면을 지적했다.

“저거 다 마시면 짜고 목말라요.”

“아무리 그래도 라면은 국물이 엑기스지. 줘 봐.”

황은우는 기어이 내 컵라면 국물까지 원샷했다.

저러면 분명 하루 종일 물을 달고 살아야 할 건데…….

식사를 마치자 배가 부르고 나른했다.

나와 황은우는 크룩스를 벗고 2인용 소파를 각자 하나씩 차지했다.

소파에 드러누운 것이었다.

페이 닥터인 나는 다음 수술 스케줄이 없었고 황은우의 수술은 1시간 뒤에 있었다.

그동안 고생했으니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할 차례였다.

“믿음아, 네가 없는 동안 생각해 본 게 있다.”

“뭔데요?”

“난 진짜 못난 놈인가 봐. 나 때문에 환자도 위험했고 너까지 위험했잖아.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긴 한데 나 때문에 두 환자 다 죽을 뻔했어.”

황은우는 스스로를 질책하고 있었다.

감당 못 할 복부 대동맥 파열 환자를 본인이 수술하면서 환자도 위험해지고 내 수술도 위험해졌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너무 안일했지.”

황은우의 독백이 이어졌다.

“너라면 어떻게든 나를 도와줄 거라는 배짱으로 환자를 받았으니까. 나란 인간도 참 치사한 인간이다.”

황은우의 죄책감을 나는 십분 이해했다.

결과가 해피 엔딩이었길래 망정이지 자칫 잘못했다간 두 환자 다 위험할 뻔했다.

하지만 황은우가 간과한 점도 분명 있었다.

“아닌데요. 저는 선배가 오늘 엄청 멋있었는데요?”

“내가? 왜?”

황은우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손정남이 전원 지시했을 때 선배가 개기지 않았어 봐요. 환자는 분명 전원 도중 엠뷸런스에서 사망했겠죠.”

“…….”

“그런데 선배는 환자를 살리고 싶어서 지시를 거부했어요. 배우지도 않은 복부 대동맥 파열에 응급 처치도 했고요.”

나는 황은우의 용기를 높이 평가했다.

황은우가 손정남을 상대로 당당하게 맞서기에.

내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었기에 환자는 살아날 수 있었다.

이번 수술의 공로를 굳이 퍼센트로 나눈다면 황은우가 7이고 내가 3 정도 될 것이다.

만약 다른 펠로우가 황은우와 같은 입장이었다면 과연 황은우처럼 행동했을까.

나는 절대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황은우만큼 올곧고 환자를 생각하는 의사를 나는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이런 훌륭한 선배가 전생에 흉부외과에서 탈주하게 만든 주인공이 바로 전생의 나 아닌가.

전생의 나 역시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부끄럽게 너무 포장해 주네. 근데 난 아직도 내가 정말 잘했던 건지 모르겠어.”

“잘한 거 맞아요. 제가 멋있다고 했으면 끝난 거예요.”

“말이라도 고맙다. 힘이 됐어.”

자책감을 떨쳐 낸 황은우의 표정이 한결 편해 보였다.

저는 전생의 선배 덕을 수도 없이 많이 봤습니다. 이번 생에서는 선배가 저한테 기대세요.

절대 선배가 쓰러지도록 하지 않을 테니…….

나는 차마 할 수 없었던 말을 속으로 삼켰다.

“아 참, 선배. 저한테 녹음 파일 전송해 주실래요?”

“무슨 녹음 파일? 아… 손정남하고 대화한 거?”

“네. 저희가 괴로웠던 만큼, 아니 그 이상을 갚아 줘야죠.”

나는 싸늘하게 웃었다.

* * *

“말도 안 돼. 정말 수술에 성공했다고?”

“네, 두 환자 다 지금 ICU(집중회복실)에서 관리 중입니다.”

“이런 미친…….”

손정남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현기증이 밀려오고 발밑이 푹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복도를 지나가는 환자들이 여러 개로 보이기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5분 전.

정규 수술 스케줄을 끝낸 손정남은 병동으로 복귀했다.

지나가다 마주친 레지던트에게 오진호 수술과 복부 대동맥 파열 환자의 성패를 물었다.

사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문제였다.

오진호 수술은 날림으로 끝나서 부작용과 후유증이 있을 테고.

복부 대동맥 파열 환자는 죽었을 것이다.

이믿음과 황은우는 지금쯤 사이좋게 스스로를 원망하며 질질 짜고 있겠지.

어쩌면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격렬하게 말싸움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믿음과 황은우.

둘 다 환자밖에 모르는 바보니까 환자만 생각하다가 그가 파 놓은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웬걸?

레지던트를 통해 들은 대답은 정반대였다.

양 수술 모두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것이다.

손정남의 머리로는 이 황당한 상황을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환자 두 명을 다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존재했단 말인가.

“저는 라운딩 때문에 먼저 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교수님.”

레지던트가 그를 스쳐 갔지만 손정남은 좀처럼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망부석처럼 병동 복도를 차지하고 있던 그는 가까스로 발길을 돌렸다.

목적지는 중환자실이었다.

지이이잉.

손정남은 중환자실에서 두 환자를 직접 살피고 컴퓨터로 차트까지 살폈다.

수술 후 촬영한 검사 결과 두 사람 다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순조롭게 회복만 하면 되는 상태였다.

‘젠장, 더 자세히 물어볼 걸 그랬나?’

손정남의 이마에 지렁이 주름이 생겼다.

두 환자의 수술 기록지가 아직 작성되지 않았다. 그래서 수술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파악할 도리가 없었다.

황은우는 대체 무슨 요술을 부렸을까.

이믿음은 또 무슨 요술을 부렸을까.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으므로 상상의 나래가 끝도 없이 펼쳐졌다.

손정남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중환자실을 빠져나왔다.

아무래도 병동에 다시 가야할 듯싶었다.

해당 수술의 어시스트를 붙잡아서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듯싶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맞은편에서 이믿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교수님, 묻고 싶은 말이 많으시죠?”

이믿음이 손정남의 맞은편에 섰다. 이믿음의 입가에는 세상 얄미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요물 같은 녀석.

어떤 때는 곰처럼 미련하게 환자와 동료를 아끼면서도 어떤 때는 여우처럼 교활한 녀석.

“흠흠, 시간 괜찮으면 잠깐 이야기 좀 할까?”

“그럼요. 얼마든지.”

두 사람이 복도 끝 창가로 이동했다.

먹구름이 물러간 하늘을 하얀 뭉게구름이 대신하고 있었다. 비는 어느새 그쳤으며 오렌지 빛 석양이 별관 건물 위에 걸려 있었다.

“너지? 네가 복부 대동맥 파열 수술했지?”

손정남이 공격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네, 제가 했습니다. 손 교수님께서 죽어도 못 하신다고 하니까 별수 없잖아요?”

씨발, 갓 전역한 전문의가 복부 대동맥 파열 수술을 한다고?

그게 말이 돼?

펠로우인 네 선배도 못 하는 수술을?

거칠게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손정남은 참았다.

실제로 이믿음은 수술을 성공시켰고 환자는 무사했으니까.

또한 레지던트 때부터 이믿음은 천재 소리를 들으며 각종 수술 및 어시스트를 집도해 왔으니까.

그래서 손정남은 다른 방향으로 꼬투리를 잡기 시작했다.

“집도의면 자기 수술방을 지켜야지. 수술방을 왔다 갔다 하게 되어 있나?”

“착각하지 마세요. 전 오진호 씨 인공 판막 수술을 끝내고 복부 대동맥 환자가 있는 수술방으로 넘어갔습니다.”

“판막 수술을 그렇게 빨리 끝낼 수는 없을 텐데… 및.”

“교수님이야 평생 가도 못 하겠지만 저는 할 수 있습니다. 방금 중환자실에서 환자 보셨으면 아실 텐데요?”

이믿음의 깐죽거리는 대답에 손정남은 화가 정수리까지 치밀어 올랐다.

페이닥터 나부랭이 주제에 감히 하늘 같은 조교수를 희롱해?

“너 이 자식 뭘 믿고 이렇게 까부냐? 응?”

“까불고 있는 건 당신이야. 당신은 외과의 할 자격 없어. 가운하고 면허 반납하고 병원에서 꺼져 버려.”

“뭐… 뭐라고?”

“당신은 당신의 잘난 성과 때문에 환자를 죽음으로 몰았잖아. 당신은 의사의 가운을 걸친 악마일 뿐이야.”

이믿음이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휴대폰을 꺼냈다.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성 파일을 듣는 순간, 손정남은 병원 천장이 노오랗게 보였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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