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제1장 충돌 (2)
아침부터 퍼붓기 시작한 장대비는 그칠 줄 몰랐다.
옥상 출입구 너머의 세상은 비로 뒤덮여 있었다.
날씨는 험상궂으나 강렬한 빗소리가 손정남은 마음에 들었다.
다만 비상구 계단에 무리를 지어 담배를 피우고 있는 스태프들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상구 계단이 담배 연기로 자욱했다.
“에이씨.”
바람이 부는 통에 연약한 라이터 불씨가 픽픽 꺼졌다.
손정남은 손으로 라이터 불빛을 가린 후에야 담배에 불을 붙일 수 있었다.
뿌연 담배 연기를 뿜으며 손정남은 이믿음을 떠올렸다.
그 얄미운 놈은 지금 한창 오진호를 수술하고 있겠지.
오진호에게 유감은 없다만 수술이 제발 실패했으면 좋겠다고 손정남은 생각했다.
아직 물도 안 빠진 전문의가, 심지어 전역한 지 한 달도 안 된 녀석이 감히 조 교수인 자신에게 개긴다고?
만용을 부린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했다.
지이이잉.
가운 주머니에 넣어 둔 콜 폰이 몸을 떨어댔다. 손정남은 번호를 확인하고 받았다.
- 교수님, 혹시 통화 괜찮으십니까?
“왜?”
- 방금 응급실에 환자가 들어왔는데 CT를 촬영해 보니 복부 대동맥 파열 환자입니다.
레지던트의 노티에 손정남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안 그래도 정규 수술 스케줄이 빡빡했다.
그 사이에 응급 수술이 끼어들 것은 또 뭐란 말인가.
더군다나 복부 대동맥 파열 수술은 흉부외과의 응급 수술 중 가장 위험한 수술 중 하나였다.
제아무리 손정남이라도 환자를 살릴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재수도 없지. 하필이면…….’
손정남은 결단을 내리지 못해 갈팡질팡했다.
올해 손정남의 수술 성공률은 무려 95퍼센트에 달했다.
나머지 5퍼센트도 환자가 사망한 것이 아닌 재수술을 한 것에 불과했다.
흉부외과의로서의 솜씨.
수술하기 편한 환자를 골라서 입원시킨 선구안.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면서 이뤄낸 쾌거였다.
그런데 복부 대동맥 파열 환자 수술에 실패한다면 자신의 명성에 흠집이 갈 것은 분명했다.
사망 환자 0퍼센트, 기적의 흉부외과의.
그 명예로운 타이틀이 물 건너가는 것이다.
- 교수님? 저희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너 지금 나 재촉하냐?”
- 아… 아닙니다. 말씀이 한참 동안 없으시길래…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나 말고 수술 가능한 교수님은 없고?”
손정남은 몽당연필만큼 짧아진 꽁초를 버리고 새로운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웬만한 응급 환자는 받아 주겠는데 복부 대동맥 파열 환자는 사망 위험이 너무 컸다.
- 정말 죄송하지만 지금 스케줄 빈 분이 손 교수님밖에 없습니다.
“아… 엿 같네”
손정남은 탄식을 흘리며 고개를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방금 바닥에 버린 꽁초처럼 그의 마음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짧지만 깊은 고뇌 끝에 손정남은 결정을 내렸다.
“야, 그 환자 전원시켜.”
- 네? 전원 말씀이십니까?
침착하던 레지던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언성도 살짝 올라갔다.
- 저희 병원에서 검사에 진단까지 다 받았는데 다른 병원으로 보냅니까?
“내가 지금 컨디션이 안 좋아서 수술 못 해. 그럴 바엔 차라리 다른 병원에서 수술받는 게 낫다.”
손정남은 결국 수술을 회피했다.
환자의 안위보다 자신의 안위를 선택했다.
「너 미쳤어? 네가 그러고도 의사야? 이 저열하고 비겁한 놈아. 인간의 탈을 썼으면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야지.」
가슴에서 울리는 양심의 목소리를 손정남은 깡그리 무시했다.
손정남을 조 교수로 승진시켜 준 것은 양심이 아니라 욕심이었다. 양심의 말은 들은 것이 못 됐다.
- 교수님, 지금 전원을 시켜도 최소 40분은 걸릴 겁니다. 비가 와서 차도 막힐 텐데 그럼 환자는…….
“요즘 레지던트는 교수하고 맞먹나 보지? 세월 좋아졌네?”
손정남이 빈정거리며 말을 이었다.
“1초라도 빨리 환자 내보내. 네가 구급차에 동행하고. 환자 죽으면 네 탓이다?”
- 아… 알겠습니다.
레지던트가 깨갱 꼬리를 말고 통화를 끊은 후.
손정남은 담배 연기를 길게 빨아들이고 길게 내뱉었다.
몽롱한 정신 속에 죄책감이 희석되어 갔다.
* * *
“뭐라고? 손 교수가 대동맥 파열 환자를 전원시키라고 했다고?”
당직실에 있던 레지던트에게 믿기지 않는 사실을 듣고 황은우는 눈을 치켜떴다.
대동맥 파열이라면 당장 수술을 해도 시간이 모자랐다.
그런데 전원 결정을 내리다니 손정남이 제정신인가 싶었다.
“네, 컨디션이 안 좋다고 수술을 못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빨리 전원 보내라고, 환자가 도중에 죽으면 제 책임이라고 하셔서…….”
1년 차 레지던트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순 악질이네. 책임까지 너한테 떠넘겼다. 이거지?”
“네.”
“손 교수 말 생까고 내 말 들어. 당장 환자 수술 준비해.”
“교수님이 지시하신 건데 어겨도 될까요? 저 단단히 찍힐지도 모릅니다.”
“걱정 마. 내가 책임질 테니까. 손 교수는 너한테 책임을 떠넘겼지만 나는 널 책임질 수 있어. 그러니까 내 말대로 해. 알았지?”
황은우는 1년 차에게 수술 준비를 명령하고 곧바로 손정남에게 전화를 걸었다.
손정남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대로 잠수를 탈 모양인 것 같았다.
환자를 사지에 버려 두고 자기 혼자 푹 쉬겠다는 건가?
그 어처구니없는 행태에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손 선배, 대체 어디까지 타락할 생각입니까.
황은우는 병동을 벗어나 본관 옥상으로 향했다. 하지만 손정남을 찾지 못해 옥상 아래층 휴게실로 이동했다.
다행히도 손정남은 휴게실에 있었다.
대동맥 파열 환자가 죽어 가고 있다는 사실에도 아랑곳없이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황은우는 가운에 넣어 둔 휴대폰의 녹음기 기능을 켰다.
악당과 대화할 때는 녹음기를 켜라.
과거 이믿음이 가르쳐 준 지혜였다.
“선배!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황은우가 사나운 목소리로 묻자 손정남이 슬며시 눈을 떴다.
황은우가 찾아온 용건을 알 텐데도 손정남은 여유가 넘쳐 보였다.
“선배라는 호칭은 쓰지 말라고 했을 텐데? 손 교수님이라고 해야지.”
“못난 펠로우가 잘난 손 교수님과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습니다. 시간 괜찮으십니까?”
“들어는 줄게.”
“대동맥 파열 환자 어떻게 된 거예요?”
황은우는 손정남이 전원을 지시한 대동맥 파열 환자에 대해서 따지기 시작했다.
의사가 어떻게 그런 파렴치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냐며 격분했다.
응급 환자 전원은 황은우가 극도로 혐오하는 일이었다.
황은우의 어머니가 지방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후 외상 센터를 전전하다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은우는 응급 환자를 다른 병원에 떠넘기는 행태를 참지 못했다.
“조용히 말해도 다 들려. 귀 아프게 소리 지르지 마.”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던 손정남이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말했다.
“이렇게 처쉬고 있을 시간에 환자를 보면 되잖아요. 근데 왜 수술을 못 한다고 했죠?”
“멍청하기는. 환자를 보기 힘들 만큼 피곤하니까 여기서 쉬고 있는 거잖아. 선·후 관계 파악이 그렇게 안 되니?”
“지랄하지 마. 그럼 오늘 오후에 잡힌 스케줄은 어떻게 소화할 건데.”
제 감정을 못 이긴 황은우는 급기야 반말을 했다.
황은우에게 손정남은 더 이상 선배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었다.
“지금 푹 쉬면 오후 수술은 소화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은우야, 말이 좀 짧다?”
손정남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피어났다.
무언가 꿍꿍이를 숨긴 듯한, 마주한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미소였다.
“난 이제 당신을 대접할 이유가 없어.”
“많이 컸네, 우리 은우. 근데 은우야, 네가 무릎 꿇고 사과하면 내 컨디션이 좋아질 것 같기도 해. 그럼 대동맥 파열 환자 수술도 할 수 있을 것 같고.”
“전원 지시 내린 환자를 이제 와서 수술한다고? 웃기고 있네. 당신은 그저 날 희롱하고 싶을 뿐이야.”
황은우는 콧방귀를 끼며 회심의 카드를 준비했다.
손정남에게 특정한 말을 하도록 유도하고 그 말을 녹음하는 것.
그것이 황은우가 손정남을 찾은 목적이었다.
부디 손정남이 미끼를 물어야 할 텐데…….
“당신 속셈이야 뻔해. 단순히 위급한 환자를 수술하고 싶지 않은 거지. 왜냐고?”
“…….”
“자기가 수술한 환자가 죽으면 명성에 금이 가니까. 내 말이 틀려?”
황은우는 회심의 질문을 던지고 손정남의 표정을 살폈다. 악당으로 변한 손정남의 표정은 좀처럼 읽기 힘들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손정남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고지가 가까웠음을 황은우는 직감했다.
그래, 조금만 더 말을 해 봐.
“내가 내 커리어를 챙기겠다는데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아?”
“환자의 목숨으로 장난을 치고 있으니까. 당신은 커리어를 쌓는 게 아니라 양심을 내다 버리고 있어.”
“양심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그 멋진 양심 너나 실컷 챙겨라. 사람이 양심만 먹고 살 수 있는지 직접 확인해 보라고.”
손정남이 낄낄거리며 웃었고 황은우도 속으로 씨익 웃었다.
일단 골칫거리 하나는 해결했다.
손정남이 고의적으로 수술을 회피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게 되었으니…….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환자였다.
황은우는 대동맥 파열 수술을 감당할 깜냥이 되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응급 수술이 가능한 교수는 눈앞에 손정남뿐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에 흥분해서 수술 준비를 지시하긴 했다만 뒷감당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오늘 나한테 이를 드러낸 대가는 혹독하게 치르게 될 거야. 황은우, 더 이상 할 이야기 없으니 썩 꺼져.”
“안 그래도 나갈 참이었어. 당신하고 이야기하는 거 역겨웠거든.”
황은우가 휴게실을 떠난 후 손정남은 배를 잡고 웃었다.
“크크크크큭.”
설마 이런 식으로 일이 술술 풀릴 줄이야.
손정남은 황은우가 자신을 찾아온 순간 직감했다.
이 어리석은 놈이 자신이 내린 전원 지시를 무시하고 수술 준비를 했을 거라는 사실을.
황은우의 어머니가 외상 센터를 전전하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연을 익히 알았으니까.
황은우가 앞으로 할 일 또한 손정남은 손금 보듯이 훤히 예측할 수 있었다.
수술 가능한 교수가 없으니 황은우가 매달릴 수 있는 사람은 이믿음뿐이었다.
보나마나 이믿음에게 구조 요청을 보내겠지.
오진호 수술을 빨리 끝내고 대동맥 파열 환자를 봐줄 수 있냐며.
그럼 정의의 사도 이믿음 역시 덩달아 집중력이 흐트러질 것이다.
대동맥 파열 환자 때문에 오진호 수술에 조급함을 느낄 것이다.
즉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가 두 마리 토끼를 놓치는 우를 범할 확률이 높았다.
‘황은우도 처리하고 이믿음도 처리하고. 꿩 먹고 알 먹기군.’
손정남의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는 좀처럼 가실 줄 몰랐다.
* * *
첫 봉합을 할 때 찾아온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폐동맥 판막 성형술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넝마 같았던 폐동맥 판막은 어느새 새것처럼 변모해 있었다.
판막엽과 판막륜은 튼튼했으며 물 샐 틈, 아니 혈액이 샐 틈이 없었다.
쪼르르르.
시험 삼아 우심실에 생리 식염수를 따라 붓고 손으로 압력을 가했다.
우심실에 고여 있던 생리 식염수 전부가 우심방으로 솟구쳤다.
성형술로 건강을 되찾은 폐동맥 판막이 식염수의 역류를 막아 주었던 것이다.
“와! 성형술 진짜 대박이네요. 이 정도면 대동맥 판막도 성형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제1보조 권태우가 감탄한 눈빛으로 물었다.
“무에서 유를 만들 순 없어. 판막의 골격이 어느 정도 유지는 돼야 성형술도 하지.”
“그렇군요. 그럼 3D 프린터로 제작한 인공판막 준비하…….”
권태우가 말문을 잃었다.
때마침 수술방에 전화가 걸려 왔던 것이다.
수술방에 전화를 했다는 건 그만큼 바깥에서 큰일이 터졌다는 건데….
전화를 받으러 간 막내 레지던트를 나는 불안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이번에도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이번 예감만큼은 부디 틀리길 바랐는데 말이다.
복귀한 막내의 노티를 듣는 내 얼굴에 서서히 먹구름이 끼었다.
곤란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건 불안 명상에서도 찾지 못했던 돌발 변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