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224화 (224/257)
  • 224화 제5장 연민 (4)

    “의외네? 두 사람이나 있을 줄은 몰랐는데.”

    과장 서인석이 나와 손정남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턱을 쓸어내렸다.

    누구에게 수술을 맡길지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수술의 적임자는 제가 아니겠습니까? 경험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이번 수술의 중요성으로 보나 말입니다.”

    손정남이 거드름을 피우며 말을 계속했다.

    “이 선생이 지금까지 탁월한 재능을 보여 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래 봐야 아직 전문의에 불과합니다.”

    서인석을 향했던 손정남의 시선이 다시 내게 머물렀다.

    손정남은 명백히 나를 얕잡아 보았으나 의외로 나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손정남의 말은 사실이었다.

    손정남은 조교수였다.

    물도 다 안 빠진 전문의인 나보다 실력이 뛰어날 것은 자명했다.

    내가 회귀를 안했더라면.

    다만 아까부터 거슬리는 점은 손정남의 말투와 눈빛이었다.

    군대 다녀온 사이에 성격이 왜 저렇게 변했지?

    - 선배, 도움!

    나는 회의 자료에 재빨리 문장을 휘갈겼다.

    모두의 주목을 받는 상황에서 육성으로 도움을 청할 수는 없었기에.

    “뭐, 손 교수가 집도하는 게 무난하기는 하겠죠. 이 선생은 할 말 있어요?”

    서인석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마음이 벌써 손정남에게 기울어 버린 모습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오진호를 홍보 대사로 끌어들인 사람도, 검진을 유도한 사람도 나였다.

    내가 차린 밥상에 손정남이 숟가락을 얹게 둘 수는 없었다.

    - 수술 스케줄.

    때마침 황은우가 자료에 글을 적었다.

    여백이 많은 단어였으나 나는 눈치로 의미를 알아차렸다.

    “손 교수님은 수술 스케줄이 빡빡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오진호 환자 수술까지 감당하시긴 힘들지 않을까요?”

    “그러고 보니 손 교수 요새 하루에 수술 3개씩 하지 않아요?”

    내 질문을 듣고 서인석이 먼저 질문을 던졌다.

    자신만만하던 손정남은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못 했다.

    약점 공략이 제대로 들어간 것이다.

    나는 황은우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감사를 표했다.

    “하… 하루에 수술 3개까지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손정남이 가까스로 입술을 뗐다.

    “미리 잡힌 수술에 오진호 환자 수술까지 더해지면 4개가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비교적 간단한 수술은 다른 교수에게 부탁하고 오진호 환자 수술을 제가 맡으려고 합니다.”

    서인석의 압박 질문이 계속되자 손정남이 무리수를 던졌다.

    손정남은 서인석의 성격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서인석은 환자를 중요시했고 또 의사의 의지를 중요시했다.

    서인석을 설득하고 싶었다면 차라리 환자 4명을 다 수술하겠다고 대답했어야 했다.

    4명 다 내 환자들이니까 내가 어떻게든 책임지겠다고 말했어야 했다.

    ‘알아서 자빠져 주는군. 나만 잘하면 되겠어.’

    이번 수술이 내 손아귀에 떨어지기 일보직전임을 나는 알아차렸다.

    과연 전개는 예상대로 되었다.

    “손 교수, 태도가 불량하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손 교수 말대로라면 환자 한 명을 내팽개치고 새로운 환자를 받겠다는 거 아닙니까?”

    서인석의 지적에 손정남은 꼼짝도 못 했다.

    본인이 판 함정에 본인이 빠졌다는 걸 알아챈 눈치였다.

    “환자를 그렇게 쉽게 받고 쉽게 내쳐도 되는 겁니까? 손 교수는 환자가 장난감처럼 보여요?”

    “아… 아닙니다, 과장님. 제가 실언을 하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은 나 말고 환자분한테 하세요. 배신을 당한 건 환자분이니까.”

    서인석의 따끔한 꾸중으로 회의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분위기에 짓눌려 스태프 중 누구도 쉬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저는 깔끔하게 이번 수술을 포기하겠습니다만… 그렇다고 이 선생이 수술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와중에 손정남이 물귀신 작전을 펼쳤다.

    내가 수술하는 꼴은 절대 못 보겠다는 것이다.

    끝까지 방해를 하시겠다?

    나도 오기가 생겼다.

    “손 교수님이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무척 단순하고 핵심적인 이유가 있죠. 이 선생은 수술을 감당할 깜냥이 안 됩니다.”

    내 질문에 손정남이 무시하는 말투로 대답했다.

    손정남은 여전히 내 경력과 경험을 문제 삼았다.

    복합 판막 수술을 하려면 최소한 펠로우 2년 차는 되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막 전역한 전문의라서 믿음이 안 간다는 것이었다.

    손정남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서인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에도 이 선생이 집도하기엔 무리 같은데?”

    “아니요, 충분히 소화할 수 있습니다.”

    “근거는?”

    “있습니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전생의 수술 경력은 증명할 길이 없지만 내겐 또 다른 무기가 있었다.

    바로 3D 프린터를 이용한 인공 판막 수술 경험이었다.

    군의관 시절 백경민의 신 수술을 어시스트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점을 적극 호소했다.

    최근 상용화 중인 신수술에 내 지분이 있다고 말하자 다들 놀란 눈치였다.

    군대에서 이뤄 낸 성과니 더욱 믿기 힘들겠지.

    “으음… 정말 공동 저자로 올라와 있네?”

    즉석에서 논문을 뒤져 봤던 걸까,

    서인석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태프들의 여론이 슬슬 내게로 몰려드는 상황.

    분위기를 탄 나는 이 자리에서 마침표를 찍기로 했다.

    손정남의 질척거리는 방해 공작을 떨쳐 내고 수술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저는 신수술의 저자 백 선생과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아 오진호 씨에게 3D 프린터 인공 판막 치환술을 펼치겠습니다.”

    * * *

    오전 컨퍼런스와 회진이 끝나면서 스태프들이 개미 떼처럼 우르르 흩어졌다.

    나는 회의실 앞에서 황은우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하여간 네 깡다구는 알아줘야 해. 환자가 연예인인데 신수술을 펼치겠다고? 그럼 위험이 두 배 아니냐?”

    황은우가 혀를 차며 물었다.

    “검사 결과를 보니까 신수술을 하는 편이 경과가 더 좋을 것 같더라고요. 제 보신보다 환자의 경과가 더 중요하죠.”

    대답을 마친 내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오진호의 집도의는 결국 나로 결정되었다.

    나는 판막 수술에 필요한 경험을 해 봤다는 점을 증명해 냈다.

    또한 환자 회복에 가장 적합한 수술을 집도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점도 증명했다.

    그러므로 서인석이 내 손을 들어 줬던 것은 필연이었다.

    전생의 멘토였던 서인석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나는 손바닥 보듯 훤히 알았으니까.

    서인석의 마음을 사려면 어떻게 해야한다?

    환자를 치료하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과 성의를 보여라.

    “어쩐지 선배는 저희 어머니보다 저를 더 많이 걱정하는 것 같네요?”

    내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럼 내가 걱정을 안 하게 좀 평범하게 지내봐. 페이 닥터 첫 날부터 이게 뭐냐? 손 선배랑 살벌하게 시비나 붙고.”

    “전 오진호 환자 수술을 하고 싶다고 했을 뿐이에요. 시비를 건 사람은 오히려 손 선배죠.”

    나는 자연스럽게 손정남으로 화제를 돌렸다.

    내가 군대를 다녀온 사이 손정남의 성격이 왜 그렇게 표독해진 것 같냐고 황은우에게 물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딱히 무슨 사건이나 사연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황은우가 옛 기억을 살피는지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뚜렷한 계기가 없다고 하니 나는 더 오리무중에 빠진 기분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전생에서 이 시점의 손정남은 순둥이였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손정남의 흑화에는 내 회귀로 인한 나비 효과가 작용한 듯싶었다.

    저벅. 저벅.

    요란한 구둣발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손정남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손정남은 나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마주 서서 팔짱을 꼈다.

    “이믿음, 페이 닥터 잠깐 하다가 떠날 놈이 왜 이렇게 나대냐?”

    손정남의 목소리에는 적개심과 분노가 깔려 있었다.

    하지만 나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손정남의 시비로 마음이 동요할 수준은 이미 한참 전에 초월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의사가 환자를 수술하는 게 나대는 건가요?”

    “네가 감당할 수 있는 환자가 아니야. 지금이라도 포기해.”

    “과장님이 승낙한 결정입니다. 따지고 싶은 게 있으면 제가 아니라 과장님께 따지시죠.”

    “이 새끼가 진짜. 네가 언제부터 나한테 꼬박꼬박 말대답했냐?”

    손정남의 언성이 높아지고 말투는 험악해졌다.

    정작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건만 곁에 있는 황은우가 오히려 더 안절부절이었다.

    “그럼 제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선배가 만족하시겠어요? 지금부터 입 다물고 있을까요?”

    “하아… 진짜 같지도 않은 게 열받게 하네.”

    “그러는 선배야말로 왜 오진호 씨를 수술하려는 거죠?”

    이번에는 오히려 내가 물었다.

    회의를 하는 내내 가슴에 품고 있었던 질문이었다.

    “바보 같은 질문이군. 당연히 커리어 때문이잖아. 연예인을 수술하는 것만큼 외과의가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일도 없지.”

    대답하는 손정남의 눈동자에 욕망이 번들거렸다.

    전생에서 내가 자주 목격했던 눈빛이었다.

    저런 눈빛을 가진 자는 권력을 얻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저지르곤 했다.

    손정남은 조 교수가 되면서 전생에 없던 권력욕이 생긴 모양이었다.

    - 뭐랄까, 많이 표독해졌어. 부교수가 된 다음부터는 말 섞기도 힘들더라.

    컨퍼런스 전 황은우가 내게 했던 말도 이제는 이해가 갔다.

    다만 손정남이 원래 욕심이 많았던 사람인지.

    아니면 조교수라는 자리가 손정남을 욕심쟁이로 만들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전생의 손정남은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나는 앞으로 손정남과 사사건건 시비가 붙을 것을 예감했다.

    변한 손정남은 나와 상극이었다.

    우리는 물과 기름이었고 평생 서로 닿을 수 없는 두 개의 평행선이었다.

    “과장님 앞에서는 깨끗한 척했지만 난 다 알아. 사실 너도 나와 비슷한 과라는 걸.”

    손정남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너도 주목받고 싶어서 오진호를 수술하려는 거잖아. 그렇지?”

    “저를 선배랑 동급으로 묶어 주다니 황공하네요.”

    “주제에 빈정거리기는. 그건 그렇고, 황은우.”

    손정남이 애꿎은 황은우에게 화살을 돌렸다.

    “아, 네. 선배.”

    “이믿음한테 뭐 그렇게 붙어 먹을 게 있다고 졸졸 쫓아다녀? 나는 쥐좆으로 보이나 보지?”

    “아… 아닙니다! 바로 아래 후배다 보니 워낙 친하게 지내 와서.”

    “처신 잘해라. 머리가 있으면 네가 앞으로 누구한테 잘 보여야 하는지는 알 거라 믿는다.”

    손정남이 황은우의 어깨를 툭툭 치고 자리를 떠났다.

    손정남이 떠났음에도 황은우는 한동안 잔뜩 얼어붙어 있었다.

    직급으로 후배를 협박할 줄도 알고.

    손정남은 어디서 못된 것만 잔뜩 배워 온 것처럼 보였다.

    ‘유감이지만 어쩔 수 없지.’

    나는 해외 연수를 떠나기 전 손정남을 확실하게 짓밟아 놓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시간이 흘러 손정남이 부 교수가 되고 과장이 되어 세력을 모은다면 강태섭 같은 악마가 되어 버릴 테니까.

    본원 흉부외과는 무법천지가 되어 버릴 테니까.

    “선배, 당분간은 저랑 거리를 두세요.”

    “응? 그게 무슨 소리인데?”

    “저 때문에 손 선배한테 찍히면 안 되잖아요. 적당히 몸 사려야죠.”

    내가 모처럼 황은우를 걱정하자 황은우가 코웃음을 쳤다.

    마치 방금까지 얼어붙어 있었던 모습은 다 연기였다는 것처럼.

    “사리긴 뭘 사려. 저 인간 갑질하는 거 견디다간 내 몸에 사리가 생길 판인데.”

    황은우가 나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정말 나를 위한다면 이번 수술 성공해서 손 선배한테 크게 한 방 먹여 줘라. 난 그거면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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