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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222화 (222/257)
  • 222화 제5장 연민 (2)

    너구리의 메인 래퍼 오진호가 건강검진을 받게 하자.

    검진을 받으면 필시 심장 판막 질환 진단이 나올 테고.

    오진호를 수술하면 오진호의 목숨을 살릴 수 있고 에세이를 흥행시킬 수도 있다.

    꿩 먹고 알 먹을 수 있는 시나리오가 번뜩 내 머리를 스쳤다.

    그날부터 나는 본격적인 계획에 착수했다.

    제일 어려운 것은 오진호와 접점을 찾는 것이었는데 오진호는 연예인이었고 나는 의사였다.

    우리 둘 사이의 접점은 없어 보였다.

    깊은 고민 끝에 나는 인맥을 써 먹기로 결심했다.

    전생에서야 사교성 없는 성격이라 인맥이 전무했지만 이번 생의 인맥은 어마무시했다.

    동기들과 친분이 깊었으며 봉사 동아리 활동으로 폭넓은 사람들을 사귀었으니까.

    인맥을 설명하는 법칙 중에 케빈 베이컨의 6단계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보통 6명의 사람을 거치면 거의 모든 사람과 연결된다는 법칙이었다.

    오진호와 내가 연결되는 데는 딱 3단계가 필요했다.

    연예인과 결혼한 의대 선배.

    그 선배에게서 얻은 오진호의 소속사 연락처.

    마지막으로 오진호의 매니저.

    가까스로 오진호의 연락처를 얻어낸 나는 과장 서인석을 찾았다.

    - 매출이 나오니까 윗선에도 폐암 센터에 신경을 많이 쓰는 모양이더구나. 조만간 홍보 대사도 위촉할 예정이야.

    페이 닥터를 부탁하던 날 서인석이 내게 했던 말이었다.

    폐암 센터의 홍보 대사로 나는 오진호를 낙점했다.

    오진호의 팬이고 사업적으로도 할 말이 있다고 하면 직접 만나 주지 않을까.

    “오진호, 그게 누구니?”

    내가 폐암 센터 홍보 대사로 오진호를 추천하자 서인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이름은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이었다.

    “요즘 인기 있는 가수입니다. 최근 발매한 앨범으로 가요 프로그램에서 3위까지 올랐어요.”

    “솔직히 설명해 줘도 모르겠구나. 내가 아는 연예인이라고 해 봐야 유명한 영화배우 몇 명 정도니까.”

    서인석은 오진호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오진호가 싫어서가 오진호를 몰라서였다.

    서인석은 연예계의 먹물인 본인조차 알 정도로 유명한 인물을 섭외하고 싶은 눈치였다.

    나는 초조해졌다.

    폐암 센터의 홍보 대사는 꼭 오진호가 되어야 했다.

    오진호를 위해서라도, 나를 위해서라도.

    “다른 센터들도 보통 배우를 홍보 대사로 쓰던데 저희는 차별점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병원 홍보는 보수적인 게 좋다고 들었단다. 아무래도 연세가 든 분들이 병원을 더 많이 찾으니까.”

    서인석이 칼같이 반박했다.

    호락호락하게 넘어올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이 있는 환자가 굳이 홍보 때문에 병원에 온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

    “홍보 때문에 병원에 온다면 젊은 층이겠죠. 그렇다면 젊은 층을 공략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나는 준비한 논리를 속사포로 쏘아 냈다.

    서인석은 환자에 관해서야 지극히 감성적인 사람이었지만 일상에서는 지극히 논리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말만 잘하면 얼마든지 설득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점을 노렸다.

    “믿음아, 솔직하게 말해 보렴.”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서인석이 분위기를 잡으며 말했기에 나는 살짝 긴장했다.

    설마 작전이 실패했나?

    “어떤 걸 말씀이십니까?”

    “너 그 오진호인가 뭔가 하는 가수의 팬이지? 그래서 홍보 대사로 만들고 싶은 거지?”

    서인석이 헛다리를 짚는 바람에 하마터면 박장대소할 뻔했다.

    나는 목젖까지 치밀어 오른 웃음을 간신히 삼켜야했다.

    “아, 네. 팬이기도 하죠.”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 고작 홍보 대사 정하는 일로 너답지 않게 열을 올렸단 말이지.”

    서인석이 나를 오해하고 있었으나 나는 굳이 그 오해를 풀려고 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간혹 도움이 되는 오해도 존재했다.

    “나도 참 좋아해서 실물로 보고 싶은 여배우가 있었는데 안타깝게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

    “네 말에 일리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동경하는 연예인을 보고 싶은 마음도 이해한다. 그럼 그 사람을 홍보 대사로 쓰자꾸나.”

    서인석은 홍보부에 오진호를 건의하겠다고 덧붙였다.

    1차 목표를 이룬 나는 아이처럼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 * *

    토요일 오후, 서초구에 위치한 한 중식당.

    나는 단정한 복장을 갖춘 채 예약석에 앉아 있었다.

    유명인들이 많이 오는 곳인지 중식당은 철저하게 룸으로 운영되었다.

    그래서 다른 손님은 볼 수 없고 손님의 신발들만 볼 수 있었다.

    “정말 오진호 씨의 팬이신가 봐요? 계약하는 데까지 따라오시고.”

    곁에 앉은 병원 홍보부 팀장 이원필이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오진호가 홍보 대사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

    그 일은 바로 오진호가 건강 검진을 받게 하는 일이었다.

    검진을 받아야 심장 판막 질환을 진단할 수 있을 테니까.

    애석하게도 이 일은 이원필이 손댈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오직 나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내가 구태여 계약하는 자리에 끼어든 것도 그 때문이었고.

    오진호가 검진을 받게 하는 일은 결코 녹록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다.

    오진호는 심장 판막이 노후되어 심부전이 오는 것조차 몰랐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지금까지 제대로 된 검진을 받아 본 적이 없으리라.

    저벅. 저벅.

    이원필과 잡담을 나누는데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두 개의 발소리가 교차하고 있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느슨했던 의식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수수깡처럼 마른 사내와 배가 남산만 한 사내가 룸으로 들어왔다.

    수수깡은 매니지먼트의 계약 담당자였고 남산은 내가 그토록 내가 고대하던 오진호였다.

    두 사람 다 담배를 피우고 들어왔는지 진한 담배 향이 코를 찔렀다.

    두 사람이 착석한 뒤 본격적인 통성명 교환이 시작되었다.

    오진호는 래퍼치고는 외모가 순박하고 선해 보였는데 실제 성격도 그래 보였다.

    평소 자주 웃는지 웃는 모습이 자연스러웠고 말투도 점잖았다.

    “계약하는 자리까지 나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 때문에 괜히 안 해도 되는 고생을 하시고.”

    나는 오진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홍보 계약을 하는 자리에 소속사 가수가 참석하는 경우는 없었다.

    내가 오진호의 팬임을 강하게 어필하고 오진호가 착해서 내 부탁을 들어줬기에 이 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마침 근처에서 작업 중이었어요. 겸사겸사 맛있는 점심 얻어먹고 팬분도 만나면 제가 이득이죠. 감사를 드려야 하는 건 오히려 저예요.”

    오진호가 너스레를 떨었다.

    오진호의 수더분한 성격 때문일까.

    오진호를 직접 만나 보니 오진호를 살리고 싶다는 의지가 더 강해졌다.

    “실례가 안 된다면 사인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오진호는 내가 내민 CD와 펜을 받아 들고 사인을 한 뒤 돌려 주었다.

    나는 미리 공부한 내용으로 오진호와 짧게 대화를 나눴다.

    앨범과 수록곡에 관한 것들 말이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면서 대화가 끊어졌다.

    이때부터 이원필과 계약 담당자 간의 팽팽한 힘 싸움이 시작되었다.

    홍보 대사 위촉 비용.

    홍보 대사의 활동 범위 등등을 놓고 이견을 조율해 나갔다.

    쿵!

    계약서에 도장이 찍힌 것은 두 사람이 대략 30여 분 정도 티격태격했을 때였다.

    도장이 찍히기 무섭게 테이블은 평화를 되찾았다. 이원필과 담당자의 표정이 풀리면서 공기가 가벼워졌다.

    드디어 내가 나설 차례였다.

    * * *

    “진호 씨, 요새 몸은 좀 어때요?”

    나는 오진호의 건강으로 슬며시 화제를 돌렸다.

    “한창 활동할 때라 피곤하죠. 그래도 행사 시즌은 아니라 저번 활동 때보다는 괜찮은 것 같네요.”

    “홍보 대사로 위촉된 김에 건강 검진을 받아 보는 건 어때요?”

    “검진이요? 저 건강합니다. 이십대 중반 이후로 병원 신세 한번 진 적이 없어요.”

    오진호의 목소리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양반아, 그게 더 문제라고!

    나는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건강을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도 문제지만 건강에 지나치게 무신경한 것도 문제였다.

    병이란 어느 순간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커지는 것이었다.

    “조금만 활동해도 쉽게 피곤해지거나 숨이 자주 가쁘지는 않나요?”

    나는 전생에서 오진호가 겪었던 심장 판막 질환의 증상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부엉이처럼 동그래지는 오진호의 눈.

    “의사 생활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죠. 증상이 없으면 모르겠는데 증상이 있잖아요?”

    “…….”

    “이 기회에 검진 꼭 받아보시죠.”

    “말씀은 고맙지만 썩 내키지는 않네요.”

    금방 넘어올 것처럼 보였던 오진호가 의외로 단호하게 거절했다.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내 이마에 지렁이 주름이 생겼다.

    “검진을 받을 정도로 몸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닐 겁니다. 그냥 제가 워낙 비만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요?”

    오진호는 본인 손으로 본인의 남산만 한 배를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검진보다 다이어트가 우선인 것 같네요.”

    “다이어트를 하신다면 더더욱 검진을 받으셔야죠.”

    의외의 저항이 있었으나 나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내가 물러선다면 오진호는 몇 년 이내로 죽을 테니까.

    “다이어트와 건강 검진이 무슨 상관이 있죠?”

    “우선 체지방량을 측정할 수 있죠. 혈액 검사를 통해 당뇨나 고혈압 등 비만에 관련된 수치 등을 알 수도 있고요.”

    “으음… 상관이 없는 건 아니네요.”

    오진호가 가만히 턱을 쓸어내렸다. 다이어트와 건강 검진의 연관성을 알게 되니 호기심이 동한 모양이었다.

    “진호야, 그냥 이번 활동 끝나고 P.T나 끊어. 그게 좋겠다.”

    “그럴까요?”

    매니지먼트 직원이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바람에 나는 뒷목을 부여잡았다.

    갑자기 혈압 오르네.

    “헬스장에서 인바디를 측정하는 건 한계가 있습니다. 가장 정확한 건 병원 검사에요.”

    “물론 그렇긴 하겠지만 금식도 해야 하고 귀찮은 게 많으니까요.”

    갈팡질팡하는 오진호를 붙잡기 위해 나는 필살기를 사용하기로 했다.

    오진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래를 공부한 게 이렇게 쓰일 줄이야.

    “이번 너구리 앨범 타이틀곡에 이런 가사가 있죠?”

    나는 헛기침을 하고 가사를 읊조렸다.

    “방심하지 마. 자만하지 마. 너를 무너트리는 건 언제나 방만한 네 자신. 네가 믿을 건 오로지 너를 경계하는 네 자신.”

    내가 뜬금없이 랩을 읊조리자 테이블 분위기가 고요해졌다.

    세 사람이 ‘쟤 왜 저래’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기에 내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저기요. 나도 하고 싶어서 했던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진호 씨가 진호 씨의 건강을 너무 과신하고 있다는 거죠.”

    “…….”

    “이제 건강에 대한 과신은 버리고 건강을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요?”

    “크크크크.”

    오진호의 낮게 깔린 웃음소리가 테이블을 휘어 감았다.

    오진호는 배를 붙잡아가며 킥킥 거리다가 급기야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이야, 선생님한테 제대로 한 방 먹었네요. 기대 이상이에요.”

    오진호가 물을 한 잔 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까짓거 이번 기회에 건강 검진 한번 받아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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