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216화 (216/257)
  • 216화 제4장 전역(1)

    ‘한심하다. 한심해.’

    강태섭은 참관용 수술실의 분위기를 읽으며 끌끌 혀를 찼다.

    “보는 내내 조마조마했습니다. 저 친구가 하마터면 다  된 수술을 망칠까 봐.”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약물로 버티면서 박 교수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을…….”

    “젊은 친구들은 성질이 급해서 문제예요.”

    폐색전증을 치료하고 수술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 단계에서 교수들은 이믿음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거의 역적으로 몰아가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강태섭의 의견은 다른 교수들과 많이 달랐다.

    강태섭은 이믿음이야말로 환자를 살린 1등 공신이라고 생각했다.

    첫째, 박 교수를 기다리지 않고 과감하게 수술을 한 판단이 탁월했다.

    그는 환자가 약물로 무려 1시간이나 버틸 거라 보지 않았다.

    설령 버틴다고 해도 수술 후에 막대한 후유증이 찾아왔겠지.

    그 후유증으로 환자는 수술대가 아닌 침상에서 죽거나.

    또는 죽느니만 못한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둘째, 이믿음이 보여 준 폐 수술의 완성도였다.

    폐·식도 파트 펠로우를 마쳐야 소화할 수 있는 폐색전증 수술을 이믿음은 완벽하게 소화했다.

    달랑 전문의 면허증만 들고 있는 이믿음이 말이다.

    이믿음의 실력은 이미 웬만한 교수를 뛰어넘었다.

    잠재력 또한 무궁무진하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면서 강태섭은 이믿음을 더욱 소유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강 과장님은 이번 수술, 어떻게 보셨습니까?”

    맨 앞자리에 있던 이동철이 뒤를 돌아보며 강태섭에게 감상을 물었다.

    진지하게 의견을 구한다기보다는 예의상 물어보는 듯한 분위기였다.

    “훌륭하고 능력 있는 제자분을 두셨군요.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저 이믿음이라는 친구는 확실히 제재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천둥벌거숭이의 느낌이 납니다. 의료 사고를 일으키는 건 대부분 저런 나대는 친구들이죠.”

    “강 과장님도 같은 생각을 하시는군요. 이믿음이라는 친구에게는 제가 따로 언질을 해 두겠습니다.”

    대화는 짧게 끝났다.

    이동철이 강태섭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강태섭은 인맥 빨로 초고속 승진한 젊은 과장에 불과하다고 이동철은 생각했다.

    과장임에도 강태섭을 가장 뒷좌석에 배치한 것도 사실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물론 이동철의 괘씸한 선 가르기를 강태섭이 모를 리 없었다.

    그저 알면서도 넘어가 주는 것뿐이었다.

    지금 당장은.

    수술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백경민을 찬양하는 목소리는 더욱 커지고 이믿음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더욱 커졌다.

    이믿음이 욕을 먹을 때마다 강태섭은 마냥 기뻐했다.

    값비싼 다이아몬드에 더러운 오물이 묻고 있었다.

    다이아몬드는 곧 버려질 운명이었고 다이아몬드를 줍는 사람은 자신이 될 것이다.

    모니터 속 이믿음을 바라보며 강태섭은 혀로 입술을 핥았다.

    * * *

    험난했던 판막 수술과 폐색전증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긴장감이 풀리면서 잊고 있었던 피로가 밀려왔다.

    털썩!

    나는 가까운 휴게실을 찾아 소파에 몸을 던졌다.

    폭신한 쿠션에 몸이 가볍게 튕겨졌다.

    백경민은 참관 온 의사들에게 수술 후 브리핑을 하러 떠났고, 레지던트는 밀린 일을 처리하기 위해 병동으로 올라갔다.

    수술이 끝나고 나 혼자 남은 것이다.

    -미안한데 1시간만 기다려 주라. 회포는 그때 풀자. 피곤할 테니까 휴게실에서 쉬고 있어.

    수술실을 나오면서 백경민이 한 말이었다. 나는 약속대로 휴게실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번엔 좀 힘들었네.’

    찬찬히 돌이켜 본 수술은 녹록치 않았다.

    전생에서 신수술이 실패한 이유를 나는 두 가지로 꼽았다.

    하나는 업체가 잘못 보낸 기계 판막.

    또 다른 하나는 첫 참관 수술에 잔뜩 긴장한 백경민이 저지른 의료 사고.

    그런데 웬걸?

    꿈에도 상상 못한 위험 요소가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폐색전증이었다.

    의술의 신은 정녕 이번 수술이 실패하기를 바랐던 건가.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도 감당하기 힘든 시련을 무려 세 개씩이나 던져 버렸으니…….

    ‘그래도 결국 잘 이겨 냈으니까.’

    의술의 신을 원망하는 대신 나는 내가 거둔 성취를 달콤하게 맛보기로 했다.

    신수술의 성공으로 개선될 판막 질환 환자들의 삶을.

    앞으로 승승장구할 백경민의 삶을.

    이번 수술의 수혜자에는 나 역시 포함되었다.

    처음 집도해 본 폐색전증을 성공으로 이끌면서 나는 자신감을 얻었다.

    의대 시절 양 교수에게 받았던 폐·식도 파트 펠로우 수업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 냈다.

    수술 도중 무아경과는 다른 새로운 경지를 경험하기도 했다.

    위이이잉.

    이명과 함께 찾아온 부동심은 이번 수술의 일등공신이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기에 응급 상황에서 생에 처음으로 하는 폐색전증 수술에 성공할 수 있었으니까.

    무아경의 발동 조건은 몸과 마음의 컨디션에 달렸는데.

    부동심의 발동 조건은 대체 뭘까.

    수술 과정을 되짚으며 부동심을 탐구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쾅!

    거친 문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백경민이 콧김을 씩씩 뿜으며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수술 잘 끝내 놓고 왜 성질이야?”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 * *

    휴게실.

    나와 백경민은 서로를 마주 본 채 캔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은혜를 모르냐? 엎드려 절해도 모자랄 판에 협잡질을 하고 자빠졌어.”

    콰지지직.

    백경민이 다 마신 커피 캔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캔은 골인하지 못했다.

    맑은 소리를 내며 쓰레기통 앞에 떨어졌다. 별 게 다 속을 썩인다며 백경민이 툴툴거렸다.

    그는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나서 캔을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자리로 돌아왔다.

    “근데 지금 나만 열 받는 거야? 제일 열 받아야 하는 사람은 너 아니야?”

    “뭐, 그러려니 해야지.”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금으로부터 10분 전, 백경민을 통해 태극 병원 흉부외과 과장의 전언을 들었다.

    도와준 건 고맙지만 앞으로 태극 병원 수술에 개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저번 총상 환자 수술도 그렇고.

    이번 폐색전증 수술도 그렇고 당신의 행동은 너무 섣부르고 무모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명백한 축객령이 나는 그리 불쾌하지 않았다.

    이런 푸대접을 하루 이틀 받아 본 것도 아니었을뿐더러.

    다른 의사들 눈에는 내 행동이 충분히 위태로워 보일 수 있음을 이해해서였다.

    내가 회귀했다는 사실을 아는 건 외롭게도 나뿐이었니까.

    “전생에 보살이었니? 내가 너였으면 최소한 과장 찾아가서 멱살은 잡았다.”

    “그래 봐야 화만 더 날걸? 복수를 할 거면 다른 방식으로 해야지.”

    “오오, 복수.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방법은 생각해 뒀어?”

    “내가 잘나가는 게 최고의 복수 아닐까? 나중에 세미나에서 만나면 거드름도 좀 떨어 주고.”

    “복수가 너무 얌전한 거 아니야?”

    나는 그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덧붙였다.

    복수를 하자고 신원대학교 병원이 아닌 태극 병원에 취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최고의 흉부외과의가 되는 것.

    최고의 수술 팀을 꾸리는 것.

    내 원대한 뜻을 펼치기에 태극 병원은 너무 좁았다.

    “하긴, 네가 잘나가면 과장이 배 아파하긴 하겠다.”

    “배가 아픈 걸 넘어서 속도 쓰리게 해 줄 거야.”

    “아주 귀여운 복수네. 너답다.”

    백경민이 피식 웃었다.

    화제는 곧 신수술로 넘어갔다.

    성공적인 결과로 인해 신수술이 호평을 받았다고 백경민은 말했다.

    몇몇 교수는 신수술에 깊은 호감을 드러냈으며 적당한 케이스를 찾으면 적극적으로 수술을 진행해 보겠다고 했단다.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이로써 3D 프린터를 이용한 흉부외과 수술이 전생보다 더 빠른 시기에 상용화될 테니까.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나는 알아. 네 덕분에 이번 수술이 무사히 끝났다는 걸. 다시 한번 고맙다.”

    백경민이 고개를 숙여 가며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럼 맨입으로 끝낼 생각은 아니겠지?”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봐.”

    “순댓국 평생 이용권.”

    “너무 소박한 거 아니냐? 좀 더 근사한 걸 말해 봐. 그래야 나도 들어주는 맛이 있지.”

    “순댓국에 다른 거 하나 추가해도 돼?”

    “얼~마든지 하세요.”

    슬슬 중요한 이야기를 꺼낼 타이밍이 되었다. 나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싹 지우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내 표정이 심상치 않은 걸 읽었는지 백경민도 살짝 긴장한 티를 냈다.

    “두 번 다시 과장한테 이용당하지 마. 그게 내 두 번째 소원이야.”

    “두 번 다시라니… 그게 뭔 소리야? 난 애초에 과장한테 이용당한 적이 없어.”

    “그건 형의 순진한 착각이고.”

    전생에서 이번 수술이 실패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

    그것은 이동철의 탐욕이었다.

    앞으로 한 달 뒤.

    한국 흉부외과 협회에서 올해의 교육자상 시상이 있는데.

    그 상을 수상하기 위해서 이동철은 백경민에게 신수술을 재촉했다.

    백경민이 신수술을 빨리 완성해야 본인이 그 상을 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동철은 백경민이 신수술을 연습할 시간도 주지 않았으며 심지어 첫 수술을 참관 수술로 진행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즉, 전생에서 백경민을 낭떠러지로 떠밀었던 인간은 이동철이었다.

    이동철이 범인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전하자 백경민의 표정이 차차 변하기 시작했다.

    과거를 돌이키면서 이동철이 했던 행동들의 수상함을 깨닫게 된 것이겠지.

    “듣고 보니 확실히 거슬리네.”

    “어떤 점이?”

    “너라면 이번 달 안으로 수술을 완성할 수 있다고, 과장이 자꾸 바람을 넣었거든.”

    백경민이 턱을 쓸어내리며 말을 계속했다.

    “나는 그게 내 실력을 인정해 주는 거라고 기뻐해서 더 열심히 준비했는데… 이제 보니 다 자기 배를 불리려고 했던 거네?”

    “내 말이 그거야.”

    “하… 뒤통수 쌔게 맞은 기분이다, 진짜.”

    진실을 깨우친 백경민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충격을 받아 한참 고개를 숙이고 침묵을 지키던 백경민.

    그가 이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스승에 대한 존경심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적개심만 남아 있었다.

    꼭 강태섭에게 배신당했던 나를 지켜보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팠지만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말이다.

    지금 진실을 깨닫는 편이 나중에 진실을 깨닫는 것보다 훨씬 덜 아플 것이다.

    “영감탱이, 이 몸을 잘도 이용해 먹었겠다? 누구 눈에서 먼저 눈물이 떨어지는지 두고 보자고.”

    백경민이 이를 갈며 말했다.

    본래 신수술 성공 후 작성할 논문에 과장을 공동 저자로 올릴 생각이었으나 공동 저자를 나로 바꾸겠다고 했다.

    “어때? 괜찮은 생각이지? 이러면 네 은혜를 갚는 동시에 과장한테 엿도 먹일 수 있으니까.”

    “와우, 우리 형 머리 잘 돌아가네?”

    “내가 원래 너보다 머리는 좀 더 컸다 아이가.”

    백경민이 영화 대사를 따라 하며 사악하게 웃었다.

    백경민이 과장의 손아귀에서 탈출했으므로 나는 마지막 남은 긴장의 끈을 탁 풀어 버렸다.

    이제야 속이 후련했다.

    “아, 참. 전해 준다는 말이 있다는 걸 깜빡했네?”

    “무슨 말?”

    “오늘 참관 온 의사 중에 널 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더라.”

    백경민은 그 사람이 나와 같은 신원대학교 소속의 흉부외과 과장이라고 했다.

    물론 짚이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멀어서 얼굴은 확인 못했지만 참관용 수술실에서 익숙한 낯을 본 것 같기도 했다.

    “그 사람 이름이 뭔데?”

    “강태섭.”

    내가 속으로 천 번은 넘게 씹었던 원수의 이름이 백경민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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