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제2장 신 수술(3)
데이트를 끝내고 헤어질 때까지도 지은이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친모를 만나야 하는지.
아니면 만나지 말아야 하는지를.
친모가 기생충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지은이가 친모를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나는 내 주장을 강력하게 몰아붙이지는 않았다.
너무 간섭했다간 지은이가 오히려 내게 반발심을 품을 수 있었기에.
따라서 갈팡질팡하는 지은이를 지켜보며 나는 초조함을 느꼈다.
내가 안도의 한숨을 쉰 것은 그다음 날이었다.
지은이가 오전에 먼저 연락을 해 왔다.
-선배 말대로 그냥 안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제 그랬죠? 추억 속에 묻어 두는 편이 더 좋은 사람도 있다고. 어머니도 나한테 그런 사람인 것 같아요.
지은이의 목소리는 평소답지 않게 축 처져 있었다.
자신을 버렸다고는 해도 친모는 친모였다. 그런 어머니를 매정하게 모른 척해야 한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워 보였다.
물론 지금 당장이야 힘들겠지만 언젠가 오늘의 선택을 대견해할 날이 올 것이다.
“잘 생각했다. 사실 지은이 네가 어머니를 꼭 만나야 할 의무감 같은 걸 느낄 필요는 없어. 어머님이 네게 먼저 상처 준 걸 생각하면.”
-그렇겠죠? 저 잘한 거 맞겠죠?
“그렇다니까! 널 못 믿겠으면 날 믿어도 좋아. 이 몸이 특별히 네 연락은 다 받을 테니까 자주 연락하고.
내 농담에 지은이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참 영광이네요.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알면 됐느니라.”
나는 짐짓 왕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통화를 끊었다.
지은이의 삶이 제 궤도를 찾았고, 거기에 내 노력이 일조를 했다고 생각하니 뿌듯했다.
‘나도 참…….’
통화를 끊은 나는 전생의 나를 돌이켜 보며 참 바보 같았다고 생각했다.
환자는 그리도 끔찍하게 챙겼으면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는 왜 그리 무심했을까.
그들의 아픔을 헤아리고 손 내밀어 줄 생각은 왜 하지 못했을까.
환자와 의사의 차이는 종이 한 장보다 얇다는 걸 왜 알지 못했을까.
하지만 나는 후회에 그리 오래 빠져 있지는 않았다.
아마 그때의 나는 그때의 나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을 것이다.
현재에서 과거를 평가하고 재단하는 일은 너무 가혹한 처사일지 모른다.
과거의 나는 회귀도 하지 않았고, 가정 형편도 어려웠으며 사회성도 부족했으니까.
똑. 똑. 똑.
“지대장님, 환자 한 명 봐주실 수 있습니까?”
노크 소리와 강진수의 목소리에 상념이 깨졌다. 내가 군의관이라는 현실감이 빠르게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래, 들어와.”
나는 오늘의 첫 번째 진료를 시작했다. 병사의 이름은 정민준, 계급은 이등병이었다.
“단결!”
부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는지 정민준의 구호가 우렁찼다.
그의 앳된 얼굴에는 간부를 마주한다는 긴장감이 잔뜩 서려 있었다.
경례를 한 정민준이 지대장실로 들어왔고, 나는 정민준의 증상을 물었다.
정민준은 특별히 어디가 아파서 온 것은 아니었다. 코골이 증상이 심해서 코골이 증상을 줄이고 싶다고 했다.
“혹시 코 곤다고 선임들이 괴롭히니?”
“그… 그런 건 아닙니다.”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진짜 아닙니다. 제가 코를 골면 다른 분들이 잠을 못 자니까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말없이 한참 정민준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얼굴이 앳된 줄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피곤해 보이기도 했다.
정민준이 코를 골며 잤고, 옆에 자던 선임이 정민준을 흔들어 깨웠다면.
그런 상황이 반복됐다면 정민준은 한숨도 제대로 못 잤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임이 마냥 가혹 행위를 하는 것처럼 몰아붙일 수도 없는 게 문제였다.
코를 심하게 고는 사람과 숙박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코 고는 소리가 웬만한 TV 볼륨보다 커서 밤잠을 설쳐야 하는, 끔찍한 기분을.
코 고는 사람이 원수보다 미운 기분을.
“코를 심하게 고니?”
“심할 때는 생활관 복도 바깥에서도 들린다고 합니다.”
“일단 외진 잡아 줄 테니까 가 봐.”
“코골이가 병원까지 가야 하는 일입니까?”
“물론이지. 코골이 무시하다가 큰코다친다?”
나는 정민준에게 몇 가지 조언을 했다.
기도가 눌리지 않도록 당분간 옆으로 누워서 잘 것.
기도 뒤쪽에 살이 쪄서 기도가 좁아진 것일 수도 있으니 다이어트를 할 것.
마지막으로 내가 사비를 들여서 구입한 코골이 방지 링을 건네주었다.
수면 무호흡증이 아니라면 아마 이 세 가지로도 증상을 조절할 수 있으리라.
정민준이 경례를 하고 떠나기 무섭게 또 다른 병사가 진료를 보고 싶다고 했다.
오늘은 환자가 많을 모양이었다.
* * *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인 하루가 반복되었다.
군의관으로서 나는 더없이 규칙적인 일상을 보냈다.
일과 시간 대부분은 에세이를 집필하는 데 썼으며 간간이 의무대를 찾는 병사들을 진료했다.
그밖에 초소 회진, 외진 등의 스케줄이 퐁당퐁당 있었고, 주말에는 집으로 복귀해 여가를 즐겼다.
병사들과 간부는 군대의 시간이 굼벵이처럼 느리게 간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 반대였다.
군대에서 보내는 시간이 총알만큼 빨랐다.
나중에 정신을 차려 보면 시간이 지나갔는지, 안 지나갔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 날쌘 속도감 때문일까.
어느 순간 우리 부대는 GOP를 떠나 일반 대대로 복귀해 있었다.
이제 나는 평일 오후 5시만 되면 칼같이 퇴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GOP를 떠난 것이 마냥 호재는 아니었다. 초소 근무의 빈자리를 각종 훈련이 메웠던 것이다.
그해 여름.
나는 첫 번째 유격 훈련 시즌을 맞이했다.
훈련받는 처지는 아니었지만 나는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4박 5일 일정으로 진행되는 유격 훈련은 혹한기 훈련과 더불어 육군 지옥 훈련의 양대 산맥이었다.
부상자가 속출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망자가 나오기도 했다.
병사들이 다치지 않고 무사히 전역하길 바라는 내 입장에서 유격 훈련이란 재앙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재앙에 맞서기 위해 훈련 전날 나는 의무병들에게 직접 CPR 교육을 했고, 처치 도구도 단단히 준비해 두라고 일렀다.
그리고 날이 밝았다.
유격 훈련의 시작은 훈련장 입소였다.
대대 병사들은 군장을 메고 힘겹게 산길을 오르내렸다.
“야, 너희는 복 받은 줄 알아. 쟤네들 기를 쓰고 걸을 때 편하게 엠뷸런스 타고 가잖아.”
“개꿀 빤다는 소리 덜 들으려면 훈련장 가서 잘해라.”
고참들이 후임들의 군기 잡는 모습을 나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솔직히 의무병이 일반 병사보다 편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불침번 근무를 서는 것도 아니고.
훈련 때는 응급 대기라고 해서 훈련에 참여도 안 하고.
의무대를 찾는 병사들에게 약을 주거나 소독하는 일이 일과의 전부였으니까.
작열하는 뙤약볕 속에 대대 병사들의 행군은 계속되었다.
행군하는 동안 나는 열사병으로 쓰러지는 병사를 우려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각 중대의 통신병에게 무전 연락을 받기도 했다.
훈련 전 각 중대에 미리 양해를 구하고 열사병 의심 환자 보고를 받도록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 친구는 군장을 빼고 걷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친구는 눈동자가 풀려 있으니 열외시키죠. 앰뷸런스에 태우겠습니다.
-더 걸을 수 있겠어? 힘들면 무리하지 말고 보고 해.
휴식 시간이 찾아왔을 때 나는 보고받은 병사를 직접 진찰하고 행군 지속 여부를 판단했다.
간부들은 내 간섭을 못마땅해하는 눈치였지만 대놓고 티를 내지는 못했다.
기립성 저혈압 진단 이후 대대장은 나를 누구보다 신임하고 있었기에.
내가 극성을 떨었던 덕분이었을까.
우리 대대 병사들은 무사하고 건강하게 훈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훈련장에 도착해서 나는 연대 소속 의무중대장과 다른 지대장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유격 훈련은 연대 단위 훈련이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나눠 본 결과 군의관들은 훈련을 귀찮고 성가셔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와, 푹푹 찌는데요? 전 벌써 몸이 땀으로 다 젖었어요.”
“그러게요. 이런 막사에서 4박 5일을 지낼 생각을 하니 끔찍하네요.”
“도저히 못 참겠는데, 저녁에 맥주라도 한 캔 따죠?”
군대에 있는 모든 군의관이 책임감이 없다고 말하는 건 일반화의 오류였다.
하지만 적어도 내 곁에 있는 군의관들은 정신 상태가 형편없는 게 분명해 보였다.
훈련장까지 묵묵하게 걸어온 건 병사들인데 마치 자신들이 제일 힘들었던 것처럼 생색을 내고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다른 군의관들의 대화에 오래 끼지 않았다.
우리 대대 소속 의무병을 관리하고 챙겨 온 처치 도구들을 정비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잠시 후 병사들이 숙영을 위한 텐트를 치고 나서 본격적인 유격 일정이 시작되었다.
삐이익! 삐이익! 삐이익!
멀고 가까운 훈련장에서 유격 조교의 날카로운 휘슬 소리가 들려왔다.
휘슬 소리와 더불어 병사들의 함성 소리와 악쓰는 소리도 메아리로 퍼졌다.
고군분투하는 일반 병사들과 달리 의무대는 평화롭기만 했다.
의무병 대다수는 들것을 들고 각 훈련 코스에서 응급 대기를 했는데, 말이 응급 대기지 병풍처럼 서 있기만 하면 됐다.
의무대 막사에 남은 병사들은 대부분 짬이 높은 병사로 피크닉을 나온 것처럼 여유로워 보였다.
나 이외엔 다른 군의관들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중이었고.
훈련받는 병사와 의무대 소속 병사들은 완전히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아 나는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1지대장님,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고 계세요. 편하게 쉬고 있으면 되는데.”
2지대장이 막사 근처를 서성거리는 내게 말했다.
딴에는 나를 위해서 한 말이었을 것이다.
“가만히 죽치고 있는 건 제 성미랑 맞지를 않네요.”
“흉부외과 전공 아니세요? 이럴 때 안 쉬면 대체 언제 쉬시려고요?”
“글쎄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쓰게 웃었다.
막사 주변을 배회하던 나는 끝내 막사를 떠나 유격 훈련장을 돌기 시작했다.
응급 대기 중인 의무병들과 짧게 대화를 나누고 병사들이 훈련하는 모습도 지켜보았다.
전생에서 군의관을 할 당시 겪은 유격 훈련에서는 특별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병사들의 크고 작은 부상이야 있었지만 전부 통제 가능한 범위였다.
하지만 배치받은 부대가 전생과 달랐으므로 이번 유격 훈련에서는 어떤 사건이 터질지 몰랐다.
마냥 마음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런 내 결심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어디선가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아아악!”
비명 소리가 둔덕 너머 훈련장에서 흘러오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든 나는 황급하게 둔덕을 올라갔다.
통나무를 넘어가는 훈련장이었다. 통나무 주변에 병사들이 벌떼처럼 몰려 있었고, 들것을 든 의무병들도 그 안에 껴 있었다.
나는 현장으로 다가가 의무병들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건데?”
의무병들은 내가 갑자기 나타나자 놀란 기색이었다.
“그게, 병사가 통나무를 넘어가다가 땅바닥에 넘어졌습니다. 충격이 심한지 일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말로만 들어선 상황을 선명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나는 군의관임을 밝히고 주변에 있던 병사들과 조교를 물리친 후 쓰러진 병사에게 다가갔다.
병사는 엎어진 자세 그대로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