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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207화 (207/257)
  • 207화 제2장 신 수술(2)

    선택지는 두 가지가 있었다.

    몰래 숨어서 대화를 엿듣느냐, 아니면 발길을 돌려 자리로 돌아가느냐.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여자 화장실과 가까운 곳에 몸을 숨겼다.

    대체 누가 무엇 때문에 지은이를 분노하게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평소의 지은이는 지금처럼 뜨겁게 분노하지 않았다. 화가 나면 오히려 냉정해지면서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런데 통화 중인 지은이는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본 적 없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이제 와서 왜요? 본인이 참 뻔뻔하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어요?”

    “…….”

    “자꾸 절 흔들지 마세요. 전 당신을 완전히 잊었으니까. 야박하다고도 생각하지 마세요. 당신의 업을 되돌려 받는 것뿐이니까.”

    대화를 들으며 나는 지은이의 통화 상대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얻었다.

    존댓말을 하는 걸 보면 대화 상대는 지은이보다 나이가 많다.

    지은이와 상대방은 보통 원수 관계가 아니다.

    아쉽게도 그럴듯한 정보가 모이는 와중에 통화가 끝났다.

    지은이는 자리로 돌아갔고, 나도 화장실을 들렀다가 자리로 돌아갔다.

    방금 막 격정적인 통화를 마쳤음에도 지은이는 통화 전과 똑같은 태도를 유지했다.

    표정도, 낯빛도 변한 게 없었다.

    전생에서부터 느꼈지만 자기 절제력이 대단하단 말이지.

    “선배는 어디 갔다 왔어요?”

    “전화 좀 받고 왔어. 의무병들이 환자 좀 봐 달라고 하길래.”

    나는 자연스럽게 핑계를 댔다.

    화장실에 갔다 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면 내가 지은이의 통화를 엿들었다는 사실을 지은이도 눈치챌 테니까.

    “그냥 자리에서 받지.”

    “식사할 때 군대 전화 받으면 체해. 체하면 네가 손 따 줄 거야?”

    “못할 것도 없죠.”

    서로 켕기는 것이 있었던지라 나와 지은이는 어영부영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레스토랑을 나와 2차를 위해 호프집으로 이동했다.

    모텔이 늘어선 어두운 뒷골목을 가로지르던 도중, 우리는 한 마리의 아기 길고양이와 마주쳤다.

    아기 고양이는 우리를 피해 주차된 자동차 아래로 쏙 들어가 버렸다.

    지은이는 고양이가 불쌍하다고 했다.

    그러고는 내게 양해를 구한 후 가까운 편의점에서 고양이 사료를 구입했다.

    지은이가 자동차 아래로 밀어 넣은 사료를 고양이는 한참 동안 먹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건 먹으면 안 돼.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면 안 돼.

    사람들이 어렸을 때 배우는 것들을 아기 고양이도 배우는 모양이었다.

    고양이는 사료와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결국 사료를 먹기 시작했다. 고양이의 입에서 찹찹찹, 하고 차진 소리가 퍼졌다.

    “고양이 좋아해?”

    “아니요, 딱히 좋아하지는 않아요.”

    돌아오는 대답이 뜻밖이어서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하지도 않는데 뭐 하러 사료까지 챙겨 줘?”

    “그냥 불쌍해서요.”

    지은이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불쌍하다는 말을 수미쌍관으로 사용했다.

    불쌍하다는 말을 하는 지은이의 어투는 정말 쓸쓸하게 들렸으므로 나는 더 깊게 캐묻지 않았다.

    사료를 다 먹을 때까지 우리는 고양이를 지켜보았다.

    잠시 후 고양이가 고맙다는 듯 야옹, 한마디하고 자리를 떠났다.

    지은이는 텅 비어 버린 사료 캔을 가까운 쓰레기통에 버렸다.

    사소한 헤프닝을 겪고 찾은 호프집은 한산했다.

    개업한 지 얼마 안 된 듯 인테리어가 깨끗하면서도 화려했는데, 위치가 영 좋지 않았다.

    가게가 술집 거리 가장 끄트머리에 위치했던 것이다.

    월세가 싸니까, 그래도 내가 하면 잘할 자신이 있으니까.

    주인은 아마 그런 호기로운 마음으로 가게를 차렸을 것이다.

    과일 안주를 시켜 놓고 지은이는 소주를 마셨으며 나는 맥주를 마셨다.

    취기가 올라오면서 둘 다 말이 많아졌다.

    “지은아.”

    “뭐예요? 갑자기 왜 그렇게 분위기를 잡아요?”

    “미안한데, 사실 나… 아까 네가 통화하는 거 들었어.”

    나는 레스토랑에서 들었던 통화를 일부러 언급했다.

    기왕 병원 밖에서 만나게 됐으므로 나는 내가 몰랐던 지은이의 반쪽을 알고자 했다.

    전생에 나는 곁에 있던 동료들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좀 더 정확 말하자면 의사 유지은은 잘 알았어도 인간 유지은에 관한 것은 까막눈이었다.

    전생의 내가 좌절하고 절망할 때.

    누구도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던 이유도 분명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는 법.

    나는 힘들어하는 동료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내가 힘들 때는 동료들이 내밀어 주는 손을 붙잡기로 결심했다.

    “하필이면 왜 그런 통화를 엿들어서…….”

    지은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글쎄, 이게 다 하늘의 뜻인지도 모르지. 비밀은 지켜 줄 테니까 너만 괜찮다면 털어놔도 돼.”

    “싫어요, 죽어도 말 안 해요.”

    “말하고 안 하는 건 네 자유니까 간섭 안 해. 그런데 그러다가 속병 난다?”

    “속병 하나 늘어나는 건 겁 안 나요. 제 속은 이미 만신창이니까.”

    “뭐야? 너 예전에 같이 근무할 때 나 몰래 술 먹었니?”

    내 농담에 지은이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지은이는 소주잔을 한참 만지작거리다가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결심했다는 듯 숨겨 둔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 * *

    지은이는 아까 통화한 상대가 어머니라고 했다.

    다만 그냥 어머니는 아니고, 지은이가 국민학교에 입학할 무렵 아무 말 없이 훌쩍 가출해 버린 어머니라고.

    병든 아버지와 찢어지게 가난한 집구석에 진절머리를 느끼고 지은이의 어머니는 홀연히 떠났다고 했다.

    가혹하게도 어머니의 가출은 불행의 끝이 아닌 불행의 시작이었다.

    지은이가 유일하게 의지하던 아버지마저 3년 뒤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지은이는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

    다행히 친척 집에 거둬져 고아원 신세는 면했지만 지은이는 밥 반, 눈칫밥 반을 먹으며 자라야 했다.

    친척 집에서 얹혀살며 지은이는 학교 공부에 매진했다. 학창 시절 내내 전교 1등을 놓쳐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제가 나중에 의사나 변호사 되면 삼촌하고 숙모 호강시켜 드릴게요.

    지은이는 그런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

    그래야만 삼촌과 외숙모가 자신을 차가운 세상에 내팽개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사랑을 배워야 할 시기에 지은이는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원래 공부에 재능이 있었던 데다가 뼈를 깎는 노력이 더해졌으므로 지은이는 의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것도 명문대 의대에 전 학기 장학금을 받는 상태로.

    그 뒷이야기는 앞선 이야기의 연장선이었다.

    지은이는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면서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했다.

    “그럼 흉부외과는 왜 지원했어?”

    나는 지은이의 선택이 의아해서 물었다.

    지은이의 과거사를 생각하면 성형외과나 피부과 같은, 이른바 돈 되는 과를 전공으로 삼는 편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커서 알게 됐어요. 아버지가 관상동맥 협착증이었다는 걸. 돈이 없어서 수술 대신 약으로 버텨 왔다는 걸.”

    지은이가 쓸쓸하게 웃으며 말을 마쳤다.

    지은이의 처절했던 과거사는 나와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찢어질 듯 가난했던 집안 형편도 그렇고, 아버지가 심장병으로 돌아가신 것도 그렇고.

    나는 강태섭에게 버림을 받았고.

    지은이는 친모에게 버림을 받았던 것도 그랬고.

    까맣게 몰랐던 지은이의 반쪽을 알게 되면서 나는 지은이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다.

    그렇게 당차고 야무지게만 보였던 지은이에게도 말 못 할 그늘이 있었구나.

    “그러니까 지은이 너를 버렸던 어머니가 아까 연락한 거지?”

    “네, 최근 한 달 사이에요. 매몰차게 버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날 찾다니… 너무 염치없는 거 아니에요?”

    지은이의 목소리는 분노와 적개심으로 떨리고 있었다.

    치아로 깨문 입술에서는 피가 날 것도 같았다.

    “그래서 앞으로 어머니 안 볼 생각이야?”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잘 모르겠어요. 한번 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 영영 안 보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지은이는 갑작스레 등장한 친모 때문에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내가 지은이의 입장이라도 그랬을 것이다.

    애증의 관계란 칼로 매듭을 자르듯 쉽게 자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말이다.

    내가 회귀를 통해 너무 현실적으로 변한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지은이에게 접근하는 친모의 의도가 마냥 선해 보이지는 않았다.

    의사로 성장한 딸의 소식을 듣고 딸에게 신세를 지기 위해 연락을 한 건 아닐까.

    그런 의심을 지을 수 없었다.

    믿음아, 잘 생각해 봐. 기억을 샅샅이 뒤져 봐.

    정답은 이미 네가 알고 있어.

    나는 스스로를 다그치고 몰아세웠다.

    지은이는 분명 전생에서도 이런 상황을 겪었을 테고, 친모에 대해서도 어떤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지은이가 어떤 결정을 내렸고, 그 결정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전생을 기억하는 오직 나만 알 수 있었다.

    나는 지은이와 연결된 기억을 머릿속에 죄다 풀어놓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더듬기 시작했다.

    -이번 달에도 카드 값 나가면 개털이에요.

    -하루 종일 병원에만 있으면서 카드는 언제 긁고 다녔대?

    -저 말고 다른 사람이 긁고 다녔으니까 그렇죠.

    -남자 친구 낭비벽이 심한가 보다?

    -차라리 남자 친구가 있어서 남자 친구가 쓴 거였으면 좋겠네요. 집 안에 돈 먹는 웬수가 한 명 있거든요. 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연을 끊었어야 하는데…….

    나는 전생의 언젠가 지은이와 휴게실에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때의 나는 동료들의 사생활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자세한 내막은 캐묻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 대화를 돌이켜 보면 의미심장했다.

    돈 먹는 원수에 연을 끊어 버려야 할 사람.

    그 사람은 지은이의 친모임이 명백해 보였다.

    그러니까 과거의 지은이는 친모를 용서했고, 친모는 기생충처럼 지은이에게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었던 것이다.

    결국 친모를 받아들였다라…….

    아까 친모와 통화하며 길길이 날뛰던 지은이를 떠올리면 상당히 의외의 선택이긴 했다.

    하지만 그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도 아니었다.

    지은이는 아마 외로웠을 것이다.

    아버지는 먼저 돌아가셨으며 친척들은 의지할 수 없는 존재였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흉부외과의 특성상 마음을 터놓고 의지할 사람이 없다 보니 미운 친모라도 곁에 두고자 했을 것이다.

    분노는 언젠가 사그라지지만 외로움은 갈수록 사무치는 법이기에.

    “선배, 그 웃음은 뭐예요?”

    내가 갑자기 쓰게 웃자 지은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냥, 문득 세상이 엿 같다 싶어서.”

    나는 강태섭에게 이용당했고, 지은이는 친모에게 이용당했다는 깨달음에 자조적인 웃음이 터졌던 거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

    그것은 내가 몰랐던 지은이의 반쪽이, 사실은 내 반쪽이나 다름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맥주를 싹 비우고 지은이와 계속 친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거의 듣기만 했다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

    이야기를 듣기만 했던 건 다 계획이 있어서였다.

    사람이란 자고로 자신의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것을 모조리 토해 낸 후에야 타인의 말을 들을 수 있는 법이었으니까.

    얼마 후 때가 무르익었음을 깨닫고 나는 천천히 운을 뗐다.

    “지은아, 이건 지극히 내 개인적인 의견인데. 나는 네가 친모를 안 만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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