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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206화 (206/257)

206화 제2장 신 수술(1)

백경민이 말을 꺼내기 전에도 나는 수술이 성공했음을 알았다.

텔레파시나 독심술을 익혔던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수술이 성공했을 때 혹은 실패했을 때.

수술실을 나오는 외과의 모습을 보면 수술의 성패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경민은 무척 피곤해 보였지만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을 피하지 않다는 것은 자신이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있다는 것은 수술에 성공했다는 뜻이었고.

“솔직히 말해. 너 환타지? 어떻게 이 야밤에 응급 환자를 병원에 데려오냐?”

백경민이 우는소리를 하며 말을 이었다. 부러진 갈비뼈를 절개하고 심막 복원에 성공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그제야 한시름 덜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온몸이 사르르 녹는 듯했다.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네. 내 생각에는 저번 총상 환자도 네가 데리고 온 것 같다.”

“정말 그럴지도?”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총상 환자를 함께 수술한 이후 나와 백경민은 형, 동생 사이로 편하게 지내고 있었다.

“고생했어, 형. 괜찮으면 밖에서 순댓국이나 한 그릇 할까?”

“지금 상태면 두 그릇이라도 먹겠어.”

나와 백경민, 강진수는 병원을 나와 인근 순댓국집으로 향했다.

뜨끈한 순댓국에 다데기를 풀고 오늘 있었던 하태곤 사건도 함께 풀어놓았다.

말은 내가 제일 많았는데, 속에 쌓인 게 많아서였다.

나는 응급의학의 표준기를 욕하느라 바빴다. 표준기 탓에 제때 이루어져야 할 흉관 삽관이 늦어져 버렸다.

내가 흉관 세트를 준비하라고 윽박을 질러 댔기에 망정이지…….

삽관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하태곤은 수술은커녕 수술방에 들어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전에 사망했을 테니까.

백경민은 당연하게도 내 편을 들었다.

표준기가 근무인 날은 응급실에서 크고 작은 사건이 항상 터진다고도 말했다.

표준기는 모두까기 인형처럼 보였다.

문득 나는 궁금해졌다.

그가 주변 사람들이 본인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아는 데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전자라면 표준기는 눈치가 없는 인간일 테고, 후자라면 뻔뻔한 인간이 될 것이다.

어쨌거나 모처럼 만난 고문관에 나는 치를 떨었다.

단물이 다 빠지도록 표준기를 씹은 뒤 화제는 백경민의 신수술로 옮겨졌다.

백경민은 착실하게 3D 프린터 기술을 가진 업체를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본인 조건에 맞는 업체를 찾는 게 하늘의 별 따기라고 했다.

그럴 만했다.

3D 프린터와 의료 기술을 융합하는 시대는 앞으로 5년에서 10년 뒤에야 태동할 테니까.

미녀와 미남도 괴롭고, 선구자도 괴로운 법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 나는 백경민과 헤어졌다. 자동차를 타고 강진수와 부대로 복귀했다.

자정을 넘긴 시각, 산골 도로는 고즈넉했다.

하늘에 걸린 보름달 빛은 따뜻하고 포근했으며 간간이 들리는 귀뚜라미 울음은 정겹고 운치가 있었다.

나는 아름다운 밤 풍경을 오롯이 즐겼다.

병원으로 가던 길은 추격전을 방불케 할 만큼 아찔했지만 돌아오는 길은 나들이에 나서는 것만큼 여유로웠다.

분명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길을 달리고 있는데 말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갈대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다.」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구절이 마음속에서 되살아났다. 무채색이었던 구절은 이제 생생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나는 내 마음이 조금이나마 성장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지대장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쉬는 날인데도 부대에 발 벗고 와 주시고 말입니다.”

“그게 내가 할 일이니까. 너야말로 고생 많았다. 생활관에서 쉬고 싶었을 텐데…….”

“아닙니다. 지대장님 덕분에 인생 순댓국도 먹어 봤고, 드라이브도 하고 좋았습니다.”

강진수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차가 신호에 멈췄다.

나는 오다가 주웠다는 느낌으로 강진수에게 종이 쪼가리 하나를 내밀었다.

3박 4일 포상 휴가증이었다.

대대장의 기립성 저혈압을 진단해 주고받은 것이었다.

포상 휴가증을 받고서 강진수는 아이처럼 기뻐했다.

인생 순댓국도, 한밤의 드라이브도 결국 포상 휴가증에는 비교할 바가 못 되는 것이었다.

* * *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잘도 흘러갔으므로 그것은 행복한 시절임이 분명했다. 불행은 시간을 하염없이 더디게 만드니까.

내 일상은 단조로웠다.

평일에는 부대에 있었고, 주말에는 집에 있었다.

부대에 있을 때는 의무대를 찾는 병사들을 치료하고, 때때로 초소 회진을 나갔다.

나머지 시간에는 에세이를 집필하는 데 주력했다.

글쓰기도 결국 손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일까. 손재주가 좋은 나는 더 많은 분량을 더 빨리 쓸 수 있게 되었다.

몸에 근육이 붙듯 글에도 근육이 붙은 것이다.

주말의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가족들과 단란하게 보냈다.

아버지와는 글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눴으며 사랑이와 PC 게임을 즐겼고, 어머니가 장 보는 데 따라 나가기도 했다.

그렇게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은 소소하면서도 소중했다.

이 시간들이 먼 훗날 내가 힘들 때 나를 일으켜 세울 버팀목이 될 것임은 분명해 보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계절도 바뀌었다.

초록으로 싱그러웠던 GOP 부대의 산자락은 이제 울긋불긋한 빛깔로 물들기 시작했다.

산이 옷을 갈아입으면서 사람들도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옷은 전보다 길어졌으며 전보다 더 많은 속살을 가렸다.

가을이 무르익어 가는 어느 주말.

나는 뜻밖의 문자 한 통을 받았다.

-선배는 살아는 있어요? 살아 있으면 대답하라, 오버.

장난기 넘치는 문자의 주인공은 유지은이었다.

* * *

토요일 오후 신촌은 생기가 넘쳤다.

도로 옆으로 늘어선 가게들은 행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너도나도 크게 음악을 틀어 놓았다.

거리에는 커플과 무리를 지은 청년들이 가득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꺄르르 웃고 재잘재잘 떠들기 바빴다.

모처럼 찾은 번화가의 활기찬 분위기가 나는 어색하고 낯설었다.

그래서 지하철 4번 출구 앞에서 전봇대처럼 멀뚱멀뚱 서 있었다.

그런 내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지은이었다.

“선배, 왜 이렇게 어색하게 서 있어요? 허수아비인 줄 알았잖아요.”

지은이가 꺄르르 웃었다.

“이런 분위기는 도무지 적응이 안 돼. 차라리 병원이 나을지도?”

“바깥에 나와서도 병원 타령하는 거예요? 선배도 진짜 징글징글하네요.”

나를 타박하는 지은이를 나는 빤히 쳐다보았다.

병원 밖에서 지은이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전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지은이는 가을바람에 나풀거리는, 단정하면서도 차분한 느낌을 풍기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늘 의사 가운만 입을 모습을 보다가 원피스를 입은 모습을 보니 어쩐지 지은이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옷 잘 어울리네. 특히 색이 너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와, 선배가 그런 입에 발린 소리도 할 줄 알아요?”

“좋은 소리를 하면 좋게 들어 주면 안 되겠니?”

나는 농담을 던지고 지은이가 입은 원피스의 옷 색깔을 물었다.

지은이는 아이보리색이라고 했다.

내가 아이보리가 무슨 색이냐고 되물으니 지은이는 다시 상아색이라고 답했다.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색이 많구나.

내가 모르는 색이 바로 내가 모르는 세상이겠지.

에세이를 열심히 쓰고 있기 때문일까, 감상적인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대화를 나누며 가까운 극장으로 이동했다.

어제 받은 문자에서 지은이는 아는 사람에게 영화 티켓 두 장을 받았다고 했다.

시간 맞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함께 영화를 봐 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지금 시절이 아니면 극장에서 영화를 볼 일은 없을 것 같아서 그랬다.

극장으로 향하는 동안 지은이는 나를 물고 뜯기 바빴다.

옷은 왜 그렇게 이상하게 입고 왔냐.

사람이 어쩜 그렇게 연락을 안 하느냐 등등.

지은이에게 이리저리 물어뜯기느라 살점이 남아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게도 억울한 부분은 있었다.

특히 연락에 관한 부분에서는.

나는 2개월에 한 번씩은 서울 본원에도, 용인 의국에도 연락을 했다. 동료들과 선배, 후배들의 안부를 묻고 의국이 돌아가는 분위기도 물었다.

다행히 양쪽 흉부외과 모두 평화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것이 폭풍전야 같아서 오히려 더 두렵기도 했지만.

연락에 관한 부분에서 내가 항변하자 지은이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의국에 연락한 거지, 저한테 연락을 한 건 아니잖아요?”

“어쨌거나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라도 네 이야기를 들었으면 되는 거 아닌가?”

“당연히 안 되죠. 선배랑 제 우애가 그 정도밖에 안 됐다니 실망이네요.”

나는 삐진 지은이를 달래느라 퍽 애를 먹었다.

뭐랄까, 사석에서 만난 지은이는 좀 더 감성적이었다.

예민하고 날카롭고 독설을 내뿜는 병원에서의 지은이와는 다른 면모를 보였다.

나는 전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지은이의 반쪽만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지은아, 그거 아니?”

“뭐가요?”

“내가 임관하고 사석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너야. 네가 그만큼 소중하다는 뜻이지.”

나는 혓바닥에 버터를 바르고 말했다.

입 속이 느글거리긴 했지만 효과는 의외로 좋았다.

지은이가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었기 때문이다.

“설마 둘러대는 건 아니겠죠?”

“천하의 유지은 앞에서 거짓말하면 큰일 나지. 정 못 믿겠으면 메신저 다 뒤져 봐도 돼.”

내가 휴대폰을 내밀자 지은이가 됐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기분이 좋아진 지은이와 극장에 입장했다.

영화는 흔하디흔한 청춘 로맨스 영화였다.

같은 학과를 다니는 한 쌍의 남녀가 사랑하고 오해하고 결국 헤어진다는, 다소 슬픈 결말을 가진 영화였다.

영화 감상을 마치고 찾은 레스토랑에서 나와 지은이는 때아닌 난상 토론을 벌였다.

나는 남자 주인공 편을 들었고, 지은이는 여자 주인공 편을 들었다.

“난 여자 주인공이 어장 관리하는 것처럼 느껴지던데? 결정적으로 여자 주인공이 술에 취해서 남자 선배 집에 들어가잖아. 거기서 끝난 거 아닌가?”

“끝나긴 뭐가 끝나요. 그냥 잠만 자고 나왔을 수도 있죠.”

지은이가 발끈해서 말을 이었다.

“애초에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 좋아하는 티를 얼마나 냈는데요.”

“…….”

“그걸 바보처럼 몰랐던 것도 문제고, 그 장면을 보고 있었으면 본인이 직접 가서 말렸어야죠. 최소한 다음 날 선배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자 주인공에게 물어보던가.”

“그 상황에서 나서는 건 말도 안 되고, 그날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본다고 해서 제대로 된 답을 들을 수 있을까?”

나는 지은이와 달리 차분하게 말을 계속했다.

“술에 취했다고 한들 호감이 없는 이성의 집에서 잠을 자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봐. 여자 주인공이 남자 선배에게 정말 호감이 없었다면 택시를 타고 집에 갔어야지.”

“그게 아니라니까요. 그랬으면 여자 주인공이 그날 이후로 선배랑 사귀고 주인공을 모른 척했겠죠.”

“…….”

“근데 그게 아니었잖아요. 똑같이 살갑게 굴었잖아요.”

나와 지은이의 의견은 평행선을 달렸으므로 어느 쪽으로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의견 차이는 좁히지 못했다만 나는 지은이와 영화 토론을 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병원에서는 늘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로 싸워 왔거늘…….

남녀 간의 애정 문제와 심리를 분석하며 싸우는 문제는 내게 퍽 흥미로웠다.

“선배도 바보고, 남자 주인공도 바보예요.”

지은이가 입술을 뾰족 내밀며 한 말로 영화 이야기는 끝이 났다.

우리는 식사를 하며 평범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중간에 지은이가 잠시 자리를 비웠고, 나도 혼자 테이블을 지키다가 화장실로 이동했다.

“제가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화장실 근처에서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던, 지은이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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