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205화 (205/257)
  • 205화 제1장 푸른 거탑(5)

    “선생님, 응급실에 환자 왔어요.”

    간호사의 콜을 받은 순간부터 표준기는 살짝 심통이 나 있었다.

    그는 휴대폰 게임을 하는 중이었는데, 장비를 맞추고 막 던전에 입장하려고 하던 찰나였다.

    재미있게 플레이하던 게임의 맥이 끊기니 허탈했다.

    그 맥을 끊은 환자에게 짜증도 났다.

    표준기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당직실을 나와 응급실로 향했다.

    환자 같은 건 후딱 해치우고 빨리 게임이나 다시 해야지.

    접수된 환자의 이름은 하태곤이었으며 군의관 한 명과 의무병 한 명이 환자 곁에 있었다.

    “어디가 아파서 왔어요?”

    질문을 던지며 표준기는 병사의 상태를 살폈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병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병사는 한 손을 가슴에 얹은 채 숨을 헐떡이는 중이었다.

    딱히 외상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공황 발작 같은 걸로 내원한 게 아닐까 싶었다.

    “이 친구, 벤치 프레스 봉에 가슴을 찍혔어요. 갈비뼈 골절로 인한 혈흉이 의심되니까 흉관 삽관부터 해 주시죠.”

    “이봐요, 너무 멀리 나간 거 아닙니까?”

    표준기의 말투는 곱지 않았다.

    아니, 고울래야 고울 수가 없었다.

    지가 뭔데 응급실에서 와서 응급의학과에서 이래라저래라 지시를 한단 말인가.

    “단순 갈비뼈 골절이면 이 친구가 이렇게 고통스러워하겠습니까? 그리고 이송 전에 청진기로 청음했습니다. 심음과 폐음 모두 감소된 상태였어요.”

    “갈비뼈 골절은 원래 통증이 심한 골절이에요. 통증은 근거가 되지 못해요. 청음이라면 나도 해 보죠.”

    표준기는 쌀쌀맞게 대답하고 청진기로 병사의 폐음과 심음을 들었다.

    아무래도 군의관이 과장을 한 것 같았다.

    표준기의 기준으로는 폐음과 심음의 감소된 정도가 그리 심하지 않았다.

    하여간 다들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아픈 줄 안다니까.

    별것도 아닌 걸로 호들갑을 떨고 앉았네.

    표준기는 속으로 병사와 군의관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는 군의관과 달리 병사를 단순 갈비뼈 골절 정도로 보고 있었다.

    “일단 흉부 엑스레이 찍어 보고 판단할게요. 그게 가장 정확하니까.”

    “그럴 시간 없다고요. 당장 흉관 삽관을 해야 한다니까요!”

    군의관이 인상 쓰며 언성을 높였다.

    적반하장이 따로 없었다.

    “답답하시네. 그쪽이 말이 맞는지 내 말이 맞는지 확인하려면 검사를 해야 할 거 아닙니까?”

    “아니, 청음했다면서요. 폐음하고 심음 감소한 거 확인 못했어요?”

    “내 귀엔 정상으로 들렸어요.”

    군의관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표준기는 흉부 엑스레이를 고집했다.

    제대로 된 검사 하나 없이 흉관 삽관을 한다?

    그건 너무 겁 없고 경솔한 행동이었다.

    “혈흉의 임상 증상이 뚜렷하면 검사 생략하고 삽관부터 할 수 있어요.”

    “내가 보기에는 뚜렷하지 않아서 그럽니다.”

    “하… 흉부외과의 전문의인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겁니까?”

    군의관이 흉부외과의라는 사실에 표준기는 살짝 움찔했다.

    아무래도 이쪽 분야에 전문가일 테니까.

    그렇다고 마냥 기가 죽을 표준기는 아니었다. 이곳은 그의 근무지였고, 군의관은 병사의 보호자에 불과했다.

    “본인이 진료 볼 때는 본인 맘대로 해도 되는데 여기서는 제 말을 따라 주시죠.”

    “미치겠네, 진짜. 그럼 타협하시죠. 그쪽 말대로 흉부 촬영할게요. 대신 흉관 삽관 세트 미리 준비해 주시고요. 응급 상황이면 삽관은 내가 직접 하겠습니다.”

    동의한다는 의미로 표준기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엑스레이 촬영만 한다면 그 뒤로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표준기는 검사실로 향하는 군의관과 병사를 지켜보며 곁에 있던 간호사에게 말을 걸었다.

    “아주 대단한~ 열혈 닥터 나셨네. 안 그래요?”

    “저 사람, 열혈 닥터 맞아요.”

    “김 선생님, 저 군의관 알아요?”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하죠. 얼마 전에 흉부 총상 환자 응급실에 왔잖아요. 다들 수술 못해서 쩔쩔매고 있을 때 수술한 분이 저분이에요. 이름이 이믿음이었던가?”

    김윤정 간호사가 핀잔을 주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선생님은 제발 병원 돌아가는 일에 관심 좀 가지세요. 맨날 휴대폰 게임만 하지 말고.”

    “소소하게 스트레스 푸는 것도 죄예요?”

    “제대로 근무하는 시간보다 스트레스 푸는 시간이 더 많으니까 하는 소리잖아요.”

    “으… 잔소리. 김 선생님을 시어머니로 모실 며느리는 끔찍하겠어요.”

    “선생님, 인신공격하면 저도 가만히 안 있어요.”

    “미안해요. 진심은 아니었으니까 봐줘요. 아, 참 흉관 삽관 세트 미리 준비해 주시고요.”

    표준기는 설렁설렁 사과하며 이믿음을 기다렸다.

    이믿음이 그 이믿음인지는 몰랐지만 그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은 뉴스를 통해 들었다.

    군 병원 소속이 아님에도 응급 수술에 들어간 용감한 의사.

    고난이도 총상 수술을 소화한 능력 있는 흉부외과 의사.

    이믿음의 정체를 알고 나니 어쩐지 개운치 않은 기분이었다.

    기 싸움을 벌일 상대를 잘못 찾은 느낌이랄까.

    에이, 설마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항상 맞기만 하겠어.

    실수하거나 틀릴 때도 있는 거지.

    혈흉은 아닐 거야.

    벤치 프레스로 갈비뼈 골절이 발생하고 혈흉까지 터졌으면 환자는 벌써 의식이 없어야지.

    표준기가 자신의 판단을 정당화하는 사이 응급실 문이 열렸다.

    나갈 때는 제 발로 나갔던 병사가 올 때는 의식을 잃은 채 이믿음과 의무병에게 부축을 받으며 돌아왔다.

    순간 덜컥 내려앉는 표준기의 심장.

    표준기가 가장 우려했던 미래가 기어이 펼쳐졌던 것이다.

    “이제 좀 속이 시원해?”

    이믿음이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반말을 내뱉었다. 그 기세가 워낙 매서워서 표준기는 뭐라 반박을 할 생각도 못했다.

    “당신은 그 잘난 엑스레이 영상이나 보고 있어.”

    * * *

    결국 걱정했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엑스레이 촬영 후 혈흉이 악화되면서 하태곤은 의식을 잃었다.

    순간 나는 표준기의 면상을 한 대 치고 싶은 욕심을 간신히 억눌러야 했다.

    백번 양보해서 진단에 오류가 있을 수는 있다.

    의사도 사람이고 사람이 하는 일은 완벽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내가 흉부외과 전문의라고 밝혔으면, 혈흉이 의심되는 증거를 내놨으면 그걸 받아들일 줄 아는 자세는 되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근데 왜 질환이 아닌 나와 자존심 싸움을 해서 하태곤의 병을 키우냐는 말이다.

    하태곤을 부축해 응급실로 돌아간 후 나는 표준기를 호되게 꾸짖었다.

    그리고 하태곤을 침상에 눕힌 후 급하게 흉관 삽관에 들어갔다.

    전생과 이번 생의 인턴과 레지던트 수련 기간 동안 숱하게 했던 처치라 어려울 것은 없었다.

    내 손은 심장 수술을 할 때처럼 신속하고 정확했다.

    삽관은 단 3분 만에 뚝딱 종료되었다.

    콸. 콸. 콸.

    새빨간 혈액이 흉관을 타고 배액통으로 떨어졌다.

    저 무지막지한 양의 피들이 폐와 심장을 압박하고 있었으니 하태곤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저 인간, 원래 저렇게 엉터리인가요?”

    한숨을 돌린 나는 삽관을 돕던 간호사에게 넌지시 물었다.

    표준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도 마세요. 병원에서 소문난 게으름뱅이에요. 일할 때나 쉴 때나 휴대폰 게임만 한다니까요. 아주 한심한 인간이라 간호사들은 표 선생님을 몰래몰래 한심이라고 불러요.”

    “미꾸라지 한 마리 때문에 고생이 많으시네요.”

    나는 진심으로 간호사를 위로했다.

    표준기를 오늘 처음 만난 나조차 표준기가 질리는데 매일 상대하는 사람들은 오죽 답답할까 싶었다.

    의사 중에는 저런 인간이 어떻게 의사가 됐을까.

    저런 애는 의사를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드는 의사가 있는데 표준기가 바로 그런 부류였다.

    “지대장님, 이제 하 병장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묵묵히 나를 돕던 강진수가 물었다.

    흉관 삽관을 처음 목격해서 놀랐는지 강진수의 낯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두 눈은 피가 쏟아지는 배액통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검사를 좀 더 해 봐야 할 것 같다. 최악의 경우 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르고.”

    “수술씩이나 말입니까?”

    “삽관을 했는데도 활력 징후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어. 배출되는 혈액량도 예상보다 많고.”

    설명을 하는 내 얼굴은 아직 완전히 펴지지 않았다.

    하태곤에게는 혈흉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흉부외과의로서의 본능은 내게 그런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하 병장을 보니까 저는 평생 벤치 프레스는 못할 것 같습니다.”

    “너무 겁먹을 필요 없어. 사람의 몸은 생각보다 약하지만 생각보다 강하기도 하니까.”

    겁먹은 강진수를 위로하고 나는 침상을 벗어나 스테이션 쪽으로 이동했다.

    표준기는 그때까지도 흉부 엑스레이를 보고 있었다.

    그 꼴은 흡사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것처럼 초라해 보였다.

    “이봐요.”

    “아, 네. 선생님.”

    내 부름에 표준기가 나를 쳐다보았다. 흉관 삽관하기 전만 해도 병원장처럼 거만하게 굴었던 그는 이제는 인턴처럼 고분고분해졌다.

    “언제까지 멍 때리고 있을 겁니까? 환자 관리 안 해요?”

    “해… 해야죠.”

    “심전도와 심초음파, 조영제, 흉부 CT, ABGA 검사 응급으로 내고 당직 흉부외과의도 내려오라고 해요.”

    “알겠습니다.”

    나는 표준기가 목에 걸고 있는 청진기를 툭툭 건드리며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말을 꺼냈다.

    “의사면 제발 청진하는 연습 좀 합시다. 그쪽이 청진을 제대로 했으면 흉부 촬영 전에 흉관 삽관할 수 있었잖아요. 환자도 의식을 잃을 필요 없었고.”

    “그래도 청진보다는 검사가 더 정확하지 않나요?”

    표준기의 한심한 발언에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참나. 이 사람,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렸네. 됐습니다. 못 들은 걸로 해요.”

    나는 백기 투항을 하고 침상으로 돌아왔다.

    이 정도 말귀도 못 알아듣는다면 대화를 이어 갈 가치가 없었다.

    얼마 후 응급실로 내려온 흉부외과의는 아는 얼굴이었다.

    총상 환자를 수술할 때 나를 도왔던 레지던트였다.

    이름은 공찬우였고, 귀여운 외모에 눈 밑에 점이 있어서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 환자, 수술해야 합니다.”

    공찬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각종 검사 결과 부러진 갈비뼈가 심장막을 찢어 파열시켰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어쩐지 흉관 삽관을 하고서도 혈압이 당최 떨어지지를 않더니…….

    “이 시간에 수술할 사람이 있나요?”

    나는 걱정하는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태극 병원 흉부외과의 환경은 여러모로 열악했다.

    외래 진료를 보는 교수는 세 명뿐이었고, 수술이 가능한 전문의는 교수 포함 다섯 명이었다.

    병사들이 태극 병원 흉부외과보다 민간 흉부외과를 선호해서 벌어진 현상이었다.

    물론 내가 병사라도 군 흉부외과보다는 민간 흉부외과를 택하겠지만.

    “안 그래도 백 선생님한테 연락드렸어요. 오고 계신대요.”

    “그럼 안심이네요.”

    나는 몸에 주고 있던 힘을 풀었다.

    여차하면 총상 환자 때처럼 직접 수술을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백경민이라면 믿고 환자를 맡길 수 있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건 든든한 일이었다.

    시간은 흘러 하태곤이 수술실에 들어갔고, 나와 강진수는 보호자 대기실을 지켰다.

    대기실 신세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전생의 아버지가 OPCAB을 받았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대기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통스러운 기다림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새삼 깨달았다.

    외과의로서 내가 수술방에서 고군분투하는 것보다 보호자로서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것이 몇 배는 더 힘들다는 사실을.

    외과의는 뭐라도 해 볼 수 있지만 보호자는 하염없이, 또 무기력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수술할 때는 번개처럼 지나가던 시간이 대기할 때는 달팽이처럼 느리기만 했다.

    1시간은 지난 줄 알았는데 막상 시계를 보면 5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수술실과 대기실의 시차는 내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중력보다 무거운 시차에도 결국 끝은 있었다.

    지이이잉.

    수술방 문이 열리고 백경민과 어시스트들이 대기실로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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