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195화 (195/257)

195화 제4장 군의관(5)

아버지의 에세이를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메모하다 보니 시간을 훌쩍 도둑맞았다.

시계를 보니 부대로 복귀해야 할 오후 4시가 가까웠다.

나는 앉았던 자리를 정리하고 카페를 떠났다.

아버지의 글을 진작 읽어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아버지의 글을 좀 더 일찍 읽었다면 마음 수련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

주변 동료와 환자·보호자에게 더 따뜻한 말을 건넬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굳이 자책하지 말자.

지금이라도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나는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고 1층 로비 쪽으로 이동했다.

의무병 강진수와 운전병 김대호가 안내소 근처에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니?”

“아… 지대장님 오셨습니까? 그냥 게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템 파밍이 엄청 잘됐습니다. 심지어 강화도 성공했습니다.”

강진수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게임이 그렇게 재미있어?”

“남자들은 보통 다 좋아하지 않습니까? 지대장님은 하시는 게임 없습니까?”

“나는 딱히 없는데?”

“전에 있던 지대장님은 게임 엄청 좋아하셨습니다. 근무 중에서도 하셨고.”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회귀한 후로 참 여유 없는 빡빡한 삶을 살았구나 싶었다.

최고의 흉부외과가 되겠다는 목표를 위해 삶의 다양한 즐거움들을 희생시켰으니까.

[노트는 비어 있기 때문에 쓸모가 있습니다. 비어 있기에 그 안에 무언가를 적을 수 있습니다.]

.

.

.

[그러므로 여유와 공백을 사랑하세요. 그 빈자리가 당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듭니다.]

문득 방금 전까지 읽었던 에세이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목표에 매진하더라도 내 스스로 편히 숨 쉴 구멍 정도 만들어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할 일이 없어 심심하던 찰나에 서점을 발견했고.

서점에서 아버지의 에세이를 읽으며 의학 에세이를 써 보자는, 평소의 나라면 결코 할 수 없었던 발상을 발견하지 않았던가.

“다음 주에는 나도 같이 게임 하자. 진수 네가 그렇게 웃는 걸 보면 꽤 재미있을 것 같네.”

“저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습니다. 지대장님이 하신다면 제가 책임지고 쩔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하는 게임 이름은 뭔데?”

“던전의 싸움꾼들입니다. 저는 거너인데…….”

게임이 다시 화제로 오르자 강진수의 말이 빨라졌다. 흥분해서 언성이 살짝 올라가기도 했다.

이거, 나중에 프로 게이머라는 직업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려 줘야 하나.

게임을 정말 좋아하고 잘한다면 직업으로 삼아 보라고 권유해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던 찰나 방송이 들려왔다.

-국군 태극병원 상황실에서 알려 드립니다. 병원 내부에 외진을 나온 흉부외과 군의관님이 계신다면 응급실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

-다시 한번 알려 드립니다. 병원 내부에 외진을 나온 흉부외과 군의관님이…….

방송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응급실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사건이 터졌음을.

“진수야, 응급실로 가자.”

“정말 응급실 가실 겁니까? 괜히 갔다가 지대장님만 피곤해지실 수도 있습니다.”

강진수는 내 결정이 못 미더운지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내가 피곤하면 다른 누군가는 편해지겠지. 잔말 말고 따라와.”

“알겠습니다.”

나는 헐레벌떡 응급실로 달려갔다.

스테이션에서 근무 중인 간호사에게 방송을 듣고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잠시 후 내 앞에 두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명은 나와 같은 대대 군의관이었는데, 군복 상의에 얼룩덜룩 피가 묻어 있었다.

다른 한 명은 의사 가운을 걸친 국군 병원 의사였다.

나와 마주한 두 사람의 표정이 비장했기에 나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어쩌면 내가 예상하고 있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터졌을지도…….

“선생님, 시간이 없어서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실례를 이해해 주세요.”

“얼마든지요.”

“혹시 총상 환자 수술 가능하신가요?”

군의관이 다짜고짜 물었다.

순간 총상이라는 단어가 귓가에서 웽웽 울려 댔다.

더불어 다급했던 방송과 군의관 상의에 묻은 혈흔이 단박에 이해가 갔다.

“흉부 총상 환자가 있어요? 어디요?”

“이쪽으로.”

군의관과 국군 병원 의사를 따라 나는 응급실 침상으로 이동했다.

환자는 가슴에 붕대를 칭칭 두르고 있었는데, 붕대는 이미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혈흉 소견이 있는지 흉관 삽관은 이미 되어 있는 상태였다.

다만 의식이 없는 것을 보면 상태가 위중했다.

내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환자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군의관이 짧게 노티를 했다.

병사가 GOP 초소 근무 중 제 가슴에 총을 세 발이나 쐈다.

간단한 응급 처치와 약물 투약은 끝냈지만 바이탈 사인이 불안정해서 긴급 수술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만약 선생님께서 수술이 가능하다면 염치 불고하고 이 친구의 수술을 부탁드리겠습니다.”

“…….”

“아니라면 바로 민간 병원으로 이송하고요.”

담담한 말투와 달리 군의관의 눈빛은 간절했다.

제발 이 아이를 살려 달라고 내게 애원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일말의 주저도 없이 ‘예’라고 대답했겠지만 오늘만큼은 쉽게 ‘예’라는 대답이 떨어지지 않았다.

전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나는 총상 환자를 수술해 본 적이 없었다.

총상 환자 케이스가 워낙 드물어서였다.

괜히 내가 메스를 잡았다가 환자를 죽게 만든다면 그것보다 끔찍한 일이 또 있을까.

“민간 병원으로 이송하는 데 시간은 얼마나 걸리나요?”

“짧게 잡아도 2시간은 걸립니다.”

군의관의 대답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총상 환자가 엠뷸런스에서 2시간이나 버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병원에 도착할 때쯤 병사는 사망했을 테고, 응급실에 잠깐 머물렀다가 차가운 영안실로 직행하게 될 것이다.

상상의 나래가 그쯤 뻗어 나가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헬기를 타도 2시간이나 걸리나요? 그렇지는 않을 것 같은데…….”

“하필이면 오늘이 헬기 점검하는 날이라서요. 엠뷸런스 이송만 가능합니다.”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국군 병원 의사가 대답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

나는 창백한 얼굴의 병사를 내려다보다가 결심을 굳혔다.

잠시 망설였다만, 응급실에 달려왔을 때부터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친구, 제가 수술하겠습니다.”

* * *

“선생님, 깊게 생각 잘하셔야 합니다. 만약 문제가 생겨도 저희가 어떻게 커버를 쳐 드릴 수가 없어요.”

국군 병원 응급의학의이자 상황 장교인 신용우가 타이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그는 이믿음의 용기를 높게 사기는 했다.

국군 병원 소속도 아닌 일반 군의관이 발 벗고 나서서 수술을 결심했다?

어지간한 정의감과 희생정신이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수술 결과를 오롯이 책임져야 할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이믿음이었다.

왜냐고?

그 누구도 이믿음에게 수술하라고 등을 떠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병사가 수술 중에 사망할 경우 세상은 가혹할 정도로 이믿음에게 손가락질할 것이다.

아무리 상황이 급해도 응급 후송을 하는 편이 낫지 않았느냐.

국군 병원 소속 의사도 아닌 군의관이 왜 월권행위를 했느냐 등등.

사람들은 이믿음을 비난하기 바쁠 테고, 결국 이믿음은 병사의 죽음에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만약 신용우가 이믿음의 입장이라면?

그는 수술을 할 능력이 되더라도 수술을 하지 않았으리라.

얻는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은, 명백하게 손해 보는 행동이었기에.

“이미 결정한 일입니다. 제가 수술할게요.”

이믿음이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솔직히 후송을 보내겠다는 건 천천히 죽으라는 소리밖에 안 된다는 거, 두 분 다 아시잖아요?”

이믿음의 지적에 신용우와 손형운이 동시에 고개를 떨어트렸다.

두 사람 다 이믿음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뿐이었다.

사실상 환자의 생사여탈권을 이믿음에게 떠넘긴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죄송합니다.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두 분이 죄송할 일은 아닙니다. 한 사람의 목숨을 책임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검사는 어디까지 진행했죠?”

“간단하게 피 검사와 흉부 엑스레이 정도만 했습니다.”

“흉부 CT와 심초음파 검사 추가로 해 주시고, 끝나는 대로 환자 수술실로 올려 보내 주세요.”

“알겠습니다. 박 선생님, 이 선생님하고 동행하면서 도와드려요.”

“네, 선생님.”

상황 정리가 끝난 후 이믿음은 곁에 서 있던 강진수에게 먼저 대대로 복귀하라고 일렀다.

강진수는 알겠다고 대답하면서도 불안한 눈치였다.

말도 안 되는 응급 수술을 덜컥 맡아 버렸으니…….

“수술하는 건 나인데 어째 네가 더 초조해 보인다?”

“지대장님, 지금이라도 거절하시면 안 됩니까? 군대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가는 곳입니다.”

“…….”

“이러다가 지대장님이 독박을 쓰실 수도 있습니다.”

강진수의 다급한 조언에 이믿음은 미소로 화답했다.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나니 속은 오히려 후련했다.

비록 총상 수술은 소화한 적이 없다만, 회귀 전후로 쌓은 지식과 경험을 잘 살린다면 병사를 살려 낼 수 있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수술하기 좋은 환자.

성공 확률이 높은 수술만 하는 외과의가 과연 참 외과의라고 할 수 있는지를.

곧 펼쳐질 총상 환자 수술은 자신의 그릇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믿음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더더욱 물러설 수 없었다.

“진수야.”

“네, 지대장님.”

“의사가 가만히 있으면 환자는 죽는단다. 누군가는 움직여야 해. 이번에는 그게 내가 됐을 뿐이야.”

이믿음은 강진수를 다독여 돌려보내고 환자의 흉부 엑스레이부터 살폈다.

불행이라고 해야 할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총알들은 병사가 즉사할 만한 장기와 주요 혈관들은 모두 비껴 나갔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방심할 수 없었던 건 두 발의 총알이 각각 흉벽과 우심실 부근에 박혀 있다는 점이었다.

수술을 통한 총탄 제거가 급선무로 보였다.

총알이 지나간 자리의 찢어진 부위들을 꿰매고 터진 미세 혈관을 복원하는 일도 중요했고.

“박 선생님이라고 하셨죠?”

이믿음은 곁에 있던 의사를 쳐다보았다.

그가 걸친 가운 가슴 부근에 박재진이라는 이름이 오버로크 되어 있었다.

“아, 네.”

“수술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수술방 잡아 놓고 마취과 전화해서 마취의도 섭외했어요. 순환 간호사가 수술방에서 수술 준비 중일 겁니다.”

“그럼 곧바로 수술실로 가시죠. 앞장서세요.”

“알겠습니다.”

이믿음은 박재진을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 수술실을 찾았다.

때마침 CT와 초음파 검사 결과가 나왔기에 검사 결과를 확인하고 스크럽(수술 전 소독)에 나섰다.

벅. 벅. 벅.

처음에는 전생에 경험하지 못했던 사건을 접하고 크게 당황했지만 지금의 이믿음은 마음이 완벽하게 가라앉은 상태였다.

어쩌면 그가 회귀한 것은 이런 예상치 못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함일지도 몰랐다.

“선생님, 제가 더 이상 해 드릴 수 있는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수술방으로 들어가기 전 박재진이 따뜻한 응원을 건넸다.

이믿음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수술방 안으로 들어갔다.

지이이잉.

수술방에 입장해 콧속으로 파고드는 소독약 냄새를 맡은 순간.

이믿음은 온몸의 감각이 날카롭고 예민해지는 것을 느꼈다.

모처럼 경험하는 무아경이었다.

본인이 가진 능력을 100퍼센트 발휘하게 해 주는 신묘한 경지 말이다.

수술이 시작 전부터 잘 풀린다고 이믿음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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