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제4장 군의관(3)
지은이의 질문은 의외로 나를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파견 생활에 정이 들었을까.
나중에 복귀한다면 용인에서 교수 생활을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서울 본원은 펠로우와 교수들이 승진을 위해 치열한 전쟁을 펼치는 곳이었다.
환자 말고도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에 비해서 용인은 치료에만 집중하면 됐다.
외상 응급 환자가 수시로 들이닥친다는 단점이 존재하지만 내부에서 서로에게 총질할 필요는 없었다.
무엇보다 용인에는 지은이가 있었다.
회귀를 못해서 그렇지 나만큼의 재능을 가진 아이.
내가 유일하게 믿고 기댈 수 있는 아이.
지은이와 함께라면 앞으로 닥칠 역경과 고난을 잘 이겨 낼 수 있으리라.
“뭐예요? 이게 고민할 거리예요?”
지은이가 토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서울로 복귀하면 저처럼 예쁘고 참한 후배는 다시 못 본다고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확실히 그건 많이 아쉽긴 해.”
내가 비행기를 태워 주자 지은이는 금세 화를 풀었다. 이 시절의 지은이는 생각보다 단순한 구석이 있었다.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서울이냐, 아니면 용인이냐.
짧지만 깊었던 고뇌와 갈등을 끝내고 내가 입을 열었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자. 거의 6년 뒤에 벌어질 일인데.”
나는 일단 한걸음 물러났다.
차후 내 행선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칠 요소는 누가 뭐래도 강태섭이이었다.
불구대천이자 철천지원수.
나를 사냥개로 쓰고 용도가 다하자 내팽개친, 비정한 남자.
미래의 나는 강태섭이 있는 곳으로 가야만 했다.
그에게 전생의 원한을 화끈하게 되갚아야만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
“치사해. 이럴 때만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고.”
“어쭈, 유지은 많이 컸다. 치프를 치사한 놈에 미꾸라지 취급이나 하고.”
“치프가 언제 적 치프예요. 선배는 이제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요. 내일 퇴사를 앞둔.”
“와. 냉정한 거 봐라. 얼음 여왕이 따로 없네?”
우리는 농담조로 한마디씩 주고받다가 동시에 미소를 띠었다.
개그맨들이 만담을 하듯 대화를 주고받다가 피식 웃어 버리는 일.
이 일은 나와 지은이 사이에 유독 잦았다.
하긴, 전생에서부터 나와 지은이는 통하는 게 있었지.
다만 전생의 나는 요령과 눈치가 없었고, 지은이는 요령과 눈치가 있어서 서로의 결말이 정반대였지만.
전생의 내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말이다.
강태섭 문제로 나와 의절했던 지은이는 내 장례식장에 왔을까.
문득 그 사실이 궁금해졌다.
“근데요, 선배. 앞으로 시간 여유 많잖아요. 연애 같은 거 할 생각은 없어요?”
지은이가 갑자기 연애 문제로 화제를 돌렸다.
“갑자기 내 연애는 왜 물어?”
“아니… 뭐… 그냥 궁금해서요. 선배가 연애를 한다면 뭐… 앞으로가 제일 좋을 것 같아서요.”
지은이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버벅거리며 말했다.
병원 옥상 조명 때문에 눈이 부셔서 그런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자리를 옮겨서 조명을 등진 채 말을 이었다.
“연애를 한다면 네 말대로 지금쯤이 좋겠지. 그런데 딱히 생각은 없어.”
“왜요? 주변에 마음이 드는 사람이 없어서요?”
“그것보다는 연애가 무섭다고 해야 할까?”
“제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제 귀 이상한 것도 아니죠? 연애가 무섭다고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 지은이를 향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서도 그렇고.
이번 생에서도 그렇고 나는 의술을 완성하기 위해 내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 있었다.
만약 연애를 한다면 그 경건한 마음에 금이 가지 않을까.
의술을 갈고닦아야 할 시간에 연애를 하면 실력이 퇴보하지 않을까 등등.
내 삶에 다른 사람이 겹쳐졌을 때 변할, 나와 내 마음가짐이 나는 두려웠다.
“에이, 그건 말도 안 돼요. 선배는 뭔가를 단단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지은이는 내 속내를 다 듣고서 곧장 반론에 나섰다.
달빛 아래 드러난 지은이의 두 뺨은 어느새 상기되어 있었다. 나랑 싸우기라도 하겠다는 듯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말을 이었다.
“사람들 다 자기 일하면서 이성을 만나고 결혼도 해요. 그런다고 특별히 능력이 떨어지지도 않고요.”
“…….”
“선배라고 다를 거 없어요.”
“아니, 완전히 다르지. 난 흉부외과 의사니까. 주말, 야간 상관없이 응급 환자가 생기면 병원으로 뛰어나가야 해.”
나는 차분하게 말을 계속했다.
“그렇게 되면 병원으로 떠나는 나도, 남는 사람도 고통스럽겠지. 나와 그 사람 사이는 점점 멀어지고 부서져 갈 테고. 난 그런 관계는 원치 않아.”
“선배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네요.”
내 장황설에도 지은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과연 먼 미래에 최고의 여자 흉부외과의가 되는 재목은 떡잎부터 달랐다.
“내가?”
“네, 그럼 일반 사람 말고 같은 병원서 근무하는 이성을 만나면 되잖아요. 그럼 자주 볼 수 있고 상황도 너그럽게 이해해 줄 거고.”
지은이의 의견은 실로 타당했지만 나는 그마저도 내키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직장에서 일한다면 마음이 더 산만해질 것 같아서였다.
가뜩이나 환자 관리도 버거운 환경인데 사랑까지 관리하라니…….
너무 가혹한 처사 아닌가.
“선배를 이해해 줄 사람은 먼 곳이 아니라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게 누군데?”
“글쎄요, 그건 선배 마음에 달린 문제겠죠.”
연애 주제로 난상 토론을 벌인 후 우리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때쯤에는 펑펑 내리던 눈송이가 그쳐 있었다.
“어휴, 눈치는 진짜 더럽게 없네. 환자도 잘 보고 정치 싸움도 잘하면서 여자 보는 눈은 대체 어디다 팔아먹은 거야? 도통 이해가 안 가네.”
지은이라 모기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내 귓가로 흘러들었다.
다만 누구 이야기인지는 몰라도 내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서 다른 귀로 흘려버렸다.
나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까.
* * *
퇴사하는 당일 아침.
오전 컨퍼런스를 진행하기 전 깜짝 파티가 있었다.
지은이와 레지던트 후배들이 회의실로 나를 불렀다.
회의실 불이 깜깜하게 꺼져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에 펑펑 폭죽이 터졌다.
촛불이 환하게 빛나고 있는 케이크가 눈앞에 튀어나왔다.
그 순간 나는 속으로 울컥했다.
전생에서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었던 데다가, 내가 사랑받고 있었다는 사실에 감격해서였다.
나는 쏟아지려는 눈물을 애써 밀어내고 후 불어 촛불을 껐다.
후배들의 덕담 아닌 덕담을 듣고 손편지도 받았다.
컨퍼런스 시작 전에 나눠 먹은 케이크는 꿀보다 달았다.
컨퍼런스와 회진이 끝난 후에는 펠로우 선생들과 교수들도 내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다들 내가 떠난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아쉬운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긴 시간 머물지는 않았지만 나름 용인에 깊은 정이 들었으니까.
짐을 챙긴 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병동을 떠났다. 병원과 차차 멀어져 갔다.
그렇게 또 하나의 이별과 또 하나의 출발이 시작되고 있었다.
* * *
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
바깥에서 습격해 오는 시끄러운 함성 소리에 잠이 달아났다.
한 번 달아난 잠은 다시 잡힐 기미가 없었기에 나는 추적을 포기하고 몸을 일으켰다.
단단한 방바닥에 배긴 허리를 주먹으로 두들기며 나른한 의식을 깨웠다.
‘저놈이 원수였네.’
나는 반쯤 열린 창문을 흘겨보았다.
계절은 바야흐로 봄과 여름에 걸친 6월.
더운데 선풍기를 틀긴 애매해서 창문을 열고 잔 게 실수였다.
함성 소리를 직격으로 맞아서 잠을 깨고 말았다.
-따라라~ 따라라~ 국민체조 시작!
함성 소리에 이어 이제는 익숙해진 멜로디가 창가로 새어 들어왔다.
나는 대대 군의관으로 한 달째 복무 중이었는데, 내가 속한 대대는 GOP 철책선을 지키고 있었다.
GOP 군의관 생활은 내겐 너무 지루하고 심심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하루에 최소 두 건의 수술에 들어가고 응급 외상 환자까지 살폈던 나였다.
내 하루는 바늘 하나 찔러 넣기도 힘들 만큼 빡빡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한량이 따로 없었다.
놀고먹는 게 일상이었다.
병사들이 앓고 있는 질환은 보통 사소한 편으로, 무좀이나 작업하면서 생긴 찰과상이나 염좌, 감기, 두드러기 수준이었다.
이것들은 군대라서 생긴 질환으로, 관리가 중요했다.
동시에 내가 병사들을 치료하는 것보다 병사 본인이 스스로를 관리하는 게 더 중요한 질환이었다.
군대 안에서 자기 관리라는 게 쉽지 않은 건 안타깝지만.
질환의 특성상, 의무대의 치료 환경상 내가 병사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고민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대대 병사들이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게 병영 생활을 할 수 있을까, 하고.
놀랍게도 최선의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최대한 많은 숫자의 병사들을 상급 의료시설에 보내는 것.
이를테면 사단 의무대나 군 병원인 태극병원에 보내는 것 말이다.
내가 할 수 없는 검사와 처치를 상급 의료시설은 소화할 수 있었기에(물론 상급 시설을 100퍼센트 신뢰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서일까.
요즘의 나는 의사가 아니라 운전기사가 된 기분이었다.
군용 엠뷸런스에 다 타지 못한 병사들을 내 개인 차로 상급 의료시설로 이송해 주는 운전기사 말이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그냥 푹 쉬고 온다고 생각해.
-그거, 네 인생에 딱 한 번뿐인 기회다. 군대가 아니면 그런 호사를 어디서 누려 보니?
-누가 군의관 생활 대신해 달라고 하면 나는 백 번이라도 하겠다.
하루는 먼저 군대를 간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대체로 이런 말을 해 주었다.
군 생활을 인생의 긴 휴가로 생각해라.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음 편히 쉬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일하는 것보다 쉬는 것이 더 힘들었다.
전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나는 줄곧 목표를 향해 달려왔다. 한순간이지만 목적지가 사라지니 초조하기도 싶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내가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의문이 생기기도 했다.
군의관이 되면서 느낀 점이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평화였다.
병원 안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바깥세상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내가 보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낙사를 당하거나, 심장이 멈췄거나, 숨을 못 쉬는 상태였는데, 바깥 사람들은 적어도 외면상으로는 건강해 보였다.
건강이 주는 평화로움을 나는 바깥 생활을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다.
똑. 똑. 똑.
노크 소리와 함께 상념이 깨졌다.
들어오라고 말하니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키가 멀대같이 큰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진수 일병이었다.
“지대장님.”
“어, 왜?”
“아침 식사는 라면 끓여 드려도 되겠습니까? 식단이 별로라서…….”
“메뉴가 뭔데?”
“흑미밥에 콩나물 무침, 조기 튀김, 어묵 조림, 깍두기, 똥국입니다.”
식단 구성을 듣고 나는 진저리를 쳤다.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그 맛이 재현되면서 식욕이 싹 달아났다.
자대 배치를 받은 지 얼마 안 된 시점까지는 나도 꾸역꾸역 배식을 먹어 보려 했다.
하지만 그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라면 먹는 게 낫겠네.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근데 지대장님, 무엇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뭔데?”
“병원 밥이 더 맛이 없습니까, 아니면 군대 밥이 더 맛이 없습니까? 지대장님 생각이 궁금합니다.”
강진수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농담조로 대답했다.
“그건 질문도 아니야. 당연히 군대 밥이 더 낫지. 병원 밥을 일주일만 먹으면 안 아픈 사람도 환자가 될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