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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192화 (192/257)

192화 제4장 군의관(2)

이혜연이 체포되면서 그녀의 악행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사람들은 그녀의 교활함과 악랄함을 손가락질하며 그녀를 비난했다.

하지만 신상이 공개된 이혜연은 정작 차분한 모습을 보였다.

본인의 범행에는 남편의 가정 폭력이 숨어 있었다.

독살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며 사연을 팔아 형량을 줄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래서 사람들의 공분을 한 번 더 샀다.

한편 나는 이혜연이 오리발을 내밀 거라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죄를 뉘우칠 만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남편을 그렇게 교묘하게 살해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래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경찰들의 수사에 적극 협조했다.

손정균에게 받아서 가지고 있던 보약을 전부 형사에게 넘겼다.

또한 평소 병동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어땠는지를 진술했다.

손정균 입원 당시 같은 병실을 썼던 환자들을 형사들에게 알려 주기도 했다.

다양한 증인들이 일관된 증언을 한다면 이혜연의 거짓말, 그러니까 손정균이 가정 폭력을 했다는 헛소리를 깨부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사가 급물살을 타는 가운데 병동을 찾은 손정균의 아버지를 직접 만나기도 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도움은 죽어도 못 잊을 겁니다. 아마 정균이도 저승에서 고마워하고 있을 테지요.”

감사 인사를 전하는 그의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었다.

갑작스러운 아들의 죽음.

심지어 범인이 며느리였으며 진실을 밝히는 동안 주변에 민폐를 끼친다는 소리를 들었던 손정균의 아버지.

그동안 그가 짊어져야 했던 아픔의 무게를 나는 차마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를 가볍게 포옹하는 것뿐이었다.

오지랖처럼 보였던 내 행동은 의외로 내게 큰 이득이 되었다.

손정균의 독살이 매스컴을 타면서 덩달아 나도 매스컴의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손정균 父: 이 사람이 없었으면 범인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의사는 어떻게 탐정이 되었는가, 그 의사가 진실을 밝힌 방법.]

.

.

.

손정균과 이혜연 다음으로 사람들은 나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나는 일약 전국구 의사로 발돋움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다 잊혀지긴 하겠지만.

어쨌거나 뜨거운 감자가 된 내게 병원은 보상을 약속했다. 진료부원장이 친히 나를 불러 포상금을 약속했던 것이다.

“포상금 대신 해외 연수를 보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진료부원장에게 당돌하게 말했다.

사실 돈이 모자란 것도 아니고,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전생과 달리 우리 집안은 부유했다.

어머니는 간호과장이고, 아버지는 유명한 소설가고, 할아버지는 무려 신원대병원 전속 EMR 컨설팅 업체 대표였다.

그러므로 나는 내 실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을 원했다.

“재미있는 친구군. 지금 나랑 흥정을 하자는 건가?”

진료부원장이 다리를 꼬며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레지던트 주제에 주는 대로 받지 뭐 그렇게 원하는 것이 많냐는 눈치였다.

자칫 잘못하다간 진료부원장에게 찍힐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

하지만 나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전생에는 없었던 배짱이 마음의 무게 중심을 잡아 주었다.

“원하는 것이 있어서 말씀을 드려 봤습니다. 말씀은 드려 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선생, 말이라는 건 말이야.”

진료부원장이 손가락으로 무릎을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입 바깥으로 나와야 하는 말이 있고, 입안으로 삼켜야 하는 말이 있는 법이지. 방금 한 발언은 어느 쪽이라고 생각해?”

“전자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저희 과장에게 듣기로는 진료부원장님이 통 크고 화끈하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

“원체 그릇이 크신 분이니 저도 큰 부탁을 드려 봤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말을 마쳤다.

진료부원장은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주변에서 조금만 떠받들어 주면 쉽게 유쾌해지는데, 그 점을 공략한 것이다.

“누구에게 배웠는지는 몰라도 아부하는 방법은 제대로 배웠군. 하마터면 꼼짝없이 당할 뻔했잖아?”

진료부원장이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그는 내 수법을 간파할 정도로 수완이 좋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는 법.

“저는 아부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제가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진료부원장님을 재구성했을 뿐이죠.”

“내 평판이 그 정도로 좋은가? 자네 귀에 들어갈 만큼?”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안 그랬다면 제가 감히 진료부원장님 앞에서 해외 연수를 보내 달라는 간 큰 부탁을 할 수 없었겠죠.”

내 그럴듯한 설명에 진료부원장이 손으로 턱을 쓸어내렸다.

그러다가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의 미래에 투자한다는 개념으로 보내 주지, 해외 연수.”

진료부원장의 승낙을 받고서 나는 하마터면 만세를 부르며 천장으로 팔을 뻗을 뻔했다.

“자네가 날 통 크다고 칭찬해 줬으니까… 기간은 넉넉하게 1년 정도 어때?”

“황송합니다.”

“황송할 것까지야. 사실 이 선생은 이만한 대접을 받을 만했어.”

진료부원장이 약속한 1년짜리 해외 연수권.

과장이 약속한 1년짜리 해외 연수권.

서울에서 스승님께 받은 6개월짜리 해외 연수권.

나는 내가 가진 연수권을 떠올리며 행복에 젖었다.

이로써 모든 퍼즐 조각을 모두 갖췄다.

해외에서 다양한 선진 기술을 배우고 복귀한다면 곧장 교수로 부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왜냐고?

총 2년 6개월 동안 해외에서 펠로우 과정을 밟을 거니까.

예전에 알아본 바에 의하면 제임스홉킨스 병원은 타국 의사에게 무척 너그러운 곳이었다.

USMLE만 합격하면 한국의 의사 경력을 모두 인정해 주었다.

그러니까 나는 USMLE에 합격해서 제임스 홉킨스 병원 흉부외과 펠로우 과정을 밟으면 그만인 것이다.

미국 의사 면허와 한국 의사 면허를 둘 다 가질 수도 있고.

곧 다가올 장밋빛 미래에 젖은 채 나는 진료부원장실을 나왔다.

그로부터 7개월이 지났다.

* * *

7개월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레지던트 T.O가 충분하고 레지던트들의 실력까지 출중하다고 해도 흉부외과는 흉부외과였다.

나는 숨 쉴 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정규 수술 스케줄은 바늘 하나 끼워 넣기도 힘들 만큼 빡빡했다. 수술방에 무려 네 번이나 들어갔던 적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다행이랄까.

외상 센터라는 특성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외상환자가 응급실로 밀려들었다.

그 외상 환자 중 흉부외과 환자가 없을 리가 없는 법.

정규 수술 스케줄과 응급 수술까지 감당하면서 나는 곤죽이 되어 버렸다.

어떤 때는 파김치였고, 어떤 때는 눈 밑이 새까만 판다였다.

하지만 그 힘든 시간들이 내게는 비료였다.

남이 시켜서 하면 고생이고, 내가 원해서 하면 경험이라는 말이 있는데 내가 딱 그런 케이스였다.

나는 내 발로 용인에 걸어 들어왔으므로 그 힘든 일정들을 긍정적으로 소화했다.

용인에서 나는 전생에는 까맣게 몰랐던 외상 환자 수술 요령을 터득했다.

처치의 우선순위는 어떻게 정해야 하는가.

피를 철철 흘리는 응급 환자에게 가장 효과적인 지혈 방법은 무엇인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스태프들을 멋지게 지휘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등등.

나는 차근차근 성장하는 중이었다.

의대 시절에 폐·식도 파트 펠로우 과정을 흡수하고.

인턴 때 소아 흉부외과에서 8개월간 소아 흉부외과 명의들의 기술을 습득하고.

이번에는 외상 환자 처치까지 넘보고 있었다.

이른바 완전체 흉부외과의가 되는 길 위에 있는 셈이었다.

실력이 무르익으면서 계절도 무르익어 갔다.

처음 용인에 왔을 때만 해도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는 봄이었거늘.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 내리는 겨울이 되어 있었다.

나는 흉부외과 전문의 시험을 치렀고, 다음 해 2월에 합격 통지를 받았다.

무려 4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달고 다녔던 레지던트 딱지를 떼는 순간이었다.

* * *

“시간 참 빠르네요. 벌써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그러게. 시간을 도둑맞은 기분이야.”

병원 옥상, 나는 함박눈이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 곁에는 지은이가 서 있었다.

일요일 저녁, 정규 스케줄은 당연히 없고 응급 환자도 없는 시점에서 나는 지은이와 옥상을 찾았다.

지은이가 뜬금없이 눈을 보고 싶다며 내 팔을 잡아끌었던 것이다.

지은이가 아직도 눈에 낭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조금 놀랐다.

병원에서 레지던트 생활을 하다 보면 잘 있던 낭만도 달아나 버리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 권력, 돈, 생로병사.

병원에서 다루는 것들은 하나같이 낭만과 거리가 멀었다.

“도둑맞은 게 있으면 빨리 신고해야죠.”

“시간 경찰 전화번호는 몰라서 못하고 있어.”

내 농담에 지은이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눈 내리는 병원 주변을 내려다보았다.

평소와 달리 유독 싱숭생숭한 마음.

집중력을 잃은 아이처럼 산만하게 구는 마음.

오늘 저녁은 내가 용인에서 보내는 마지막 저녁이었다.

전공의 시험에 합격하면서 모든 수련 과정은 끝났다.

마음 같아서야 연수권을 써서 곧장 해외로 떠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내 발목을 거머리처럼 잡고 놔주질 않았다.

그 누군가의 정체란 바로 대한민국의 청년이라면 누구라도 피할 수 없는, 군대라는 녀석이었다.

나도 슬슬 입대해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입대 일자는 벌써 2주 뒤로 잡혔다.

그러니까 2주 뒤에 나는 병원이나 집이 아닌 군대에서 생활하게 될 것이다.

현시점에서 공중 보건의는 하늘의 별 따기였으니 아마 전생처럼 대대 군의관이 되거나 또는 연대 의무중대장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선배, 너무 처져 있지 말고 힘내세요. 국방부 시계는 결국 돈대요.”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지은이가 군대 명언을 날렸다.

하지만 회귀로 인해 군대에 두 번째 입대하는 내겐 가소로운 조언이었다.

나도 안다.

국방부 시계가 돈다는 사실 따위는.

다만 국방부 시계는 사회에서 작동하는 시계보다 몇십 배는 더 느리게 돌아가는 사실도 알고.

‘이번엔 좀 더 영양가 있게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는데…….’

나는 찬찬히 전생의 군의관 생활을 되짚어 보았다.

당시 대대 군의관이었던 나는 방종의 끝을 달렸다.

하루 종일 먹고 자고 가끔 병사들을 진료하고 시간이 되면 퇴근하는, 게으른 일과를 반복했다.

그래서 제대할 때쯤에는 체중이 무려 15킬로나 쪄 버렸다.

-야… 이게 사람이야. 찐빵이야?

제대 후 만난 동기들의 첫 마디가 이거였으니 오죽할까.

이번에도 전생처럼 방탕한 생활을 할 계획은 없었지만 군대에서 생산적인 일을 할 마땅할 거리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더욱 골치가 아팠고.

“선배, 사람이 위로를 하면 듣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지은이가 뾰족한 목소리로 물었다.

“듣고 있어.”

“하여간 말은 잘해요, 말은. 그건 그렇고 저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선배 군 생활 끝나고 곧바로 해외 연수 갈 거잖아요?”

“아마 그러겠지. 엄청 나중 일이 되긴 하겠지만.”

“해외 연수 끝나면 어디로 복귀할 거예요? 서울이에요, 아니면 용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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