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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189화 (189/257)

189화 제3장 어둠을 먹는 꽃(4)

위이이잉.

의국 회의실 복사기에서 여러 장의 서류가 출력되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갓 구운 빵처럼 따끈한 서류를 손에 들었다.

손정균의 요절 소식을 들은 지 닷새가 지난 시점.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만 해도 솜털이 곤두설 만큼 충격을 받았지만 지금은 담담했다.

물론 그를 떠올리면 여전히 안타깝기는 했지만 예전만큼 가슴이 쓰리지는 않았다.

나는 할 일이 너무 많았고, 살려야 할 사람도 너무 많았다.

손정균을 애도하느라 눈앞에서 피를 흘리는 환자에게 소홀할 여유도 없었다.

‘정말 보내셨구나.’

나는 가만히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서류는 손정균 아버지가 팩스로 보낸 것으로, 119 구조 기록지였다.

119 대원이 언제 신고를 받았는지, 출동 장소는 어디인지, 현장에 도착했을 때 환자의 상태는 어땠는지 등등.

119 구조 기록지에는 출동에 관련된 다양한 정보가 담겼다.

그리고 이 서류를 손정균의 아버지가 보냈다는 건 그가 변함없이 아들의 죽음이 타살이라 믿는다는 뜻이었다.

이는 자식의 요절을 받아들이지 못한 아버지의 비뚤어진 집착일까.

아니면 치밀한 살인 사건의 흑막을 드러내는 계기가 될까.

손정균의 죽음은 내게도 해결하지 못한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마침 토요일 오전이라 수술 스케줄이 없었고, 간이 회진도 끝난 참이라 여유가 넘쳐 났다.

나는 의자에 앉아 차분하게 119 구조 기록지를 살폈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결정적인 정보 같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손정균의 아내를 의심할 만한 정황은 한 가지 확인할 수 있었다.

-오후 6시 50분.

손정균의 아내가 119에 신고를 했다. 손정균이 가슴을 부여 쥔 채 쓰러졌다고.

-오후 6시 57분.

119 대원이 자택에 도착해 손정균에게 심폐 소생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심폐 소생술을 펼칠 당시 환자는 의식과 호흡이 없었으며 심장도 뛰고 있지 않았다.

-오후 7시 20분.

119대원들은 CPR을 포기하고 손정균을 대학병원으로 이송시켰다. 당시 응급의학의가 손정균에게 도착 시 사망 판정을 내렸다.

언뜻 보면 그리 이상하거나 수상한 점은 없는 듯했다.

매스컴에서 보도되는 급성 심장마비 환자의 사망 형태가 대부분 이런 형태를 띠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기록지에서 풍기는 지저분하고 구린내를 맡았다.

무언가는 자연스럽지 않았고

무언가는 미심쩍었다.

최초 신고 시간인 6시 50분과 119 대원들이 CPR을 실시한 6시 57분 사이를 나는 주목했다.

심정지 후 7분이 지난 상황.

골든타임은 불행하게도 지났지만 이 시점의 손정균은 살아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심폐 소생술을 전문으로 펼치는 응급대원들이 출동해서 심폐 소생술을 했는데 말이다.

나는 검지로 서류를 툭툭 건드렸다.

희미하게 남아 있는 서류의 온기가 내 손가락에 전해졌다.

‘으음… 확실히 그냥 넘어갈 사건은 아닌 것 같네.’

기록지를 보고 나니 나 역시 손정균의 아버지처럼 아내를 의심하게 되었다.

그녀의 신고에는 맹점이 있었다.

그녀가 6시 50분에 신고했다는 사실이 과연 손정균이 6시 50분에 쓰러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손정균이 정말 6시 50분에 쓰러졌다면 말이다.

구급대원들이 7분 만에 도착해서 실시한 심폐 소생술에 어느 정도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

하지만 손정균은 자택에서 실시한 20분간의 심폐 소생술에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사망 상태로 우리 병원 응급실에 실려 왔고.

「손정균은 6시 50분 전에 이미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이 명제를 받아들이면서 나는 자연스레 아내에게 의심의 화살을 돌렸다.

이번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아내였다.

손정균과 최후의 최후까지 함께 시간을 보냈으니까.

그렇다면 아내의 신고는 왜 늦었을까.

신고가 늦은 것은 고의인가, 아니면 부주의인가.

고의로 볼 수 있는 증거는 여럿 있었다.

한 집에 살면서 남편이 심장마비로 쓰러지는 것을 어떻게 모를 수 있냐.

남편이 쓰러지는 소리가 났을 수도 있고.

쓰러지기 전에 흉통을 호소했을 것 아니냐 등등.

하지만 부주의로 주장할 수 있는 증거 또한 넘쳐 났다.

저녁 식사 준비 중이라 남편을 신경 못 썼다.

남편은 평소에도 아프다는 티를 잘 안 내는 사람이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119에 신고할 생각도 못했다 등등.

아내를 의심할 정황은 충분하다만 아내가 무고하다고 여길 정황도 충분한 모순된 상황이랄까.

이런 상황이라면 타살을 주장하는 측이 열세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타살이라면 아내가 어떻게 손정균에게 심장마비를 유발했는가.

난제 중의 난제가 그 뒤를 딱 버티고 서 있었으니까.

“어라? 이건…….”

투시라도 하는 것처럼 기록지를 뚫어져라 보던 나는 기록지 뒤에 있는 서류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A4 용지에 손정균 아버지의 정갈한 손 글씨가 적혀 있었다.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기 위해 경찰서를 제 집 드나들 듯 찾았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탐정 소설이나 미스터리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조롱도 들었습니다.

-며느리를 집에 불러서 이번 사건에 대해 따져 물었더니 그다음부터 전화도 문자도 먹통이더군요.

.

.

.

손정균의 아버지는 지난 며칠간 갖은 수모와 역경을 겪고 있었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처절함이 고스란히 전해져 문득 가슴이 아려 왔다.

나는 결국 양 소매를 걷어붙이고 손정균의 아버지를 돕기로 했다.

물론 이것이 그를 따라 아내를 범인으로 생각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손정균이 정말 타살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손정균의 아버지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서류는 잘 받았다.

나는 이런 부분에서 아내가 의심이 가지만 그렇다고 아내가 범인이라는 증거는 없다 등등.

서류에 대한 내 생각을 덧붙였으며 손정균 아버지의 주장도 들었다.

그리고 통화 말미에 죄인의 심정으로 꺼낸 한마디.

“이런 말씀은 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만… 정말 진실을 원하신다면 한 가지 반드시 해야 하는 게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손정균 아버지의 질문에 나는 철근처럼 무거웠던 입술을 뗐다.

“힘든 결정이라는 것은 알지만… 아드님을 부검하셔야 합니다.”

* * *

또 한 주가 지나고 찾아온 금요일.

나는 터벅터벅 수술실로 향하고 있었다.

“치프, 괜히 오지랖 부리는 거 아니에요? 의국 일도 바쁜데 왜 그런 일까지 치프가 신경 써요?”

곁에서 걷던 지은이가 볼멘소리를 했다. 내가 손정균 사망 사건에 깊게 관여한 것이 영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의심스러운 게 있으면 낱낱이 밝혀야지. 유가족들이 괴로워하고 있어.”

“냉정하게 들리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유가족이 해결해야 할 문제잖아요.”

“나밖에 기댈 곳이 없다고 하시니까. 형사들은 혐의점이 없다고 수사에 안 들어간대.”

“그러니까 제 말은 공권력을 가진 형사들도 손 놓은 사건을 왜 치프가 손대냐는 거예요.”

지은이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꾸중하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이제 슬슬 끝나 가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나는 흥분한 지은이를 좋게 좋게 타일렀다.

오늘은 손정균의 부검이 있는 날이었다.

국과수의 대리 의뢰를 받은 우리 병원 병리과 법의학자가 손정균을 부검하게 되었다.

나는 법의학자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함께 부검에 들어가게 되었고.

부검 결과가 나온다면 아마 모든 진실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과연 숨겨졌던 진실은 무엇일까.

손정균은 정말 급성 심장마비로 요절한 걸까.

아니면 생명 보험금을 노린 아내에게 살해당한 것일까.

지은이와 잡담을 나누면서 도착한 수술실.

우리는 계수대 앞에 서서 나란히 스크럽(수술 전 소독)을 하고 각자 다른 수술방으로 흩어졌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흉부외과 이믿음이라고 합니다.”

나는 먼저 도착해 있던 법의학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키가 전봇대처럼 훤칠한 법의학자가 수술대 앞에 서 있었다. 법의학자의 이름은 고성우로, 40대 중반의 교수였다.

그의 곁에는 보조로 보이는 병리학과 의사가 서 있었다.

“반가워요. 고성우입니다.”

고성우가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다른 과가 부검에 참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데… 대체 무슨 영문입니까?”

“제가 환자분의 주치의였습니다. 퇴원 당일에 사망하셨는데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요.”

“혹시 의료 과실이 있었나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만…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서요.”

“그래요? 자세한 건 확인해 보면 알겠죠.”

고성우가 부검 과정 및 주의 사항을 간략하게 전했다.

이윽고 고성우와 고성우의 보조의가 부검 준비에 나섰다.

가장 먼저 부검 과정을 촬영할 카메라의 각도를 세팅하고 사진기도 준비해 놓았다.

부검에 처음 참여한 나로서는 그 과정이 무척 신기해 보였다.

부검이란 죽은 사람을 일일이 기록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고.

“육안 검시부터 시작하자. 수술포 걷고 카메라 준비하고.”

“네, 교수님.”

보조의가 사체를 덮고 있던 수술포를 힘차게 젖혔다.

드리웠던 수술포가 걷히면서 이제는 생기를 잃어버린, 싸늘하게 식어 버린 손정균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얼굴을 맞대었던 사람인데…

내게 기운을 차리라며 보약까지 손에 쥐어 주던 사람인데…….

그 사람이 망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아직 믿기 힘들었다.

현실감도 잘 느껴지지 않아 몸이 붕 뜬 느낌이었다.

하지만 유가족을 생각하며 무뎌지는 정신력을 날카롭게 벼렸다.

허수아비 노릇이나 하려고 이 자리에 서 있는 게 아니지 않는가.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부검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면서 타살의 증거를 찾기 위함이었다.

한편 고성우는 사체를 얼굴부터 차근차근 살폈다.

눈, 코, 입, 귀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필요한 부분에서 보조의가 사진을 찍도록 했다.

찰칵.

찰칵.

촬영을 할 때마다 요란한 플래시 음과 함께 수술방이 환하게 밝아졌다. 마치 벼락이라도 떨어지는 것처럼.

나는 부검에 참관하면서 내 나름의 증거를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켰는데, 노력한 것에 비해 큰 성과는 없었다.

사체의 외부를 육안으로 살폈을 때 외상의 흔적은 없었다.

이후 등 쪽을 절개해서 확인한 후방의 피하와 근막 층도 마찬가지였다.

“흉부외과면 밀린 일이 많을 텐데…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게 어때요? 나올 게 없어 보이는데.”

고성우는 내가 헛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에둘러 표현했다.

“괜찮습니다. 여유 시간을 잘 빼 둔 상황이라.”

“이 선생은 고생을 사서 하는 타입인가 보네요.”

고성우가 농담조로 한마디하고 부검을 이어 갔다.

등 쪽과 관련된 부검이 끝나자 사체는 다시 천장을 보고 누웠다.

고성우는 흉부외과에서 하는 것처럼 정중 흉골 절개를 했다.

메스를 이용해 명치 부분을 메스로 절개하고.

복숭아씨를 닮은 흉골을 또 세로로 가르고.

갈비뼈를 좌우로 벌려 심장과 폐가 드러나도록 했다.

드디어 심장을 살핀다는 사실에 나는 바짝 정신을 차렸다.

손정균의 사인은 급성 심장마비였다.

그러니 심장을 해부해 보면 알 것이다. 구체적으로 심장에 어떤 문제가 생겨 손정균이 세상을 떠나게 됐는지.

“심장 절개 시작합니다.”

고성우의 손에 들린 메스가 우심방을 가르기 시작했다.

무영등을 반사하는 메스의 빛이 오늘따라 유독 눈 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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