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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187화 (187/257)
  • 187화 제3장 어둠을 먹는 꽃(2)

    OPCAB을 성공적으로 마친 지 일주일이 지났다.

    CABG가 아닌 OPCAB을 선택했던 덕분일까, 이태선 신부는 손톱만큼의 위기도 없이 회복 중이었다.

    급성 폐렴, 급성 심장마비, 패혈증, 흉관의 감염 등등.

    수술 후유증은 찾아볼 수 없었는데, 이태선 신부가 호소한 증상은 딱 하나, 흉통뿐이었다.

    이태선은 누군가가 가슴을 칼로 벤 것처럼 화끈하고 쓰라리다고 말했다.

    “죄송하지만 그건 저희로서도 어쩔 수 없는 부분입니다. 흉골 절개라고 해서 실제로 수술 도중 신부님의 가슴을 세로로 찢은 다음 좌우로 벌렸거든요.”

    “휴… 그런가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통증이 심하신 듯하니 진통제만 추가로 처방하겠습니다.”

    나는 수시로 이태선을 찾아가 증상과 컨디션을 물었다.

    다 된 밥에 재 뿌린다고 혹시 모를 변수가 발생할지 몰랐으니까.

    전생과는 다른 형태의 수술 후유증이 이태선에게 찾아올 수 있었으니까.

    행복하게도 며칠 뒤 그런 내 염려들은 기우라는 게 밝혀졌다.

    이태선은 건강하고 얌전하게 퇴원했다.

    전생에서는 하늘나라로 떠났던 그가 이번 생에서는 기어이 땅에 남았던 것이다.

    존경하는 사람을 살렸다는 사실에.

    세상에 빛이 될 사람을 살렸다는 사실에 나는 크나큰 보람을 느꼈다. 이 보람이야말로 고달픈 흉부외과 생활에 단 하나뿐인 버팀목이었다.

    그런데 퇴원하기 전 이태선은 내게 선물을 하나 주고 갔다.

    나무 목걸이 십자가였는데, 선물을 받으면서 나는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저는 종교가 없고 앞으로도 종교를 믿을 생각이 없습니다.

    …라고 분명 이태선에게 전했는데 종교색이 짙은 선물을 주었기 때문이다.

    내 뚱한 표정을 읽고 이태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내 목에 직접 목걸이를 걸어 주기도 했다.

    “십자가 목걸이를 선물하는 건 선생님에게 하느님을 섬기라고 강요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무슨 뜻이죠?”

    “살다 보면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고 느껴질 때가 분명 올 겁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이죠.”

    이태선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목걸이를 보면서 떠올리세요. 당신이 절망할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저야 당연히 그 사람이 하느님이겠지만 선생님이 꼭 그럴 필요는 없으니까요.”

    “좋은 뜻 감사합니다. 명심하죠.”

    나는 매끈하게 다듬어진 십자가 목걸이를 어루만졌다.

    절망 속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

    회귀하고 인생을 헛되이 산 것은 아니었는지 떠오르는 얼굴들이 많았다.

    그러고 보니 이태선 신부가 회복 중일 때 신원효가 찾아온 적도 있었다.

    신원대학교 병원이 속한 신원 재단의 전무이자 재벌 집 막내아들.

    과거 신원효는 수술에 실패하면 보복하겠다는 암시를 주고 떠난 적이 있었다.

    수술이 무사히 끝났기에 보복 따위는 없었다.

    신원효는 다시 얌전하고 예의 바른 임원으로 돌아가 나를 대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연락하세요. 내 직통 전화번호가 적힌 명함입니다.”

    신원효가 명함을 내밀었고 나는 놀란 눈으로 명함을 내밀었다.

    재벌 집 막내아들의 직통 번호가 적힌 명함이라니…….

    나는 이 명함의 가치를 대번에 꿰뚫어 보았다.

    “이런 걸 저한테 줘도 되는 겁니까? 제가 전무님의 연락처를 뿌리고 다니면요?”

    “그렇게 어려운 수술을 소화했던 분이 설마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지는 않겠죠.”

    신원효는 다리를 꼬며 말을 이었다.

    “단 한 번, 제가 도울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당신을 돕겠습니다. 신부님 치료에 힘써 준 대가라고 보면 됩니다.”

    “…….”

    “저번에 경솔했던 행동에 대한 사과이기도 하고요.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할 만큼 신부님이 제게 소중한 분이라는 것만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신원효의 고백이 진심으로 들렸으므로 나는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 진상에는 크게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태생적인 진상.

    병원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장소에서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는 부류였다.

    나머지 하나는 발작성 진상.

    돈이나 연인 관계 등 특정 문제에만 진상짓을 하는 부류였는데, 아무래도 신원효는 후자였던 모양이었다.

    “마음을 받았으니 명함은 받지 않겠습니다.”

    나는 신원효에게 받은 명함을 돌려주었다.

    명함을 주머니 안에 쏙 넣고 싶었던 욕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었다.

    앞으로 신원효 수준의 인맥이 연결될 가능성은 주사위를 여섯 번 던져서 여섯 번 다 6이 나올 만큼 희박했으니까.

    하지만 신원효만큼 나도 증명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어째서죠?”

    “딱히 보상을 원했던 것도 아니고,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바로 의사의 본분, 의사가 존재하는 이유.

    “허…….”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신원효가 내 얼굴과 명함을 번갈아 응시했다.

    그러더니 휴게실이 떠나갈 듯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 선생님, 알고 보니 무척 재미있는 분이었군요.”

    “안 그래도 병동에서 고급 유머의 소유자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게 없어서 아쉬울 뿐이네요.”

    “기왕이면 마음도 받고 명함도 받아 두시죠.”

    신원효는 반강제로 내 가운 주머니에 명함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이믿음 선생님, 그 이름 반드시 기억하겠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나를 찾기 전에 내가 당신을 먼저 찾을지도 모르겠네요.”

    * * *

    오전 정규 수술을 한 타임 뛰고 나니 모처럼 여유 시간이 생겼다.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병동에 복귀했다.

    이태선 신부의 OPCAB은 성공적으로 끝났으며 그 과정에서 뜻밖에 신원효라는 황금 인맥을 얻게 되었다.

    또한 유지은이 합류하면서 의국의 조직력은 더욱 단단해졌다.

    아직까지는 모든 일이 술술 내 뜻대로 풀리고 있달까.

    이런 흐름이라면 우수 레지던트에게 제공하는 1년짜리 해외 연수권은 내가 찜해 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병동 복도에 들어서는데 화장실에서 튀어나온 남자 환자가 아는 척을 했다.

    남자의 이름은 손정균.

    나이는 32세로 건강검진에서 발견한 폐 결절을 엊그제 흉강경 폐 절제술로 제거한 환자였다.

    “안녕하세요.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오늘이 퇴원 맞죠?”

    “네, 맞습니다. 이 지긋지긋한 병원 생활도 이젠 끝… 아… 이건 선생님 앞에서 할 이야기가 아닌가?”

    “괜찮습니다. 저도 지긋지긋한걸요.”

    나는 민망해하는 손정균을 달래며 말을 이었다.

    “아직 불편한 곳이 있나요?”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가끔씩 심장이 빨리 뛰는 느낌이 드는 것밖에 없습니다. 근데 사실 그것도 제가 긴장을 잘하는 스타일이라서.”

    손정균은 간헐적인 가슴 두근거림 이외에 특이 증상은 없다고 말했기에 나도 더 이상 파고들지는 않았다.

    그는 수술 후 실시한 종합 검사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애초에 심장이 아니라 폐 질환 때문에 입원한 것이었고.

    “아, 참. 선생님, 저 좀 따라오세요.”

    “네? 어디로요?”

    “따라와 보시면 알아요.”

    손정균이 막무가내로 팔을 끌어당기는 바람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끌려갔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은 퇴원 준비로 너저분해진 손정균의 병상이었다.

    “제가 퇴원하기 전에 몇 개 챙겨 드릴게요. 이거 진짜 엄청난 자양 강장제예요.”

    “…….”

    “여기저기서 힘이 불끈불끈 솟는다니까요.”

    손정균은 호들갑 떨며 내게 보약 몇 개를 손에 쥐여 주었다.

    불투명한 하얀색 비닐 포장지에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가 그려져 있었다.

    하얀 배경 사이로 진한 갈색 액체가 드문드문 보이기도 했다.

    나는 별 말하지 않고 보약을 받아 가운 주머니에 넣었다.

    보약 자체보다는 내게 뭐라도 챙겨 주려는 손정균의 마음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주신 건 감사히 받겠지만 조금 애매하네요.”

    “뭐가요?”

    “신혼인 환자분하고 달리 저는 힘이 불끈불끈 솟아도 쓸 곳이 없거든요.”

    내 농담에 손정균이 키득키득 웃었다.

    손정균과 잠깐 잡담을 나누고 있는데 한 여성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손정균의 보호자이자 아내인 강지영이었다. 강지영은 나를 발견하고 고개를 숙여 다소곳하게 인사를 건넸다.

    나도 그녀와 똑같이 고개를 숙였다.

    손정균이 유쾌하고 익살맞은 사람이라면 아내인 강지영은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이었다.

    성격이 정반대인 두 사람은 참 잘 어울린다고, 나는 입원할 때부터 생각해 왔다.

    “우리 여보 왔어요?”

    손정균이 강지영에게 다가가 강지영의 볼에 입을 맞췄다.

    강지영은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돌렸고, 손정균은 강지영의 반대편 볼에도 끝내 입을 맞췄다.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던 사람이 어린 왕자를 집필한 생텍쥐페리로 알고 있다.

    그런데 생텍쥐페리의 말이 틀렸다고 나는 생각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인다.

    손정균, 강지영 부부가 지금 내 눈앞에서 보여 주고 있는 행동에서 나는 부부간의 애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정말 중요한 것이라면 오히려 눈에 보여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부부에게 퇴원 잘하라는 작별 인사를 하고 당직실로 돌아갔다.

    2년 차 허수현이 혼자서 당직실을 지키고 있었다.

    오더 넣는 업무가 밀렸는지 키보드를 분주하게 두들겨 댔다.

    나는 손정균에게 받은 보약을 캐비넷에 넣으며 허수현에게 물었다.

    “바빠? 도와줄까?”

    * * *

    불행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사소한 균열에서 시작되는 법이었다.

    그 날 저녁.

    정규 스케줄이 끝난 밤 9시.

    마스크 팩을 하고 휴식을 취하고 있던 내게 한 통의 전화가 들이닥쳤다.

    “치프.”

    나 대신 전화를 받은 허수현이 나를 불렀다.

    “왜?

    “스테이션에서 치프가 필요하다는데요. 꼭 좀 와 달래요.”

    “그러니까 뭐 때문에?”

    “보호자가 치프를 꼭 보고 싶다고 했대요. 치프를 보기 전에는 병동에서 안 나가겠다고 버틴다나 뭐래나.”

    간만에 진상이 출현한 건가.

    휴식을 방해받아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나는 가까스로 삼켰다.

    병동에서 나만큼 진상 환자나 보호자를 잘 처리하는 사람은 없었다.

    즉, 내가 나서지 않는다면 스테이션은 동맥경화에 걸려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마스크 팩을 벗은 후 당직실을 떠나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스테이션 앞에 등산복을 입은, 한 쌍의 부부처럼 보이는 남녀가 서 있었다.

    나이는 50, 60대쯤으로 보였다.

    보고 또 봐도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흉부외과 병동에 상주하는 환자와 보호자의 이름과 얼굴은 내가 모조리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분들, 우리 병동 보호자 분 맞아요?”

    나는 대뜸 스테이션 간호사에게 물었다.

    “아… 그 말씀을 안 드렸구나. 오늘 퇴원하신 손정균 환자분 부모님이세요.”

    이제야 아귀가 들어맞았다.

    손정균을 간호한 이는 손정균의 부모가 아닌 아내였으니까.

    “아… 그랬군요. 반갑습니다. 손정균 환자 주치의 이믿음이라고 합니다.”

    나는 뒤늦게 손정균의 부모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두 사람은 내 인사를 받지 않은 채 무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꼭 내가 그들의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심상치 않은 문제가 터졌음을 직감했고 그 직감은 불행하게도 틀리지 않았다.

    “당신이 사람이야? 수술 제대로 한 거 맞아! 죽은 우리 아들 살려 내! 우리 아들 살려 내라고!”

    부부의 울음 섞인 통곡에 나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뭐야, 손정균이 죽었다고?

    아침까지만 해도 나랑 멀쩡하게 대화를 나눴던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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