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제2장 살아야 하는 사람(3)
“이번 수술 말입니다.”
신원효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시켜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신부님, 그동안 봉사에 전념하며 고생길만 걸었습니다.”
“…….”
“그런 분이 허망하게 돌아가신다면 참담한 기분일 것 같군요.”
신원효의 말에서 이태선 신부를 향한 애정이 듬뿍 묻어났다.
어쩌면 신원효에게 이태선이란 영적인 아버지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재벌가의 바쁜 일정 속에서도 병문안을 오는 사이니까 말이다.
재벌과 신부라…….
흔치 않은 조합에 어색함을 느끼며 나는 말을 이었다.
“저희는 환자분을 살리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신부님 수술도…….”
“최선 같은 건 필요 없고요.”
신원효가 성급하게 내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인지…….”
“과정이야 어떻게든 상관없으니까 이번 수술을 무조건 성공시키라는 겁니다. 아시겠죠?”
신원효의 저돌적인 주장이 나는 기가 막혔다.
수술을 무조건 성공시키라니…….
이게 무슨 어린아이 투정 같은 소리란 말인가.
게다가 지금까지 잘 지켜 오던 매너는 밥 말아 먹고 해치웠나?
“그 말씀은 주치의로서 듣기 불쾌하네요.”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반격에 나섰다.
“방금 하신 말이 어떻게 들리는지 전무님 입장에 빗대어 드릴까요?”
“어디 한번 해 봐요.”
“이번 달 부서 실적을 저번 달보다 20퍼센트 더 올려놔. 무조건.”
“…….”
“이게 얼마나 야만적인 짓입니까? 아무 상황도 고려하지 않고 우격다짐으로 목표를 강제하면 그게 이루어질까요?”
나는 신원효의 화법을 따끔하게 꼬집었다.
상대가 재벌집 막내아들이라도 해야 할 이야기는 해야 했으니까.
“…….”
“…….”
잠시 대화가 끊기면서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스테이션에서 근무 중인 간호사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나와 신원효의 얼굴을 번갈아 응시했다.
이 드라마 같은 상황의 끝을 궁금해하는 듯했다.
먼저 운을 뗀 것은 신원효였다.
“주치의 선생님도 의외로 한 성깔 하시는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잠깐 잊으신 거 아닙니까?”
신원효가 한 손으로 목을 어루만졌다.
손목에 찬 값비싼 명품 시계가 찬란한 황금빛을 뿌려 댔다.
계급의 차이를 알려 주겠다, 뭐 그런 심보인가?
“아니요,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환자 병문안을 온 환자의 지인이죠.”
“병원 안에서야 그렇겠죠. 하지만 병원 바깥에서도 제가 그 정도 레벨의 사람일까요?”
“수술에 실패하면 해코지라도 하겠다는 말투로 들리는군요.”
“글쎄요, 세상일은 모르는 거니까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겠죠.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신원효가 수행 비서와 함께 스테이션을 떠났다.
두 사람이 떠나자 지금까지 세 배로 작용하던 중력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부담감이 사라지고 팔다리가 가벼워졌다.
“이 선생님 방금 엄청 멋있어요. 신원효랑 말싸움도 하고.”
“재수 없어. 지가 수술을 얼마나 안다고 무조건 수술을 성공하래?”
“왕년에 망나니짓했다더니 그 성질 어디로 안 갔네요. 고생하셨어요, 이 선생님.”
간호사들은 일제히 내 편을 들어주었지만 내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
때마침 잃어버렸던 전생의 기억 한 조각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전생에 이태선 신부가 수술 후 사망하고.
그로부터 3개월 후 용인 스태프들이 싹 물갈이 되었던 것 같은데…….
그 배후에 신원효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 무지막지한 일을 벌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도.
그런 막돼먹은 심보를 가진 사람도 신원효밖에 없었으니까.
‘골치 아프게 됐네.’
나는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수술에 실패하면 존경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물론이요.
의국이 해체되면서 해외 연수권까지 날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기댈 수 있는 곳은 OPCAB의 성공뿐인가.
* * *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 수술 당일이 되었다.
그전까지 나와 김호 과장, 유지은은 일과 시간 이후 따로 시간을 빼서 OPCAB 훈련을 했다.
흔들리는 진동 마사지기 위에서 모형을 봉합하고.
좌우로 넘실거리는 저울 위에서 실험용 쥐를 해부하기도 했다.
그렇게 꾸준히 연습하면서 나는 희망을 보았다.
김호 과장이 과거 검객이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은, 빼어난 솜씨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훈련 초반에는 손을 다소 버벅거렸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손놀림은 가볍고 정교해졌다.
100점 만점에 85점은 받아야 성공하는 OPCAB에서 김호의 점수는 80점쯤 되었다.
벼락치기를 한 것치고는 대단한 점수지만 그렇다고 합격은 아닌 점수.
하지만 나는 수술이 성공할 거라 자신했다.
제1 보조인 내가 나머지 5점을 채워 줄 수 있으니까.
시험은 혼자 보는 것이지만 수술은 혼자 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OPCAB 수련 도중.
나는 신원효가 병동에 왔다 간 이야기를 김호에게 전했다.
“그 인간이 우리를 협박하고 갔구나. 의술은 손톱만큼도 모르는 녀석이 까불기는…….”
김호의 반응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원효의 무례함에 치를 떨었다.
그러면서도 수술에 실패할 경우 신원효가 할 수 있는 보복 조치를 두려워했다.
제아무리 사람을 살리는 의술이라도 경제 권력 앞에서는 꼼짝 못하는 것이다.
환자 위에 병원이 있고, 병원 위에 재단이 있다.
세상은 거꾸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해 볼까?’
수술 당일이자 오전 컨퍼런스 시작 전.
나는 이태선 신부의 몸 상태를 살필 겸 병실을 찾았다.
이태선 신부는 오늘도 어김없이 돋보기안경을 낀 채 성경을 읽고 있었다.
그의 곁에 보호자로 있는 동료 신부는 고개를 꾸벅거리며 졸기 바빴고.
“몸은 좀 어떠세요?”
“배가 좀 고픈 것 빼면 괜찮습니다. 원래라면 이 시간에 달콤한 믹스 커피를 한 잔 마셨을 텐데…….”
나를 바라보는 이태선의 눈동자에 믹스 커피 봉지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믹스 커피를 좋아한다는 이태선의 말에 나는 부쩍 친근감을 느꼈다.
이태선도 사람은 사람이구나.
“아침부터 성경을 읽으시네요?”
“아침이니까 더더욱 읽어야죠. 좋은 말씀을 하나 마음에 새기고 하루를 시작하면 그보다 더 좋은 게 없어요.”
“그럼 제게 추천해 주실 성경 글귀가 있나요?”
“선생님 직업을 생각하면 갈라디아서 6장 9절이 좋겠군요.”
이태선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의 성경 지식이 얼마나 해박한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6장 9절은 무슨 뜻이죠?”
“안 가르쳐 줄 겁니다. 선생님이 직접 찾아보세요.”
“성경을 손에 들고 계시면서 안 가르쳐 주시다니…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내가 볼멘소리를 하자 이태선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직접 찾아보는 수고를 해야 구절이 더 마음에 와닿을 테니까요. 너무 야속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태선이 그런 세심한 부분까지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퍽 놀랐다.
역시 이태선 신부는 이대로 죽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더 오래 살아서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밝히는 등대이자 촛불이 되어야 할 사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OPCAB은 절대 실패할 수 없었다.
이태선과 5분 정도 잡담을 나누고 나는 당직실로 복귀했다.
방금 나눈 내용 중 일부를 간호 기록지에 기록한 후 책장에 있는 성경을 꺼냈다.
“유물도 이런 유물이 없네.”
성경에 묻은 먼지를 휴지로 닦아 내며 나는 와락 인상을 구겼다.
굴뚝을 닦은 것도 아닌데 휴지가 금방 새까매졌다.
책 청소를 마친 나는 더듬더듬 갈라디아서 6장 9절을 확인했다.
그 순간 이태선이 내게 왜 이 성경 문구를 추천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어니, 포기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 * *
오늘 오전 첫 수술은 이태선 신부의 OPCAB이었다. 그래서 나는 제2 보조를 맡게 된 유지은과 수술실로 향했다.
“오늘은 저도 엄청 떨리네요.”
지은이는 평소답지 않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처음 어시스트 하는 OPCAB 수술인 데다가 환자는 무려 VIP고.
수술에 실패하면 재벌집 막내아들이 보복할 수 있는 상황이라서 부담을 느낀 모양이었다.
“너답지 않은데? 유지은은 겁을 모르는 거 아니었어?”
“상황이 보통 상황이 아니잖아요. 이렇게 살 떨리는 수술은 처음이에요.”
“글쎄… 내가 봤을 때는 너도 보통 사람이 아니야. 근무 첫날부터 나한테 봉합으로 맞짱이나 뜨자고 하고 말이야.”
내 농담에 지은이가 푸훗 웃음을 터뜨렸다.
긴장을 푸는 데는 웃음만큼 좋은 게 없는 법이었다.
“나름 강심장이라고 자부하는 저도 엄청 긴장하는데 선배는 긴장 안 되나 봐요?”
“평소보다 잘하려고 하니까 긴장하는 거지. 평소대로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긴장할 필요 없어.”
“선배 말대로라면요, 우리가 평소대로만 해도 OPCAB에 성공할 수 있다는 뜻이네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변수가 터지지 않는다는 가정하에서 나는 이번 수술이 성공할 거라 확신했다.
김호 과장은 왕년의 검객이었던 날카로운 감각을 되찾았고.
제1 보조는 회귀를 한 나였고.
제2 보조는 똑순이 지은이였고.
우리는 셋은 수술을 성공시키기 위해 피나는 노력까지 해 왔다.
이쯤 되면 OPCAB에 실패하는 쪽이 훨씬 이변이라고 볼 수 있었다.
문제는 수술 중에는 별의별 헤프닝이 다 터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변수 통제.
이번 수술의 성공 키워드는 바로 거기에 달려 있었다.
잡담을 나누면서 도착한 수술실.
우리는 계수대 앞에서 스크럽을 했다.
벅. 벅. 벅.
빨간 포비돈 용액이 묻은 솔로 손이며 손가락이며 손등이며 팔꿈치 등등을 힘차게 문질러 댔다.
스크럽을 끝내고 나니 한결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소독용 솔을 문지르면서 마음에 있던 찌꺼기들까지 함께 벗겨 냈으니까.
수술 장갑, 수술 가운, 광학 안경, 수술모를 착용하고 나와 지은이가 수술실로 입장했다.
수술 준비는 이미 완벽하게 되어 있었다.
드레싱 카트 위로 수술 도구들이 활짝 펼쳐져 있었다.
무영등의 환한 불빛을 반사하는 수술 도구들은 보석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전신 마취에 들어간 이태선 신부는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숨을 쉬고 있었다.
그의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했다.
만약 그가 꿈을 꾸고 있다면 어떤 꿈을 꾸고 있을지 궁금했다.
살갗에 닿는 수술실의 공기는 서늘했으며 콧속으로는 독한 소독약 냄새가 파고들었다.
삐이이. 삐이이.
환자 감시 장치는 기계음을 토해 내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바빴다.
어제와 오늘에 걸쳐 컨디션 관리를 했기 때문일까.
나는 평소보다 오감을 선명하고 또 종합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내 몸 상태만 놓고 보면 10점 만점에 10점이었다.
적어도 내가 수술에 걸림돌이 되는 일은 없을 듯해서 마음이 놓였다.
“수현아, 고생 많았다. 이제 들어가 봐.”
나는 수술대 옆에 서 있는 허수현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네, 치프. 파이팅입니다. 지은 선배도 파이팅이요.”
“야, 누가 보면 나랑 지은이가 싸우는 줄 알겠다.”
“헤헤, 그런가요?”
허수현이 멋쩍게 웃으며 퇴장한 후 나와 지은이는 각자의 위치를 잡았다.
제1 보조인 나는 집도의 자리 맞은편에 섰고, 제2 보조인 지은이는 집도의 자리 옆에 섰다.
지이이잉.
때마침 검객 김호 과장이 영화 속 주인공처럼 등장했다.
그는 무심한 눈동자로 이태선 신부와 환자 감시 장치, 그리고 나와 지은이, 마지막으로 스크럽 간호사를 훑었다.
“지금부터 좌전하행동맥 및 우관상동맥 협착에 따른 무인공 심폐기 관상동맥 우회술을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