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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181화 (181/257)

181화 제2장 살아야 하는 사람(1)

VIP 병동으로 향하면서 나는 곧 만나게 될 VIP의 정보를 떠올렸다.

이름은 이태선, 나이는 56세.

최근 10년간 아프리카에서 자원 봉사에 힘을 쓰고 있던 신부.

‘이 신부님을 이렇게 보는구나.’

나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오지에서 실천한, 꾸준한 봉사 활동으로 사람들은 차차 이태선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오지의 열약한 환경을 알리기 위해 이태선이 각종 인터뷰와 다큐멘터리 촬영에 응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런 경로로 이태선을 알게 된 사람 중 하나였다.

기회가 되면 꼭 실물로 만나고 싶다.

전생에서 그런 생각을 자주 했지만 이렇게 환자와 의사의 관계로 만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만간 이태선에게 닥칠 비극적인 결말을 알고 있는 상태라면 더더욱.

‘무슨 수를 써야 할 텐데…….’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으며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전생의 기억이 맞다면 이태선은 수술을 받고 일주일 후에 사망한다.

-이 신부님 대체 왜, 어떻게 돌아가신 거야?

당시 본원에서 4년 차였던 나는 이태선의 비보를 듣고 용인 흉부외과에 전화를 걸었다.

존경하는 사람의 죽음이라서 충격을 받았고.

이태선이 죽을병이 아닌 병으로 죽었다는 사실에 한 번 더 충격을 받아서.

-그게… 죄송합니다, 선배님. 위아래로 함구하라는 지시가 있어서…….

당시 전화를 받았던 2년 차는 더 큰 의혹을 만들어내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냥 넘어가기는 꺼림칙한 대답을 내놓았다.

마음 같아서야 심하게 다그쳐서 원하는 정보를 빼내고 싶었지만 나는 가까스로 선을 지켰다.

나는 엄연히 본원 소속이었다.

용인의 방침에 함부로 토를 달 수 없었다.

2년 차가 내 행동을 윗선에게 찌른다면 오히려 내가 더 곤란해질 수도 있었고 말이다.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간 세월.

나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가 회귀를 하고 마침내 이태선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태선이라는 이름이 기억 속에서 흐릿하게 지워질 때쯤에.

-띵동, 20층입니다.

엘리베이터 소리에 퍼뜩 정신이 깨어났다.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VIP 병동 로비를 훑었는데, 과연 VIP라는 명칭은 아무 데나 갖다 붙이는 게 아니었다.

20층은 병원이라기보다는 호텔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인테리어가 우아하고 세련되었다.

간호사들이 일하는 스테이션마저 호텔 데스크 같은 느낌을 풍겼다.

복도 쪽을 살피니 병실과 병실의 간격도 엄청나게 넓었다.

그사이 또 다른 병실이 있어도 될 만큼.

하지만 나는 이런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사람 간의 계급을 나누고 기를 죽이는 것 같아서.

뭐, 자본주의 사회이니만큼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것을 이해는 하고 있지만 말이다.

“이태선 신부님은 몇 호실에 계시죠?”

“2010호실에 가시면 됩니다.”

스테이션에서 병실을 물은 뒤 나는 걷기 시작했다.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일반 병동과 달리 VIP 병동은 삭막하기만 했다.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볼 수도 없었고, 다른 사람의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드디어 도착한 2010호실 앞.

나는 섣불리 병실에 들어가지 않고 심호흡을 했다.

전생의 이태선은 왜 죽었는지.

이번 생에서 그를 살리고 싶다면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청사진이 거의 다 그려졌을 때 나는 병실 문을 열었다.

드르르륵.

* * *

이태선 신부는 대각선으로 세워 놓은 침상 등받이에 허리를 기댄 채 성경을 읽고 있었다.

돋보기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빛이 진중했다.

내가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독서에 빠진 모습이었다.

“신부님.”

“…….”

“신부님, 주치의 이믿음이라고 합니다.”

“아… 미안해요. 성경을 보느라 정신 팔려서.”

이태선이 서랍장 위에 성경과 안경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반갑다는 표현이 어울리지는 모르겠지만, 반갑습니다. 이태선입니다.”

“이믿음입니다.”

나는 이태선이 먼저 내미는 손을 붙잡았다.

이태선의 손은 까맣게 타 있었으며 손가락 이곳저곳에 단단한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신부의 손이라기보다는 육체 노동자의 손처럼 보였다.

「하느님은 말씀을 하시고 하느님의 종인 우리는 그 말씀을 실천하고 따라야 한다. 입으로만 떠드는 거짓 선지자와 거짓 신도들은 결코 천국에 가지 못한다」

이태선 신부는 과거의 한 인터뷰에서 그런 과격한 발언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풍파를 겪은 그의 손이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하긴, 종교가 없는 내가 이태선 신부를 존경하게 된 것도 다 이런 매력 때문이었지.

“안 그래도 주치의 선생님하고 긴히 나눌 말이 있었는데, 잘됐습니다.”

“네, 얼마든지 말씀하시죠.”

“조속히 병실부터 옮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뜻밖의 제안에 내가 눈을 깜빡거렸다.

“혹시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암요, 있고말고. 듣자 하니 내가 머무는 이 병실에 병실료가 하루에 120만 원이라는데… 제가 이런 사치를 부려야겠습니까?”

이태선이 억울하다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관상동맥 협착증 진단을 받고 입원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병실에 와 보니 누가 이런 으리으리한 병실을 배정했다는 것이었다.

“사치가 아닙니다. 이것도 재단에서 제공하는 일종의 지원이죠. 신부님께서 그동안 고생하신 것에 비하면 사소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태선을 좋게좋게 타일렀다.

이태선이 소속된 봉사 단체는 신원 그룹 소속이었고, 우리 병원 역시 신원 그룹을 재단으로 둔 병원이었다.

신부 이태선이 값비싼 VIP 병실로 입원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

그 이유는 배후에 존재하는 신원 그룹의 존재 때문이었다.

“이 병실료로 도울 수 있는 이웃들을 생각하면 심장병이 더 심해질 것 같은데… 설마 주치의 선생님께서 그런 걸 바라진 않겠죠?”

이태선이 나를 점잖게 협박(?)했기에 나는 하는 수 없이 백기를 들었다.

과장님께 이야기를 해서 병실은 6인실로 옮기는 쪽으로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자신의 주관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사람.

이태선은 과연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병실 문제로 약간의 마찰을 겪은 후 이태선과의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었다.

나는 이태선의 병력과 가족력, 최근 그가 느끼고 있는 증상 등에 대해서 꼬치꼬치 물었다.

전생에 이태선이 수술 후 사망한 이유를 찾기 위해서.

집요하게 질문한 덕분에 입원 기록지에 작성되지 않았던 내용 몇 가지를 추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정보들이 그리 큰 단서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내가 중요한 정보를 놓친 것인지.

아니면 중요한 정보 근처에 도달하지도 못한 것인지.

애석하게도 나는 그 두 가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선생님, 이제 슬슬 저 말고 다른 환자도 봐야 하지 않습니까?”

대화가 잠시 끊겼을 때 이태석이 물었다.

그는 의사와 오래 대화하는 것마저 특별 대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네, 안 그래도 떠날 생각이었습니다.”

나는 수첩을 가운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저도 신부님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무엇이든 물어보시죠.”

“큰 수술을 앞두신 분치고는 너무 여유로워 보여서요. 비법을 여쭤봐도 될까요?”

전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나는 수술 전에 이태선 신부만큼 태연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심하게는 제발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환자가 있고.

아무리 간 큰 환자라도 최소 긴장하거나 초조한 모습은 보이는데, 이태선은 병실에 있는 내내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강심장도 보통 강심장이 아니었다.

“살고 죽는 것은 어차피 하느님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이태선이 차분하게 운을 뗐다.

“때가 됐다면 저를 불러들이실 테고, 아니라면 남아서 좀 더 일을 하게 되겠지요.”

“…….”

“어느 쪽이든 저는 따를 뿐입니다.”

“그래도 신께서 신부님의 목숨을 거두어 간다면 원망하는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심술궂은 질문을 던졌다.

종교가 없는 나라서.

신을 믿지 않는 나라서.

맹목적으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 나라서 던질 수 있는 질문이었다.

질문을 받은 이태선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내 머리와 마음을 투시해서 보고 있는 것처럼.

“좋은 일에만 하느님을 찾고, 괴로운 일에는 오히려 하느님을 원망한다라…….”

“…….”

“한마디로 싸구려 믿음이군요.”

“싸구려라서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을 수도 있는 믿음이죠.”

내가 한 번 더 압박하자 이태선도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믿음이란 즐거울 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괴로울 때 필요한 겁니다. 정작 괴로울 때 믿음으로 하느님께 기대지 못한다면 하느님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

“이 고통과 괴로움을 하느님께서 왜 내려 주셨는지 묵상하는 것. 묵상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것이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이지요.”

이태선의 모범 답안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종교를 믿지 않는 나도 새겨들을 만한 이야기였다.

이태선이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세상이 조금 더 오래 밝았을 텐데…….

이태선의 주치의가 되니 이태선의 갑작스러운 사망이 더 안타까운 나였다.

당신이 믿는 창조주가 어쩌면 나를 회귀시킨 것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지상에서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았기에.

입 밖으로 떠오르는 말을 간신히 억누르고 나는 병실을 떠났다.

* * *

그 날 저녁.

정규 스케줄을 마친 나는 회의실에서 김호 과장과 단둘이 대화 중이었다.

화제는 당연히 오늘 오전에 입원한 이태선 신부였다.

이태선 신부의 몸 상태.

심전도, 심초음파, 심장 CT의 검사 결과 등등.

이태선의 종합적인 상태를 고려해 우리는 함께 치료 계획을 수립했다.

“VIP라서 부담이 되긴 하지만 크게 어려울 건 없겠어. 평소대로 CABG(관상동맥 우회술)를 하면 될 것 같구나.”

“…….”

“믿음이 네 생각은 어떠니?”

과장이 주치의인 내 의견을 이례적으로 물었다.

그만큼 내가 과장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쨌거나 전생의 나였다면 당연히 과장의 의견에 동의했을 것이다.

현시점에서 이태선에게 가장 어울리는 수술은 관상동맥 우회술이었다.

딱히 뒤탈 날 것이 없는, 정석적인 판단이랄까.

만약 이태선이 본원 흉부외과나 타 대학병원에 간다고 해도 아마 똑같이 CABG를 하자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아니, 나만 알고 있었다.

전생의 이태선이 CABG 수술 후 사망했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정녕 CABG를 다시 하는 방향이 옳을까.

위험이 들이닥칠 것이 뻔히 보이는 길에 다시 발을 들여놓는 것이 맞는 것일까.

이태선을 살리기 위해서는 전생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야 한다.

나는 그런 판단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수술 후 환자의 단기 사망률이 낮고, 고령 환자의 회복에 도움이 되고, 수술 전후의 심근경색과 심방세동 확률을 줄여 주는 수술을 과장에게 제안했다.

OPCAB

무인공 심폐기 관상동맥 우회술.

심장을 정지시키지 않고 박동하는 심장 위에서 문합을 하는, 고난이도의 흉부외과 수술을.

“OPCAB? 믿음아, 너 제정신이니?”

놀란 과장이 눈을 부릅뜬 채 물었다.

이 시기만 해도 OPCAB은 아직 널리 퍼지지 않아 대다수의 흉부외과의들이 꺼려 했다.

하지만 이태선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오직 OPCAB뿐이라고 나는 믿었다.

그래서 더더욱 물러설 수 없었다.

“과장님, 제게 OPCAB을 성공시킬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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