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제1장 긍지(5)
지은이의 합류로 의국의 틀이 완벽하게 잡혔다.
첫째로 부족했던 인원 문제가 해결되었고, 둘째로 1, 2년 차의 실기 및 처방을 교육하는 문제가 해결되었다.
나 같은 경우 하루에 서너 번씩 수술에 들어가서 현실적으로 1, 2년 차를 챙기기 힘들었다.
쉽게 말해 교육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부족한 시간을 일과 후에 채우려고 발악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용인 신원대학교 병원은 권역 외상 센터라서 환자들이 쉴 틈 없이 몰려왔다.
그래서 일과 후라고 해도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버티고만 있던 시기에 때마침 지은이가 구세주처럼 나타났다.
지은이는 비타민처럼 생기발랄한 성격.
전생에서 나보다 더 야무졌던 재능으로 의국의 중심을 잡아 주었다.
지은이의 합류로 나는 숨통이 확 트였다.
항상 다른 사람들의 버팀목이 되려고 노력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기대보니 그 편안함과 아늑함은 상상 초월이었다.
그렇게 근무 환경과 교육 환경이 갖춰지면서 1, 2년 차들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성장의 대명사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났다.
주치의로서 환자 관리가 섬세해졌으며 오더를 처리하고 처방하는 솜씨까지 수준급이 되었다.
지은이가 병동에서 1, 2년 차의 교육을 맡았다면 나는 수술실에서 1, 2년 차를 교육했다.
수술이 끝나면 함께 어시스트했던 레지던트를 휴게실로 불러냈다.
그 친구가 잘한 점과 잘못한 점을 알려 주고 교수님 별로 선호하는 수술 스타일도 전수해 주었다.
“아… 치프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아까 교수님이 절 보면서 왜 미간을 찌푸리셨는지 알 것 같아요.”
“…….”
“박 교수님은 천천히, 그리고 꼼꼼하게 수술하는 타입이셨네요. 그것도 모르고 시야 확보하기도 전에 세척을 해 버렸으니…….”
“그래, 교수님 입장에서는 네가 건방지게 수술을 재촉하는 것처럼 보였을 거야.”
“사실 그런 건 교수님이 제게 직접 말해 주셔야 하는 건 아닌가요?”
허수현이 억울함을 토로했다.
텔레파시가 가능한 초능력자도 아닌데 교수의 속마음을 어떻게 읽느냐는 것이었다.
그 마음을 모르는 바는 어쩌겠는가.
이런 게 다 사회생활이니…….
“받아들여야지. 수술도 결국 사람이 하는 거라서 사람이 묻어날 수밖에 없는 법이거든.”
“…….”
“대신 박 교수님은 네가 실수해도 크게 꾸짖지는 않으시잖아? 너한테 유리한 것만 기억하면 안 되겠지?”
“옛썰! 명심하겠습니다.”
허수현이 거수경례를 붙이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장경철의 폭행으로 얼룩졌던 마음의 상처와 그늘은 더 이상 허수현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녀석 원래 이렇게 까불까불한 녀석이었나.
서서히 드러나는 허수현의 개성을 확인하고 나는 속으로 웃었다.
어쨌거나 1, 2년 차들이 야무지게 성장하고 일 처리를 하면서 의국은 활기를 되찾았다.
간호사, 환자, 보호자, 교수들은 병동 분위기가 좋다며 엄지를 척 치켜세우기 바빴다.
지금 상태만 유지해도 과장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은 낙승처럼 보였다.
1년짜리 해외 연수권을 미리 받아도 될 것 같았다.
의국의 개혁과 안정화는 이미 이루어졌으니까.
하지만 나는 상황을 낙관하되 방심하지는 않았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리고 한 사람의 인생에 느닷없이 엿을 선물하는 존재가 바로 인생이란 놈이었다.
파견 생활이 끝날 때까지는 아무것도 끝난 것이 아니었다.
* * *
“지은아, 너도 어지간하다.”
새벽에 기상해서 당직실을 찾은 나는 당직 근무 중인 지은이를 보고 기겁했다.
책상에 지은이가 봉합 연습을 한 모형들이 한 다발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나는 두 가지를 알아차렸다.
하나는 새벽에 응급 환자가 없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지은이가 봉합 연습에 진심이었다는 것.
“이렇게 안 하면 선배를 어떻게 따라잡겠어요?”
지은이가 그제야 손에서 봉합 도구를 떼어 냈다. 자기 손을 주무르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나랑 술래잡기 하는 거 아니잖아. 굳이 왜 나를 따라잡으려는 건데?”
“산을 오르는 데 이유는 필요 없다. 산이 거기 있으니까 올라간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거랑 비슷해요.”
지은이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지만 나는 그 속에 감춰진 속내를 알았다.
지은이는 호승심이 강했다.
동일한 조건에 누군가가 자기보다 잘났다거나 위에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성격이 지금의 능력 있는 지은이를 만들었지만 나중에는 그 성격이 지은이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나는 알고 있었다.
지은이가 몇 년 뒤에 크게 좌절해서 의료계를 잠시 떠나게 된다는 사실을.
그때는 내가 지친 지은이의 손을 잡아 주리라.
“그래도 고맙네. 나를 산이라고 해 줘서. 동산이나 언덕이면 조금 서운할 뻔했거든.”
“맞아요. 영광인 줄 아세요.”
우리를 서로를 마주 보고 피식 웃었다.
잡담을 나누면서 나는 지은이의 등 뒤로 돌아가서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당직 근무를 서는 후배에게 버릇처럼 해 주는 서비스였다.
“치프, 의사 그만두면 마사지 숍 차려도 되겠어요. 어깨, 엄청 시원한데요?”
지은이가 농담을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치프가 앉아요. 제가 어깨 주물러 줄게요.”
“난 됐어. 막 자고 일어나서 가뿐해.”
내가 사양했음에도 지은이는 나를 반강제로 의자에 앉혔다. 성의껏 내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물론 성의에 비례해서 어깨가 시원해지지는 않았다.
지은이는 손아귀 힘이 약했던 데다가 손도 작았으니까.
하지만 안마를 받으면서 불쑥 생각나는 게 있었다.
그동안 지은이가 이 작고 여린 손으로 다른 서전들을 따라잡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지를.
전생의 나는 지은이가 천재라고 생각했다.
여성 서전이 황폐하다시피 한 흉부외과에서 독보적인 실력을 뽐냈으니까.
그 밑바탕에는 당연히 하늘이 준 재능이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뒤죽박죽으로 놓인 모형 봉합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은이의 실력은 재능이 아니라 노력에서 온 것이라고.
두 번째 인생 시작하고서야 간신히 지은이에 대한 오해를 풀다니…….
인생이란 확실히 얄궂은 녀석이었다.
지은이가 노력파라는 걸 알았으면 지은이에게 좀 더 마음을 열었을 텐데…….
강태섭에게 도망치고 지은이를 따라간 병원에서 내 실력을 발휘했을 텐데…….
전생의 기억과 함께 피어오르는 후회와 미련을 나는 고이 접어 날려 버렸다.
나는 인생 2회 차를 살고 있었다.
전생의 과오들을 바로잡을 기회와 여유를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이번 생에서는 적어도 전생과 똑같은 실수는 하지 않으리라.
“어때요? 시원해요?”
어깨 안마를 끝낸 뒤 지은이가 물었다.
나는 예의상 시원하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손님이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방금 받으신 어깨 마사지 유료 서비스였던 거 아시죠?”
“…….”
“오늘 야식은 선배가 쏘세요. 전 오늘 매콤한 닭발이 먹고 싶네요.”
지은이가 장난꾸러기처럼 웃으며 말했다.
“…지은이, 너 이렇게 배신 때리기니?”
“배신이라니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곧 돈인데요. 세상에 공짜는 없다 모르세요?”
“그럼 내가 네 어깨 주무른 것도 유료야. 서로 없던 걸로 해.”
“제가 선배보다 5분이나 더 주물렀거든요? 서비스 시간이 다르니까 없던 걸로 할 수는 없어요.”
지은이의 억지에 결국 내가 백기를 들었다.
후배가 닭발 먹고 싶다고 투정을 부리는데 그게 못 들어 줄 일도 아니고 말이다.
닭발은 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 것인가?
이것을 소재로 지은이와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오전 컨퍼런스가 가까워졌다.
둘 다 짬밥이 있었던지라 오전 루틴과 컨퍼런스 준비를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끝냈다.
지이이잉.
회의실에서 잠깐 한숨을 돌리는데, 가운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콜폰이 아닌 개인 휴대폰에 연락이 왔다.
익숙하고 그리운 전화번호는 본원의 당직실 전화였다.
“여보세요.”
-치프, 저 막내 재호입니다. 잘 지내셨죠?
“우리 재호, 전화 한번 빠르다? 난 적어도 내년쯤에 전화가 올 줄 알았는데.”
-그게… 막내인 제가 치프께 직접 전화하는 게 좀 그래서요.
“…….”
-용인 근무시면 안 그래도 엄청 바쁘실 텐데 폐가 될 것 같기도 하고…….
윤재호는 내 농담을 힘겹게 받아들였다. 지은이였다면 편하게 받아쳤을 텐데 말이다.
하긴, 새파란 1년 차와 치프 사이의 간격은 크긴 크지.
“그냥 해 본 소리야. 진지하게 들을 것 없어. 그래서 용건은?”
더 놀렸다가는 윤재호가 울 것 같아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게, 어제저녁에 새로 부임할 과장님이 결정돼서요. 새 과장님에 대해 알려 드리려고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과장이라는 단어가 유독 크고 선명하게 고막에 침입했다.
존경하는 스승이 은퇴하고 그 뒤를 이을 후임은 누구일까.
3년 전 흉강경 수술을 선도하면서 타 병원보다 한발 앞서 나간 우리 흉부외과의 지휘봉을 잡을 사람은 누구일까.
-새 과장님은 강… 네, 선배. 지금 용인에 파견 나간 치프와 통화 중입니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윤재호가 딴 길로 샜다.
덕분에 한창 달아올랐던 내 기분에도 김이 샜다.
그나저나 성이 강이라면 설마 철천지원수 강태섭이 예상보다 일찍 부임하는 걸까.
강태섭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교감 신경이 활발하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근육은 팽팽하게 당겨졌으며 온몸에 화끈 열이 났다.
-죄송합니다. 치프, 잠깐 2년 차 선배가 묻는 말이 있어서.
“그래서 새 과장님 성함은?”
-새 과장님 상함은 강용식 과장님입니다.
“강용식 과장님?”
나는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전생의 기억 창고를 열심히 뒤져 봤지만 강용식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 봤다.
아무래도 회귀한 내가 시간선을 바꾸면서 새로운 인물이 과장으로 부임한 것 같았다.
“어떤 분인지는 알아?”
-자세한 건 모르지만 미국 유학파 출신으로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의국에 오셨을 때 뵈었는데 엄청 젠틀한 느낌이셨습니다.
“알았어. 전화해 줘서 고맙다.”
나는 윤재호와 통화를 끊은 뒤 인터넷으로 강용식을 검색해 보았다.
검색창에 인물 정보란에서도, 뉴스란에도 강용식에 대한 정보는 찾아볼 수 없었다.
강용식은 그야말로 수수께끼 그 자체인 인물이었다.
강용식이 미스터리한 인물이었으므로 본원의 미래 역시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불투명했다.
에이, 아무리 나쁜 놈이라도 설마 강태섭보다는 낫겠지.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을 나는 애써 삼켰다.
* * *
그 날 오전.
컨퍼런스 중에 모처럼 깜짝 이슈가 있었다.
김호 과장이 오늘 중으로 VIP가 입원한다는 소식을 전했던 것이다.
과장이 신경 쓸 정도의 VIP 입원은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큰 이벤트였다.
당연히 교수부터 레지던트까지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VIP는 우리 신원 재단에 관련된 분이고, 제일 위층 VIP 병동에서 생활하실 겁니다. 주치의는…….”
과장의 가느다란 눈매가 레지던트를 훑다가 내게 고정되었다.
“이 선생이 맡읍시다. 아무래도 VIP를 1, 2년 차에게 맡기는 건 걱정되니까.”
“네, 과장님.”
“이 선생은 회진 끝난 다음 회의실에 있어요. 단둘이 할 말이 있습니다.”
그렇게 컨퍼런스가 끝나고 이어진 회진도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VIP 접대는 과연 의국의 위기가 될까.
아니면 반대로 의국의 기회가 될까.
회의실로 향하는 내 마음에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뿌연 안개가 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