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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179화 (179/257)

179화 제1장 긍지(4)

주변의 풍경이 휙휙 바뀌고 있었다.

같은 방향으로 걷는 사람을 추월하고, 반대 방향에서 오는 사람을 피해 가며 나는 안성민 교수의 연구실로 달렸다.

심장은 쿵쾅거리고 숨은 헐떡거렸다. 뜨거운 발바닥은 불이라도 난 것 같았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는 건 안성민의 안위가 걱정되어서였다.

뇌졸중, 심장마비 등등.

사람이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몇 가지 병명이 머리를 스쳤다.

그런 질병들은 대부분 처치를 받는 데까지 1분 1초를 다투는 응급 질환이었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지은이가 두 팔을 휘저으며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산토끼라는 별명은 괜히 생긴 게 아니었는데, 달리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깡충깡충 뛰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 정면을 바라보며 나는 계속 달렸다.

연구동에 도착한 후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하아… 하아… 치프. 이제 이야기해 주세요. 왜 이렇게 달렸는지…….”

지은이가 가쁜 숨을 내쉬며 물었다. 하긴, 내가 쌔빠지게 달려온 이유가 궁금하겠지.

“불안하게 안 교수님이 연락을 안 받으셔. 분명 2시까지 논문 정리해 달라고 했는데.”

“고작 그게 이유예요?”

지은이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치프, 안 교수님 스토커예요? 아니, 스토커도 선배처럼 지독하게는 안 하겠다.”

“인마, 그게 나한테 할 소리니?”

나는 짓궂은 농담을 하는 지은이의 머리를 꽁 쥐어박았다.

최근 안성민의 건강에 문제가 있었던 사건을 언급해 주었다. 흉강경 수술 중에 실신했던 사건 말이다.

“그런 건 미리미리 말씀해 주셨어야죠.”

“성질 급하게 스토커 취급한 사람이 누구인데?”

지은이와 티격태격하는 사이 도착한 602호.

엘리베이터 맞은편에 있는 602호가 안성민의 연구실이었다.

제발 여기까지 땀나게 달려온 게 헛수고가 되기를.

연구실에 들어가면 안성민이 낮잠을 자고 있거나 휴대폰을 놓고 집에 돌아간 것이기를 나는 간절히 바랐다.

끼이이익.

‘아…….’

열려 있는 연구실에 입장한 순간.

책상 앞 바닥에 엎드려 쓰러진 안성민을 확인한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손끝과 발끝에 힘이 스르르 힘이 빠져나갔다.

“교수님, 괜찮으세요?”

금방 정신을 차린 나는 안성민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며 안성민을 불렀다.

의식을 잃은 안성민은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흉곽의 움직임을 살피니 미동이 없었고 손가락을 대어 본 코끝에서는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심장마비가 제일 유력한 상황이었다.

흉부외과의에게 심장마비라니, 운명의 여신이란 이처럼 모질고 혹독한 존재였다.

“지은아, 1층에 제세동기 있으니까 가져 와.”

“1층에 제세동기가 있었어요?”

“왼쪽 층계 벽면에 붙어 있어.”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어디를 가든 제세동기의 위치를 기억해 두는 게 직업병이었으니까.

지은이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나는 안성민의 옆구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의 셔츠 앞섬을 풀어 젖힌 후 서로 깍지를 낀 두 손으로 흉부 압박을 시작했다.

퍽! 퍽! 퍽! 퍽!

흉부 압박을 할 때마다 안성민의 육신이 뭍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팔딱거렸다.

전생에서도 그렇고, 이번 생에서도 그렇고 병원 동료에게 응급 처치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일까.

안성민이 심장마비로 쓰러졌다는 사실이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항상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라고 생각했거늘…….

이제 보니 의사도 언제든지 환자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일 더하기 일처럼 당연한 진리인데 이 단순한 진리를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집중하자, 믿음아.’

머릿속에서 뻗어 나가는 잡념을 물리치고 나는 CPR에 집중했다.

흉부 압박을 마친 후에는 안성민의 기도를 확보하고 코를 한 손으로 막고 인공호흡을 시도했다.

처치하는 사람이 의료인이라면 인공호흡을 병행하는 것이 좋았다.

일반인이야 요령이 없어서 인공호흡의 효율성이 떨어지니 오히려 안 하는 편이 더 좋았고.

흉부 압박과 인공호흡을 세 사이클 돌렸음에도 안성민의 병세는 차도가 없었다.

그의 심장은 여전히 태업 중이었다.

그의 의식은 내려간 스위치처럼 꺼져 있었다.

골든타임이 지난 건가?

지금 의미 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불안함과 초조함이 선을 넘어 절망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안성민에게 조금 더 빨리 전화를 했어야 하는데, 하는 후회도 들었다.

부정적인 감정은 그렇게 나를 암흑 속으로 끌어내리려 했지만 나는 끝내 그 감정들을 물리쳤다.

절망은 암담한 미래에서 오는 감정이고.

후회는 안타까운 과거에서 오는 감정이었다.

두 가지 다 현재에 살고 있는 내게 필요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현재에 살고 있는 내게 필요한 감정은 단 하나뿐이었다.

안성민을 반드시 살려 내겠다는 절실함.

나는 그 절실함을 담아 안성민의 가슴께를 주먹으로 4회 가까이 내리쳤다.

퍽! 퍽! 퍽!

precordial thump(흉부 타격법).

실전과 해부학에 능통한 흉부외과의가 펼치는 심폐소생술의 비기.

전기 자극을 주는 제세동기의 역할을 주먹으로 대신하는 필살의 처치법.

흉부 타격법으로 발생시킬 수 있는 전극은 2~5줄로, 이를 반복하면 심장이 정상 리듬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국민학교 시절 김요한을 살릴 때 썼던 비기가 다시 한번 펼쳐지고 있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 내 주먹은 그 시절처럼 솜방망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을 살리고 싶다는 절실함만큼은 그때와 똑같았다.

그래서일까.

나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겹쳐지는 듯한 기묘한 경험을 했다.

“선배! 제세동기 챙겨 왔어요. 빨리 교대해요.”

지은이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연구실로 헐레벌떡 달려왔다. 요란하고 시끄러운 발소리가 복도에 퍼졌다.

“…됐고, 넌 제세동기 세팅이나 해 줘.”

“치프야말로 숨 고르면서 세팅이나 하세요. 교수님보다 선배가 먼저 숨넘어가겠어요. 저 못 믿는 거 아니죠?

지은이가 앙칼진 목소리와 눈빛으로 나를 저격했다.

전생에서 강태섭을 피해 다른 병원으로 같이 가자고 제안할 때도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선택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전생의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당연히 믿지. 부탁한다.”

나는 자리에서 물러나 제세동기 세팅에 나섰다. 지은이가 인공호흡을 할 때를 맞춰 안성민의 가슴에 패치를 붙였다.

[심장 리듬 분석 중… 제세동이 필요합니다.]

“됐어, 이제 물러나.”

제세동기의 충천이 끝난 후 경고 알림이 들렸다.

나와 지은이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안성민과 거리를 벌렸다.

쿵!

제세동기에서 흘러나온 전류가 안성민을 강타하면서 안성민의 육신이 순간 움찔했다.

지은이의 믿음직스러운 CPR과 제때 도착한 제세동기의 활약으로 안성민은 CPR 5분 만에 의식을 되찾았다.

나와 지은이는 안성민을 되살린 뿌듯함을 음미하다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 순간만큼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짝!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하이 파이브를 나눴다.

다른 사람과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같은 행동을 하면서 사람을 살리는, 뜻깊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황홀한 경험이었다.

회귀한 내가 다시 흉부외과의를 택한 이유이기도 했고.

“이제 응급실로 가자.”

“네, 치프.”

신음을 흘리며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있는 안성민을 부축해 우리는 응급실로 이동했다.

* * *

심장 내과 병동, 312호실.

나와 지은이는 환자복을 입은 안성민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응급실 진료 후 실시한 심전도와 흉부 CT, 초음파 검사에서 안성민의 관상동맥 협착증 진단을 받았다.

좌전하행동맥 근위부에 죽상경화 파열 소견이 있었기에 단순 약물만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다음 주 중으로 스텐트 시술을 받기로 결정이 났다.

“이번에도 또 믿음이 네 신세를 지게 되었구나. 매번 이러니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안성민은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굳이 그런 마음이 드신다면 빨리 건강하게 나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행히 그건 자신 있단다.”

그제야 미소를 되찾은 안성민은 심장마비로 쓰러지기 전까지의 과정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실신하기 1시간 전부터 그는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쳤다고 했다.

호흡이 가빠지고 흉통이 가슴과 어깨로 쭉 퍼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그냥 피곤해서 그러려니 하고 무시했더니 증상이 점점 심해지더구나.”

“…….”

“나중에는 몸을 못 가눌 정도가 되었단다. 믿음이 네 전화를 확인했는데도 못 받았으니 말 다 한 거지.”

안성민의 설명을 듣고 나는 천운이라는 것이 존재함을 느꼈다.

때마침 내가 그때 전화를 했길래 망정이지.

전화가 좀 더 빠르거나 전화가 좀 더 느렸어도 안성민은 CPR을 받지 못해 큰 변을 당했을 것이다.

우리는 환자가 된 안성민과 대화를 나누다가 병실을 나왔다.

“치프도 앞으로 조심해요.”

병동으로 복귀하는 도중 지은이가 대뜸 경고를 날렸다.

“뭐를?”

“안 교수님 케이스 보고 느끼는 거 없어요? 치프도 몸을 너무 혹사하고 있다고요.”

“…….”

“교수님들 대신 응급수술 들어가고, 심지어 당직 근무까지 선다고 하던데.”

지은이의 사소한 충고와 걱정이 나는 고마웠다.

근래 가족을 빼고 나를 걱정해 준 건 지은이가 처음이었다.

워낙 천재에 무쇠 체력 이미지로 생활하다 보니 다들 내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일쑤였으니까.

솔직히 나도 지치고 힘들긴 했다.

기본적으로 맡은 일을 처리하면서 동시에 개인적인 공부를 하고, 또 거기에 위아래로 뒤치다꺼리까지 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곤죽이 된다.

다른 사람들은 편하게 내게 기대지만 정작 내가 기댈 곳은 없어 외롭고 막막하고 숨 막히는 기분이랄까.

그런데 그런 답답한 기분을 지은이가 헤아려 주었던 것이다.

당연히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나도 슬슬 컨디션 관리해야지. 뭐, 지은이 네가 있으니까 앞으로 큰 걱정은 없겠지만.”

“설마 치프 일을 제게 떠넘기겠다는 건가요?”

지은이가 팔짱을 낀 채 나를 흘겨보았다. 우리 사이에 순식간에 냉기가 흘렀다.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인데 표현이 조금 과격하네. 역할 분담이라는 말이 가장 정확하지 않을까?”

“…….”

“3년 차가 없어서 내가 3년 차 업무까지 도맡아 하고 있었으니까 말이야.”

“농담이에요, 농담. 그냥 해 본 말인데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시네요.”

지은이가 배시시 웃으며 경계하는 기색을 풀었다.

“어허, 너 출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치프를 놀려 먹니?”

“잘 모르겠어요. 저는 이상하게 치프를 골려 주고 싶어요.”

전생의 지은이가 내게 했던 말을 이번 생의 지은이가 똑같이 내게 하고 있었다.

회귀를 해도 바뀌지 않는 것은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지은이와 잡담을 나누면서 복귀하는 동안.

나는 진지하게 내 건강과 몸 상태를 생각하게 되었다.

안성민을 통해 의사와 환자는 한 끗 차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재물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고.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은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라는 말은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초집중과 초감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무아경만 해도 그랬다.

무아경에 진입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신비로운 경험이나 비법 같은 게 아니었다.

그저 잠을 잘 자서 건강한 몸 상태와 맑은 정신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병동으로 복귀한 후 나는 시원한 마스크 팩을 쓰고 침대에 누웠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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