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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178화 (178/257)
  • 178화 제1장 긍지(3)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야.’

    유지은의 시선이 흘깃 옆에 앉은 이믿음을 향했다.

    앞으로 같이 생활할 1, 2년 차와 대화를 하던 도중 우연치 않게 이믿음이 화제로 떠올렸다.

    그런데 1, 2년 차가 말하는 이믿음은 거의 상상 속의 존재였다.

    혼자서 관상동맥 우회술과 흉강경 폐절제술을 소화한다는 것이다.

    교수가 집도해야 할 수술을 레지던트인 이믿음이 소화한다는 사실에.

    이믿음이 평생 하나만 파고들어도 모자란 세부 파트(심장 전공, 폐·식도 전공)를 넘나든다는 사실에 유지은은 기가 막혔다.

    그렇다면 남은 결론은 하나뿐.

    1, 2년 차들이 오늘 막 출근한 자신에게 장난을 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생각의 방향을 바꾸니 모든 것이 이치에 맞았다.

    그래서 1, 2년 차와 이믿음을 역으로 골려 주기 위해 모형 봉합 시합을 제안했다.

    허풍 떨지 말고 이 자리에서 실력을 증명해 보라고 도발했다.

    그런데 웬걸?

    이믿음은 모형 봉합 시합을 하겠다며 미끼를 덥석 물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지는 쪽이 이기는 쪽의 소원을 들어주자는 내기까지 걸었다.

    마치 본인이 모형 봉합 시합에서 질 리가 없다는 것처럼.

    상황이 고무공처럼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튀고 있어서 혼란스러운 유지은이었다.

    “치프, 왼손 쓰세요?”

    그녀는 이믿음이 왼손에 니들홀더 쥔 것을 보고 물었다.

    “오늘은 왼손을 쓰고 싶어서.”

    “말이 뭔가 오묘하네요. 기본적으로 양손을 다 쓰시나 봐요?”

    “그런 셈이지.”

    이믿음이 빙그레 웃었다.

    사소하게 흘리는 이믿음의 미소에 유지은은 큰 감명을 받았다.

    자연스럽고 부드럽고 편한 미소는 이믿음이 평소 잘 웃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삭막한 흉부외과에서 저런 화사한 미소를 볼 수 있을 줄이야.

    그러면 이믿음이란 사람은 중간 없이 극과 극인 인물일 것이다.

    여유 넘치는 천재거나 웃을 줄밖에 모르는 바보거나.

    “그런데 치프, 정말 소원 들어주기 내기 같은 거 걸어도 괜찮겠어요?”

    “왜? 질까 봐 걱정되니?”

    “네, 치프가 질까 봐 걱정돼서요.”

    유지은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이믿음을 도발했다.

    “저 그렇게 물렁물렁하지 않아요. 소원권을 물러 달라고 부탁해도 소용없고요. 소원을 하찮게 쓰지도 않을 거예요.”

    “안 그래도 네 성격은 다 알아.”

    “오늘 처음 봤는데 제 성격을 어떻게 알아요?”

    유지은이 오류를 꼬집자 여유 넘치던 이믿음이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으음… 뭐, 그냥 하는 소리지.”

    “그럼 진짜 소원권 걸고 모형 봉합 시합 하시는 거죠?”

    “물론.”

    두 사람이 다시 한번 구두 합의하면서 세기의 대결에 막이 올랐다.

    레지던트들은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개중에는 둘 중 누가 이길지를 두고 내기를 하는 레지던트도 있었다.

    “배당이 어떻게 되니?”

    유지은은 내기를 주도하는 레지던트에게 직접적으로 물었다.

    “…진짜 말씀드려요?”

    레지던트가 유지은의 눈치를 보며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편하게 말해 봐.”

    “사실 내기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전부 다 치프한테 걸어서요.”

    “매정들 하시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꺼내는 줄은 모르고. 그럼 내가 나한테 걸게.”

    “…….”

    “내가 이기든 지든, 그걸로 배달시켜 먹으면 되니까.”

    유지은은 이믿음뿐만 아니라 자신을 평가 절하하는 후배들에게도 한 방 먹여 주기로 결심했다.

    타인의 무시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이것이 유지은의 좌우명이었다.

    타인의 무시에 익숙해지는 순간.

    타인의 무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는 잠재력과 가능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유지은은 그동안 타인의 무시와 싸우며 성장해 왔으며 오늘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두 분 다 준비되셨죠?”

    초시계를 손에 쥔 허수현이 두 사람에게 물었다.

    유지은과 이믿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둘, 셋 세고 시작할게요. 단순 봉합, 수직 매트리스 봉합, 수평 매트리스 봉합, 연속 봉합을 다섯 바늘씩 꿰매 주세요. 봉합 끝내신 분은 머리 위로 손입니다.”

    “…….”

    “하나, 둘, 셋.”

    허수현의 외침이 당직실에 퍼졌다.

    끼기기긱.

    유지은은 오른손에 쥔 니들홀더로 봉합침을 쥐고 모형 피부에 바늘을 운침했다.

    피부의 한쪽 면에 바늘을 완전히 통과시킨 후 그 반대 면에도 똑같이 바늘을 통과시켰다.

    양손으로 봉합사를 적당히 잡아당기자 봉합사에 장력이 생겼다.

    장력, 벌어진 상처를 오므려 주는 봉합사의 힘.

    이후 봉합사를 시계 방향으로 두 바퀴 돌려 옭매듭을 만들었다.

    단순 단속 봉합의 첫 매듭을 꿰맨 순간 유지은은 깨달았다.

    이번 시합에서 지고 싶어도 질 수 없겠다고.

    손에 날개가 달린 것처럼, 손이 너무 가볍고 빨랐던 것이다.

    그렇다고 봉합의 정확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유지은은 예민한 감각을 유지하며 속도와 정확도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았다.

    ‘벌써 포기한 건가?’

    이믿음을 슬쩍 훔쳐보면서 유지은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믿음은 아예 봉합을 시작도 못했다.

    니들홀더와 봉합사를 만지작거리며 유지은이 봉합하는 모습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야, 뭐야? 치프가 밀리고 있는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지은 선배가 봉합하는 거 보고 질렸나 봐. 아직 시작도 못했어.”

    “와, 지은 선배. 봉합 엄청 잘한다.”

    시합을 지켜보고 있던 1, 2년 차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철석같이 믿고 있던 이믿음이 실력 발휘를 못한다는 사실에 한 번 충격을 받고.

    유지은이 생각보다 봉합을 잘한다는 사실에 두 번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이지.’

    그런데 유지은이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순간.

    봉합의 절반 정도를 마친 순간.

    이믿음이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마치 지금까지 일부러 봐주고 있었다는 것처럼.

    끼기기긱. 찰칵.

    끼기기긱. 찰칵.

    니들홀더로 봉합침을 조이는 소리.

    외과용 가위로 매듭 자르는 소리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졌다.

    유지은은 어느 순간부터 그 소리 때문에 정신병이 생길 것만 같았다.

    조금 과장하면 공포 영화 속의 살인마가 자신을 뒤쫓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초조하고 불안하고 무섭고.

    ‘아…….’

    벌어진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오는 탄식.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이믿음의 모형을 확인한 유지은이 경악했다.

    마무리할 봉합이 세 개 남은 시점에서 이믿음에게 추월을 당했던 것이다.

    실로 믿을 수 없는 속도였다.

    이쯤 되면 사람이 아니라 재봉틀 수준 아닌가.

    “끝!”

    이믿음이 먼저 손을 올리면서 시합은 결국 이믿음의 승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유지은은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아직 믿는 구석이 남았으므로.

    “속도만 보지 말고 완성도도 같이 봐야 해요. 아무리 봉합이 빨라도 완성도가 엉망이면…….”

    그녀는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속도가 빠른 만큼 정확도가 형편없을 거라 생각했던 이믿음의 봉합은 완벽했다.

    기본적인 단순 단속 봉합이야 둘째 치고.

    매듭을 처음과 끝에만 지어 정교한 손놀림이 필요한 연속 봉합.

    상처 부위의 평형을 맞추기 힘든 수직, 수평 매트리스 봉합 또한 흠잡을 곳이 없었다.

    즉, 이믿음은 속도뿐만 아니라 정확도에서도 유지은을 압도했던 것이다.

    부산에서 늘 최고 대접을 받았던 유지은은 난생처음 쓰디쓴 패배를 맛보았다.

    이믿음은 뛰어넘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절망감과 무력감도 맛보았다.

    그녀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1, 2년 차를 살피니 그들은 이미 결과를 알고 있었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나둘 그녀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원래 치프 봉합하는 거 보면 자괴감 들어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도 치프 제외하면 지은 선배가 최고입니다.”

    후배들의 위로를 받으며 유지은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인정할게요. 제가 졌어요.”

    * * *

    본관 지하 1층 카페.

    주말을 맞은 카페는 평일보다 한산했다.

    빈자리를 구경하기 힘들었던 테이블이 드문드문 비어 있었고, 스태프들보다는 면회를 온 환자와 보호자들이 더 눈에 띄었다.

    ‘이래서 지은이를 좋아한단 말이지.’

    카페 창가 쪽에 앉은 나는 피식 웃으며 지은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모형 봉합 시합에서 진 지은이는 처음에는 꽤 시무룩한 모습을 보였다.

    분명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손재주에서 다른 사람에게 밀린 것은 오늘이 처음일 테니까.

    그것도 아슬아슬한 수준이 아닌 압도적인 수준으로.

    하지만 지은이는 패배의 상처를 훌훌 털어 냈다.

    -치프, 평소 봉합 연습은 어떻게 했어요?

    -원래 오른손잡이인데 이제는 왼손도 오른손처럼 쓸 수 있다고요? 와, 진짜 대단하다.

    -선배만의 봉합 요령이 있어요?

    지은이는 내 솜씨를 질투하는 대신 봉합에 관한 질문을 산더미처럼 던졌다.

    열심히 노력해서 언젠가 나를 꺾어 보이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지은이의 오뚝이 같은 불굴의 정신력은 전생이나 지금이나 똑같았던 것이다.

    전생에는 지은이의 이런 모습을 참 부러워했었는데…….

    내가 회귀하면서 그 시절은 사라져 버렸고, 그 기억과 추억 또한 온전히 나만의 것이었다.

    회귀에는 외로움과 고독이 뒤따른다.

    나는 문득 그런 생각까지 해 보았다. 지금만 해도 나는 지은이를 잘 알고 있는데 지은이는 나를 까맣게 몰랐으니까.

    “갑자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요? 혹시 제가 선배를 추월할까 봐 벌써부터 견제하는 건가요?”

    “꿈 깨시죠? 산토끼 씨?”

    “어, 말도 안 했는데 제 별명을 어떻게 아세요?”

    지은이의 질문에 아차 싶었다.

    아까 전에도 비슷한 실수를 했던 것 같은데…….

    허물없이 이야기하다 보니 잠시 전생과 이번 생의 경계를 잊어버린 것이다.

    “정말 별명이 산토끼야? 그냥 해 본 소리인데.”

    나는 금방 감정을 추스르고 시치미를 뗐다.

    먼저 일을 벌여 놓고 후에 둘러대는 기술은 1살 때부터 이골 날 정도로 해 왔다.

    “네, 제가 귀가 좀 큰 편이거든요. 달릴 때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어다니기도 하고요.”

    “…….”

    “치프 입에서 그 별명을 들으니까 뭔가 감회가 새롭네요.”

    나는 지은이와 30분 정도 대화를 나누다가 병동으로 복귀했다.

    가는 도중 안성민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제 부탁한 논문 건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번이고 통화를 연결해도 무정한 신호 대기음만 들려왔다.

    연구실 전화기도, 개인 휴대폰도 답답한 침묵만 시켰다.

    도대체 왜지?

    주말이라 정규 수술 스케줄이 없고, 응급실에서 연락받은 환자도 없는데…….

    연구실에서 논문 작업 중인 걸 뻔히 아는 사람이 왜 전화를 안 받을까.

    순간 등골이 싸늘하게 식으며 불안한 예감이 밀려왔다.

    얼마 전 안성민이 수술 도중 실신했다는 사실과 응급실에서 수액을 맞았다는 사실.

    컨디션이 좋지 않았음에도 끝내 검사는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거기에 화룡점정을 찍는 것이 바로 지금 통화가 연결되지 않는 점이었다.

    이 모든 사실은 안성민에게 불상사가 일어났다는 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은아, 급한 일이 생겼다. 연구실까지 뛰자.”

    “갑자기요?”

    “그래, 갑자기.”

    나는 황급하게 발길을 돌려 연구동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모든 예상이 부디 내 머릿속에서만 일어난 헤프닝이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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