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177화 (177/257)

177화 제1장 긍지(2)

“오셨습니까?”

흉부외과 회의실에 있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나와 함께 면접을 볼 교수 곽준오가 도착했다.

“오, 믿음이 왔니?”

곽준오는 나를 반갑고 살갑게 맞아 주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교수들 사이에서 나는 복덩이로 통했다.

첫째로 교수들이 집도해야 할 응급 심장 수술과 폐·식도 수술을 내가 소화하면서 교수들의 업무 부담이 확 줄었다.

둘째로 내가 의국 레지던트를 관리하기 시작하면 1, 2년 차의 업무 효율이 부쩍 올랐다.

오더나 처방이 밀리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처치까지 금방 이루어졌다.

내게 수술 노하우를 전수받은 1, 2년 차는 수술방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펼치곤 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 또는 집단에 끼치는 영향은 의외로 거대하다.

회귀를 하고 나서야 나는 이런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항상 모든 사건이 끝난 후에야 찾아오는 깨달음에 얄미움을 느끼면서.

“지원자들이 의외로 엄청 많더구나. 세 명 정도 됐던 것 같은데.”

“네, 맞습니다.”

“여유가 있어서 지원서를 잠깐 훑어봤는데 한재석이라는 친구가 마음에 들더구나.”

곽준오가 한재석을 콕 찍는 순간, 나는 이번 면접이 녹록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내 마음 같아서야 면접도 안 보고 똑순이 유지은을 뽑고 싶은데…….

하필 곽준오가 꽂힌 지원자가 있을 게 뭐란 말인가.

‘한재석이라…….’

나는 한재석의 지원서를 훑으며 전생과 현생에 한재석과 접점이 있는지를 살폈다.

신원대학교 한 학년 후배인데 이상하게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는 게 없었다.

그러고 보니 지은이는 신원대학교 졸업생이 아니긴 했다.

다들 부정하긴 한다만 사실 모교 출신 지원자가 모교 병원에 지원하는 것에는 약간의 이점이 있었다.

지원자들의 실력이 대등하다는 조건하에서.

아무래도 모교 지원자 쪽에 마음이 더 가기 마련이었다. 팔이 안쪽으로만 굽듯이.

모교 출신, 번듯한 외모, 모난 곳 없는 성적.

분석을 해 보니 곽준오가 한재석을 낙점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곽준오를 설득할 수 있느냐, 없느냐.

아마 그 성패에 따라 지은이의 채용 여부가 결정될 듯 보였다.

잡담을 나누면서 흘러간 20분.

끼이이익.

세 명의 면접자들이 회의실에 들어와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회귀한 후 처음 보는 지은이를 향해 나는 하마터면 반갑다고 손을 흔들 뻔했다.

전생에서 우리가 인연을 맺은 것은 삼십 대 후반이었다.

회귀한 후에는 이십 대 후반에 처음 보게 되었는데, 지은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전생보다 조금 더 앳되어 보일 따름이었다.

지은이는 당연하게도 정장을 입었으며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처럼의 면접이 조금 떨리는지 구두 굽으로 바닥을 톡톡 건드리는 중이었다.

이 말괄량이도 긴장이란 걸 하던 시절이 있었구나.

나는 피식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면접장까지 오느라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다들 깜짝 놀랐죠?”

“…….”

“지원자가 이렇게 많아서 말이에요. 사실 우리도 깜짝 놀랐답니다. 흉부외과에서 이런 일은 평생 한 번 경험하기도 힘든데 말이죠.”

곽준오가 농담하는 말투로 부드럽고 편안한 분위기를 이끌었다.

교수진 중에서 의국 내 모든 스태프에게 친절하기로 유명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준비해 온 만큼만 보여 주세요. 결과에 상관없이 후회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을 마친 곽준오가 나를 쳐다보았다.

네게 면접을 볼 준비가 됐냐고 묻는 눈빛이었다.

곽준오가 눈빛으로 물었으므로 나도 눈빛으로 대답하고 지원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유지은 씨부터 자기 소개해 주시겠어요?”

* * *

면접자들이 떠난 후 일시적으로 고요해진 회의실.

먼저 정적을 깬 사람은 곽준오였다.

“믿음아, 넌 지원자들 어떻게 봤니?”

내가 간절하게 기다렸던 질문이 던져지고 말았다.

여기서 대답을 잘해야 지은이와 함께 일할 수 있었다.

‘나는 유지은의 열혈 변호사다.’라는 주문을 나는 속으로 수십 번씩 되뇌었다.

“일단 세 명 다 괜찮았습니다만… 유지은 지원자가 제일 마음에 들었습니다.”

“유지은이?”

내 선택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곽준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일단 지원서상의 능력은 제일 좋으니까요. 학교 성적도 그렇고, 인턴 성적도요.”

“…….”

“저희 병원은 아니지만 빅5 병원 흉부외과에서 3년 동안 별 탈 없이 근무하기도 했고요.”

“그래? 난 역시 재석이가 제일 나은 것 같은데?”

유순한 성격의 곽준오인데 레지던트를 뽑는 일만큼은 이상하게 양보가 없었다.

곽준오가 유지은의 단점을 조목조목 늘어놓기 시작했다.

“성별을 들먹이고 싶진 않지만 일단 여자라는 점을 무시할 순 없어.”

곽준오의 지적은 성차별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꼭 그렇게만 봐서는 안 됐다.

외과 수술은 일종의 육체 노동.

육체 노동에 있어서 남성이 여성보다 좋은 조건을 타고났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여성이 남성보다 언어나 감성을 다루는 면에서는 더 섬세한 것처럼.

“다른 병원에서도 3년 차에 몸이 안 좋아서 수련을 그만두고 나왔다고 하잖니.”

“…….”

“몸이 약하면 흉부외과 수술은커녕 흉부외과 생활도 못 버텨.”

곽준오는 지은이의 아픈 곳만 찔러 댔다.

그러면 지은이가 아파야 하는데, 지은이를 옹호하는 나만 가슴이 아파졌다.

괜히 나만 억울한 기분이었다.

‘이거 쉽게 안 넘어오네. 허 교수님이었으면 그냥 내 말에 오케이 하셨을 텐데…….’

호적수인 곽준오를 상대하면서 나는 지은이를 변호할 다른 논리를 찾기 시작했다.

곽준오의 마음을 되돌릴 좀 더 강렬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회귀를 통해 지은이의 잠재력과 실력을 알고 있어서 그렇지, 사실 내가 곽준오라면 나도 무난하게 한재석을 뽑았을 것이다.

“하지만 교수님, 유지은 지원자 보통 노력파가 아니던데요.”

나는 전생에서 지은이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무슨 노력?”

“1년 쉬는 동안 기초 체력을 키우기 위해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받았다고 합니다.”

“웨이트 트레이닝? 그런 건 지원서에 안 적혀 있던데?”

곽준오가 서류를 뒤지며 물었다.

지은이가 대수롭지 않은 사실이라 생각해서 지원서에 적지 않았으니까 안 적혔을 수밖에…….

지은이가 타 병원에서 3년 차에 수련을 그만둔 것은 사실 번 아웃 때문이었다.

일을 너무 열심히 하다가 몸과 마음이 다 연소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근 1년을 쉬는 동안 지은이는 꾸준히 웨이트 트레이닝을 받았다고 했다.

다시 흉부외과에 돌아간다면 그때는 결코 중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쉬는 동안 그렇게 독기를 품었기 때문에 나중에 잘될 수 있었다고 지은이는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면접 전에 유지은 지원자하고 잠깐 마주쳤었습니다.”

“…….”

“면접 대기 중에 간단한 운동을 하고 있길래 물어봤더니 웨이트를 꾸준히 했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자동차 악셀을 밟은 것처럼 가속도를 받아 지은이를 변호했다.

지은이가 웨이트 트레이닝을 꾸준히 할 만큼 자기관리에 철저하다는 사실.

그렇게 운동을 한 만큼 체력적으로 다른 지원자들에게 밀리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곽준오는 노력하는 사람을 좋아했기에…….

내 조리 있고 당당한 화술에 흔들렸을까.

곽준오는 아까와 달리 반박을 하지는 않았다. 한동안 침묵을 지킨 채 턱을 쓸어내릴 뿐이었다.

교수님, 반드시 지은이를 뽑아야 합니다.

넝쿨째 굴러온 호박을 차 버릴 순 없어요.

나는 속으로 곽준오가 마음을 돌리길 간절히 빌었다.

“믿음아.”

결심을 했다는 듯 곽준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결론은?

“그래, 유지은 지원자를 합격시키자꾸나.”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벅찬 감정을 최대한 자제하며 대답했다. 지은이를 너무 노골적으로 밀어준 티가 나면 곤란하니까.

그런데 이어지는 곽준오의 말이 나를 당황케 했다.

“짜식, 이제 보니 너도 남자구나.”

곽준오는 씨익 웃더니 내 어깨를 장난스럽게 툭툭 건드렸다.

그리고 번개처럼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아무래도 내가 지은이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느껴서 합격시키려 한다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이거, 괜한 오해를 산 것 같은데…….

난감하긴 했지만 해명을 하면 그게 더 우스울 것 같아서 유야무야 넘어가기로 했다.

옆으로 가든, 뒤로 가든 서울만 가면 되는 법이니까.

지은아, 용인에서 근무하게 된 걸 축하한다.

나는 지원서 속 지은이의 사진을 내려다보며 먼저 합격 소식을 전했다.

* * *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의국에서 근무하게 된 유지은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짝. 짝. 짝.

유지은의 소개에 1, 2년 차들의 박수 갈채가 터졌다.

당직실은 순식간에 파티룸이 된 것처럼 활기차고 생기가 넘쳤다.

면접이 끝난 지 이틀 만에 지은이는 합격 통보를 받고 흉부외과에 근무하게 되었다.

근무일은 공교롭게 토요일이었는데,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하라는 지시에도 불구하고 지은이는 굳이 토요일부터 출근하겠다고 우겼다.

평일에는 너무 바빠서 인수인계를 받기 힘들고.

사적으로 친해질 기회도 없다는 이유를 들면서.

과연 전생의 열혈 닥터다운 행동력이랄까.

“지금부터 말하고 호칭은 편하게 할게요. 어차피 이제 한 식구나 다름없으니까.”

지은이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호칭과 말부터 정리했다.

단숨에 분위기 메이커로 등극해서 1, 2년 차들과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지은이를 나는 마치 내 새끼 보듯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뜻하지 않은 만남이 꼭 나쁜 쪽으로 작용하는 건 아닌 듯했다.

10년은 뒤에 만나야 할 지은이를 벌써 만나게 된 걸 보면.

‘이걸로 나도 한시름 덜 수 있겠지?’

나는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지은이가 합류한 것만으로도 의국을 혁신하는 숙제는 절반 이상 성공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지은이는 처치와 수술 어시스트에 일가견이 있었으며 후배들 관리도 곧잘 했다.

강태섭의 본성을 꿰뚫어 볼 정도로 눈치도 빨랐고.

전생의 나보다 몇 배는 더 수완 좋은 지은이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나는 든든할 따름이었다.

“치프, 애들이 치프 봉합 솜씨가 장난이 아니라고 하던데…….”

1, 2년 차가 자기 업무를 보기 위해 뿔뿔이 흩어지자 지은이가 내게 관심을 보였다.

“저도 손 쓰는 거라면 자신 있거든요. 저랑 모형 봉합 누가 먼저 꿰매나 시합하실래요?”

지은이가 눈을 반짝거리며 내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기 싸움 따위를 의도한 것은 아니고, 순수하게 내 실력이 궁금해서 제안을 했을 것이다.

유지은은 원래 그런 아이였다.

호승심에 불타는 아이, 지고는 못 사는 아이.

전생에서도 내가 신수술을 개발한 것에 자극받아 본인도 신수술을 연구해 개발했으니까.

전생의 유지은과 현생의 유지은이 겹쳐지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치프, 제가 우스워요? 비웃음당할 정도로 실력이 없지는 않거든요?”

지은이가 토라진 말투로 되물었다.

“내 입으로 웃지도 못하니?”

“타이밍이 너무 절묘하잖아요.”

“비웃은 게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시고. 네 말대로 시합이나 해 보자.”

나는 흔쾌히 지은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안 받아 주면 받을 때까지 끈질긴 대시를 받게 되어 있으니까.

모형에 초시계를 세팅하고 우리는 책상 앞에 나란히 앉았다.

“그냥 하면 재미없으니까 내기를 걸자.”

“무슨 내기요?”

“이기는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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