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176화 (176/257)
  • 176화 제1장 긍지(1)

    흉강경 수술을 마친 후 나는 곧바로 응급실을 향했다.

    응급실은 평소와 같이 아비규환이었다.

    만취한 환자가 떠들썩하게 소란을 피우는가 하면 곡을 하는 듯한 보호자들의 울음소리, 처치 중인 스태프들의 다급한 외마디 같은 것들이 한데 섞여 아수라장을 연출했다.

    “교수님, 괜찮으세요?”

    지옥 속을 헤매다가 간신히 안성민을 발견했다.

    안성민은 듣던 대로 수액을 맞는 중이었는데, 표정이 퍽 환했다.

    그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긴장이 물러가고 안도감이 번졌다.

    “믿음이 왔구나. 수술은 잘 끝났니? 환자는 무사하고?”

    다른 인사 없이 안성민은 수술과 환자에 대한 정보부터 묻었다.

    수술하는 동안 내가 그를 걱정하기에 바빴다면 그는 환자와 수술을 걱정하기 바빴던 모양이었다.

    하긴, 침상에 누웠다고 해서 어찌 마음이 편했겠는가.

    집도의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수술방에서 퇴장해야 했는데.

    “네, 수술 완료 시간도 그리 늦지 않았고 경과도 좋습니다.”

    “…….”

    “수술 끝나고 찍은 Chest CT상에서도 별 이상 없으니 조직 검사만 확인하면 될 것 같습니다.”

    “휴우, 다행이구나. 나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았다.”

    안성민은 한참 내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본원 흉강경 팀에 있었다고는 해도 집도를 한 것은 아닐 텐데 어떻게 오늘 수술을 소화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했다.

    수술을 무사히 끝낸 내 솜씨에 감탄하기도 했다.

    나는 적당하고 무난한 방식으로 대답했다.

    연차에 어울리지 않는 대활약을 하고 주변 사람에게 그 이유를 설명한다.

    이젠 굳은살이 박일 정도로 익숙한 패턴이었다.

    “응급실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모처럼 내가 질문을 던졌다.

    안성민은 정확하게 어디가 불편한지, 병명은 무엇인지 돌려서 물어본 것이다.

    “그냥 과로로 인한 두통과 심계항진 정도로 추정하더구나.”

    “그럼 검사 결과는 별 이상 없으셨고요?”

    “그게… 따로 검사를 받지는 않았단다. 번거롭게 검사 같은 거 받을 필요 있겠니? 피로가 쌓여서 탈진한 게 분명한데.”

    “기왕 응급실에서 쉬시는데 검사받으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나는 안성민이 제대로 된 검사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같은 여유 시간이 언제 또 생길지 장담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야말로 건강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지금은 엑스레이 촬영하러 가는 것도 귀찮구나. 아니, 그냥 모든 게 다 귀찮아. 이대로 푹 쉬고 싶을 뿐이란다.”

    안성민의 목소리에는 그동안 그에게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가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살다 보면 누구나 그런 날이 있기 마련이었다.

    너무 피곤해서 손가락 하나 까닥거리는 것조차 귀찮은 날.

    안성민에겐 오늘이 그 날인 것 같았다.

    “오늘은 수술 신경 쓰지 마시고 푹 쉬십시오. 제가 과장님께 말씀드려서 스케줄 조종하겠습니다.”

    “고맙고 미안하구나. 두 번이나 신세를 지다니.”

    “아닙니다. 괘념치 마세요.”

    병동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캔 커피를 사서 쭉 들이켰다.

    당분과 카페인의 화학 작용으로 지쳤던 몸에 생기가 돌기 돌았다.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안성민처럼 과로로 쓰러지는 날이 올지 모른다.

    문득 그런 불안이 밀려왔다.

    * * *

    다음 날 오전 컨퍼런스.

    나는 회의를 진행하면서 안성민을 유심히 살폈다. 하루를 푹 쉬고 복귀했음에도 안성민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얼굴이 밀가루처럼 하얗게 뜬 느낌이었다.

    “이 선생, 뭐해요?”

    “죄송합니다. 그럼 다음으로 2년 차 허수현 선생의 케이스 발표가 있겠습니다.”

    남 교수의 지적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안성민을 신경 쓰느라 회의 진행을 잠깐 놓쳤던 것이다.

    안성민을 향한 불안이 시원하게 해소되지 않아서, 나는 컨퍼런스와 회진이 끝난 후 안성민을 직접 찾았다.

    “교수님, 몸 괜찮아지신 거 맞습니까? 제 눈에는 어제랑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나는 다짜고짜 물었다.

    “그래 보이니? 생각보다 피로가 많이 쌓였던 모양이구나. 나도 하루 쉰 걸로는 다 안 풀린 느낌이야.”

    안성민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도 오늘은 수술 스케줄이 없단다. 오전에 외래 보고 오후에 논문만 정리하면 되니까 오늘까지 쉬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네, 교수님.”

    더 나섰다가는 무례해 보일 수도 있었기에 나는 그쯤에서 물러났다.

    안성민을 볼 때마다 찜찜한 이유는 왜일까.

    안성민만 유독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이는 이유는 무얼까.

    그쯤에서 나는 내가 안성민을 신경 쓰는 이유에 대해 스스로 물었다.

    레지던트부터 펠로우, 교수까지.

    흉부외과 스태프들이라면 누구나 피로, 과로, 수면 부족에 시달렸다.

    오죽하면 수술 중 깜빡 잠이 들면 뒤로 넘어져야 한다는 말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할까.

    피곤한 게 일상인 흉부외과에서 안성민이 두드러지는 이유.

    아무리 고민해도 나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드르르륵.

    오전 수술이 1시간 뒤에나 있었기에 나는 당직실로 이동했다.

    당직 근무 중인 1년 차와 잡담을 나누다가 창가에 서서 바깥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용인의 풍경과 본원의 풍경은 꽤 많이 달랐다.

    본원은 도심에 위치해서 주변에 높고 낮은 건물이 천지였다.

    도로 위에는 항상 차가 있었다.

    그에 반면 용인은 다소 외곽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병원 뒤로는 푸른 산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었고, 시선을 멀리 두면 논과 밭도 구경할 수 있었다.

    인근의 교통량도 그리 많지 않았다.

    아직은 양 과장님 임기 중일 텐데.

    본원의 차기 과장은 결정됐을까.

    나는 본원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금방 접었다.

    지금은 본원을 걱정할 타이밍이 아니었다.

    내 걱정을 해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장경철을 쫓아낸 일은 의국을 쇄신하는 첫 단추를 꿴 것에 불과했다.

    지금부터 나는 후배 레지던트들을 교육하고 관리하며 동시에 앞으로 의국에 뿌리내려야 할 시스템을 정립해야 했다.

    그래야만 김 과장의 인정을 받아 해외 연수 기간을 늘릴 수 있을 테니까.

    “인호야, 나 30분 있다가 깨워 줄래?”

    “네, 치프.”

    나는 냉장고에서 마스크 팩을 꺼낸 후 얼굴에 붙였다.

    차가운 기운에 피부가 진정되고 콧속으로 향긋한 알로에 냄새가 퍼졌다.

    “치프, 마스크 팩도 하세요?”

    내 행동에 놀란 1년 차 서인호가 입을 쩍 벌렸다.

    “앞으로 가끔씩 하려고.”

    나는 피식 웃으며 소파에 대자로 누웠다.

    가만히 눈을 감은 채 마스크 팩이 선사할 수면 효과를 기다렸다.

    무아경은 회귀한 내가 그토록 성취하고 싶었던 경지였다.

    무아경에 빠지면 모든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진다.

    스태프들의 행동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동시에 내 처치도 집중할 수 있는 초감각을 얻게 된다.

    과연 어떤 조건을 만족시켜야 무아경에 돌입할 수 있을까.

    심각하게 고민하던 나는 바로 어제 그 해답을 찾았다.

    해답은 뜻밖에 허수현이 가지고 있었고 해답의 정체는 마스크 팩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수면이었다.

    어제 컨퍼런스 전에 나는 마스크 팩을 하고 2시간 정도 잔 다음 수술에 들어갔다.

    그 결과 무아경에 빠진 상태로 흉강경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설마 자면 되는 거였어?

    황당한 기분으로 기억 뒤져 보니 과연 무아경에 빠진 날들의 공통점이 있었다.

    수술 전날 충분하게 수면을 취했던 것이다.

    무아경의 비밀을 터득한 당시 나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을 수밖에 없었다.

    무아경의 비밀이 너무 단순하고 김새는 수준이라서.

    실력을 키운 상태에서 몸과 마음의 컨디션만 좋으면 되는 것이어서.

    하긴, 만성 피로를 달고 사니까 온전한 컨디션으로 수술할 기회가 별로 없긴 했지.

    무아경에 대한 잡념은 곧 눈 녹듯이 사라졌다.

    위대한 마스크 팩이 나를 꿈나라로 데려간 것이다.

    “치프, 치프 수술 들어가셔야 합니다.”

    “어? 어.”

    서인호의 외침에 나는 비몽사몽한 얼굴로 잠에서 깼다.

    마스크 팩을 하고 방금 누웠다가 방금 일어난 기분이랄까.

    기억을 도둑맞은 기분이랄까.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시간이 사라져 있었다.

    나는 말라붙은 마스크 팩을 떼어 휴지통에 버리고 곧장 수술실로 향했다.

    오늘의 첫 수술은 과장과 함께하는 인공판막 치환술.

    수술 부위는 좌심실과 좌심방 사이에 위치한 승모판막이었다.

    과장과 함께하는 수술이라 큰 부담이 되어 실수를… 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마스크 팩으로 이룩해 낸(?) 무아경으로 나는 대활약했다. 수술이 끝난 후 과장의 대찬사를 받았다.

    나는 이제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최고의 보약은 잠과 휴식이라고.

    * * *

    오전 수술을 마친 나는 당직실에서 서류를 살피고 있었다.

    장경철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3년 차 레지던트 모집 공고를 냈는데, 거기에 지원한 사람들의 입사 지원서를 보고 있던 것이다.

    ‘횡재도 이런 횡재가 없네. 일진이 좀 풀리려는 건가?’

    입사 지원서를 훑으며 나는 모처럼 행복을 느꼈다.

    한 명을 뽑는 자리에 무려 세 명이 지원했다.

    한 명도 구하지 못할 거란 걱정과는 정반대의 결과였다.

    하지만 ‘위기가 기회’라는 말을 거꾸로 하면 ‘기회는 위기’였다.

    지원자가 많다는 사실에 마냥 들떠 있을 수는 없었다.

    장경철의 대체 인력을 잘못 뽑았다가는 또 한바탕 홍역을 치를 테니 말이다.

    “으음…….”

    나는 레지던트들의 입사 지원서를 날카로운 매의 눈으로 확인했다.

    앞으로 2시간 뒤에 면접이 있었는데, 나 역시 면접관 중 한 명이었다.

    면접 전에 지원자들을 분석해 둬야 옥석을 가릴 질문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뭐야? 지은이가 여기 있었네?’

    지원자 중 낯익은 이름을 발견하고 나는 깜짝 놀랐다.

    유지은.

    그녀는 먼 훗날 국내 최고의 여성 흉부외과의로 손꼽히게 된다.

    지은이와는 전생에서 인연도 있었다.

    강태섭 밑에서 함께 3년 정도 교수 생활을 하며 친분을 쌓았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은이는 눈치가 빨랐다.

    내가 강태섭에게 신수술을 양보한 후 팽을 당한 것과 달리.

    지은이는 강태섭 곁을 떠나서 본인의 이름으로 신수술을 발표했으니까.

    -그거 알아요? 선배는 사람이 너무 물렁해요. 쉽게 말해서 호구라고요.

    -…….

    -강태섭에게 이용당하기 싫으면 이번에 나랑 용운대학교 병원으로 넘어가요.

    떠나기 전 지은이는 나를 회유했지만 나는 지은이에게 험한 말을 했다.

    너 따위가 강태섭 과장님의 높은 뜻을 감히 알겠냐고.

    내 말을 듣고 나서 지었던 지은이의 표정은 지금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경멸 그 자체였지, 아마?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반드시 과거의 나를 만나 뒤통수를 후려갈겼을 것이다.

    멍청한 놈아,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대충 돌아가는 꼴은 알겠네.’

    과거 회상에서 빠져나온 후 나는 현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했다.

    지은이의 본가는 용인에 있다.

    지은이는 과거 부산 분원의 흉부외과에서 수련했는데, 몸이 안 좋아 잠시 레지던트를 그만두고 본가에서 휴식을 취했다.

    건강을 되찾은 후 지은이는 본가가 위치한 용인 신원대학교 병원에 근무하기로 했다.

    …정도가 될 것이다.

    아마 전생에서는 장경철의 T.O가 없어서 지원을 못했으리라.

    그러니까 지은이가 용인에 지원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장경철을 쫓아낸 덕분이었다.

    ‘이번엔 지은이 덕을 한 번 봐 볼까?’

    나는 씨익 웃으며 당직실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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