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175화 (175/257)
  • 175화 제5장 장악(5)

    손에서 수술 도구를 놓친 안성민이 수술대와 멀어졌다.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치다가 벽에 등을 기댔다.

    누가 봐도 심상치 않은 상황.

    안성민의 돌발 행동에 수술실은 싸늘하게 얼어 버렸는데, 그 냉기 속에서 가장 먼저 정신 차린 사람은 이믿음이었다.

    “교수님, 괜찮으세요?”

    이믿음은 허물어져 가는 안성민을 부축했다.

    수술 전부터 하나둘 전조가 보이더니 결국 이런 참사가 발생하는구나.

    안성민의 처지가 딱함과 동시에 그의 몸 상태도 심하게 걱정되는 이믿음이었다.

    “수현아, 교수님 부축해서 수술방 밖으로 나가.”

    “네, 치프.”

    “믿음아, 무슨 맹랑한 소리를 하는 거냐. 내가 없으면 수술은 누가 하고? 이 수술은 반드시 내 손으로 끝내야만 해.”

    수술을 계속 이어 가려는 오기와 달리 안성민의 상태는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

    힘이 빠졌는지 자기 힘으로 서 있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나가서 쉬고 검사받으라는 이믿음의 제안을 안성민은 계속 거부했다.

    이믿음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도록.

    그렇게 주요 스태프들이 빠지면서 수술은 일시 중지되었다.

    벽에 걸린 수술 시계의 숫자만 하염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교수님, 10분을 쉬셨는데도 컨디션이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이대로라면 정말 아무것도 안 됩니다.”

    이믿음은 아까보다 더 강하게 의견을 펼쳤다.

    슬슬 초조해졌다.

    안성민이 손에서 놓친 수술 도구가 엄한 부위를 건드려 출혈을 일으켰을 수도 있었다.

    수술 시간이 더 이상 지체되면 환자 회복에 무리가 갈 수도 있었다.

    이제는 어떤 방향으로든 결론을 내려야 했다.

    “교수님, 결론적으로 대타가 없어서 수술을 계속하시려는 것 아닙니까?”

    이믿음의 당돌한 질문에 안성민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교수님 대신 집도하겠습니다.”

    이믿음의 당돌한 발언은 수술방에 다시 한번 폭풍을 몰고 왔다. 스태프들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눈빛으로 이믿음을 쳐다보았다.

    개흉 수술보다 손을 많이 타는 수술이 흉강경 수술이었다.

    그런데 한낮 레지던트가 흉강경을 집도하겠다고?

    “허… 그걸 말이라고 하니? 네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배우지도 않은 흉강경을 하는 건 억지란다.”

    안성민이 이믿음의 주장을 묵살했지만 이믿음은 포기하지 않았다.

    환자를 살리고.

    또 안성민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직접 집도하는 것뿐이었다. 현재로서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저는 본원 흉강경 수술 팀에서 3년 동안 어시스트를 했습니다. 흉강경에 대한 식견은 충분합니다.”

    “그러고 보니 네가 본원 흉강경 팀 멤버였구나.”

    “네, 교수님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번 수술을 소화할 자신이 있습니다. 믿어 주세요.”

    이믿음의 간절한 부탁이 끝난 후 찾아온 무거운 침묵.

    “휴… 내키지는 않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구나. 네게 흉강경을 맡기는 것 외에는…….”

    안성민은 어쩔 수 없이 이믿음의 집도를 허가했다.

    거의 20분을 쉬었음에도 몸은 정상으로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관자놀이 통증.

    까닭 없이 후들거리는 팔다리.

    안개가 낀 것처럼 뿌연 시야.

    이런 증상들을 안고 수술을 속행하는 건 무리였다.

    대타가 없어서 계속 고집을 피우긴 했다만 이제 본인의 상태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겁먹지 말고,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진행하렴.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하거라.”

    “네, 교수님. 푹 쉬십시오.”

    안성민과 안성민을 부축하는 허수현이 수술방을 떠났다.

    두 사람의 부재 때문일까, 수술방에 거대한 구멍 두 개가 뻥뻥 뚫린 것 같았다.

    공간이 훨씬 넓어진 듯한 착각도 들었다.

    “저도 잠깐 나갔다 올게요.”

    이믿음은 수술방을 나간 후 수술 장갑과 가운 등을 새로 착용했다.

    안성민을 부축하면서 오염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에.

    지이이잉.

    잠시 후 허수현이 헐레벌떡 수술방으로 복귀해 안성민의 근황과 전갈을 전했다.

    안성민은 응급실에서 수액을 맞으면서 휴식 중이다.

    몸은 안 좋지만 정신은 멀쩡하니 언제든지 조언을 구하라는 말을 전했다.

    “치프, 흉강경 할 수 있죠?”

    허수현이 물었다.

    하지만 그의 질문은 의심하는 질문이 아닌 신뢰의 질문이었다.

    얼마 전 이믿음은 교수가 집도해야 하는 폐동맥 복원술을 혼자 소화하는 미친 재능을 보여 주었다.

    그렇다면 흉강경도 소화할 수 있지 않을까.

    허수현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위기에 몰리면 항상 기대고 싶고, 또 무언가를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가 되는 사람이 바로 이믿음이었다.

    “별일 없을 거야, 분명. 나만 믿고 따라와.”

    “네, 치프!”

    허수현은 씩씩하게 대답하고 제1 보조 자리, 즉 이믿음의 맞은편에 섰다.

    “지금부터 흉강경 폐 절제술을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 * *

    엄밀히 말해서 나는 흉강경 폐 절제술을 집도해 본 적이 없었다.

    전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그렇다고 흉강경 수술이 두렵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전생에서 숙달한 흉강경 솜씨.

    이번 생에서 얻은 폐·식도 파트의 지식과 어시스트의 경험.

    이 두 가지가 합쳐진다면 처음 하는 수술이라고 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부터 흉강경 폐 절제술을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내시경 수술 도구를 손에 쥐며 벽시계를 힐끔거렸다.

    안성민의 건강에 문제가 생긴 이후 무려 30분 넘게 수술이 지체되었다.

    쫓기는 기분이 드는 건 피할 수 없었다.

    ‘다 필요 없어. 내 모든 걸 보여 주자. 그거면 돼.’

    굳게 결의를 다진 순간, 놀라운 변화가 찾아왔다.

    내가 그토록 도달하고 싶었던 경지, 무아경이 불쑥 찾아온 것이다.

    무아경에 빠져들자 오감이 예전에 비해 두 배 이상 증폭된 것 같았다.

    손에 쥐고 있는 수술 도구의 감촉이 좀 더 생생해졌다.

    삐이이이이, 삐이이이.

    평소에는 잘 듣지도 못하던 환자 감시 장치의 기계음이 또렷하게 고막을 때려 댔다.

    스태프들의 눈이 향하는 방향이나 손짓 같은 것이 한 번에 눈에 들어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간이 1배속이 아닌 0.5배 속으로 늘어지는 듯한 착각도 들었다.

    말 그대로 감각을 초월한 초감각이라고 해야 할까.

    이 황홀한 감각을 유지한 채 나는 집도의로써 첫걸음을 내디뎠다.

    먼저 오른손으로 내시경 카메라를 들었다.

    수술 부위가 아닌 그 주변부를 광범위하게 훑었다.

    혹시 안성민이 수술 도구를 놓치면서 폐에 상처가 생겼나 살피는 작업이었다.

    “어라? 치프, 수술 시야까지 혼자 확보하시게요? 너무 힘들지 않으세요?”

    “괜찮아, 필요할 때가 되면 강 선생님한테 부탁할 거니까.”

    여유롭게 대답하던 도중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내시경의 방향을 뒤로 돌렸다.

    왼쪽 폐의 좌하엽을 살피다가 심상치 않은 징후를 발견했다.

    그 징후는 내시경 카메라 시야의 사각에 있었다.

    그래서 스치듯 지나갈 수밖에 없었는데, 나는 그 짧은 순간조차 놓치지 않았다.

    무아경에 빠져 감각이 예민했기 때문이다.

    “찾았다. 종양 떼어 내기 전에 이 부분부터 봉합하자.”

    나는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좌폐 좌하엽 말단 부위에 내시경 카메라를 바짝 들이댔다.

    그곳엔 미세하게 찢어진 흉막이 존재했다.

    「안성민이 수술 도구를 놓치면서 폐의 어딘가에 외상이 발생했을 것이다.」

    내 예상이 족집게처럼, 예술처럼, 그림처럼 맞아 들어간 것이다.

    외과의만 느낄 수 있는 뿌듯함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와… 치프, 대박. 이런 게 숨어 있었네? 이걸 어떻게 알아보셨어요?”

    “이 선생님, 시력 엄청 좋으신가 봐요.”

    “이 정도 열상(찢어진 상처)이면 못 보고 지나치는 게 더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허수현에 이어 스크럽 간호사들까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게 무아경의 힘이지.’

    주변의 칭찬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 웃었다.

    무아경이 발동한 상태라 가까스로 미세 열상을 발견했다.

    평소라면 나 역시 열상을 못 보고 지나쳤을 것이다. 그리고 수술 후나 수술 중에 문제가 한 번 더 터졌겠지.

    나는 강 선생에게 수술 시야를 부탁했다.

    허수현에게는 수술 부위 고정을 부탁했다.

    이후 포트에 자동 봉합기를 삽입해 미세하게 찢어진 흉막을 봉합해 주었다.

    내시경으로 확인한 열상은 보기 좋게 닫혀 있었다.

    이제야 간신히 수술이 본궤도에 오른 것이다.

    “지금부터 예정된 수술을 진행하겠습니다. 너무 긴장하지도 말고, 너무 느슨하지도 말고, 마음의 균형을 잡은 상태로 따라와 주세요.”

    나는 당부의 한마디를 하고 집도를 시작했다.

    흉강경 수술은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빠르고, 완성도가 높았다.

    나는 스태프들의 행동들을 유심히 살피면서 내 처치에도 집중할 수 있었다.

    제갈량의 책사 역할과 여포의 장수 역할을 동시에 소화하고 있다면 과장일까.

    “강 선생님, 카메라 왼쪽으로 10도만 더 틀어 주세요.”

    “수현아, 스폰지 스틱으로 폐를 좀 더 들어 올려 봐. 수술 도구 들어갈 각도가 안 나온다.”

    “윤 선생님은 흉강경 도구 B타입으로 교체해 주시고, 거즈로 제 얼굴에 땀 좀 닦아 주세요. 시야 조심하시면서.”

    나는 지휘자가 되어 스태프들을 꼼꼼하게 조율했다.

    동시에 집도의로서 내가 해야 할 본연의 처치도 놓치지 않았다.

    나는 보비(전기 소작기)를 포트 안에 삽입했다.

    종양과 종양 주변에 있는 조직을 떼어 내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전기 소작기가 분출하는 뜨거운 열기에 폐를 고정하고 있는 폐인대, 폐정맥, 폐동맥 등이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서걱.

    전이가 우려되는 림프절은 초음파 절삭기로 도려냈다.

    수술 시야가 좁고

    수술 도구를 움직일 수 있는 각도도 좁고

    사용할 수 있는 수술 도구마저 한정되어 있었지만 나는 그런 어려움에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고난을 즐기며 내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받아들였다.

    남이 시켜서 하면 고생이고.

    내가 원해서 하면 경험이라고 하지 않는가.

    지금 진행하는 첫 흉강경 집도를 나는 온전히 경험하고 있었다.

    주변부의 정리를 마친 뒤 나는 2x3센티 크기의 종양을 전기 소작기로 지져서 절제했다.

    인내심을 가지고 펼치는 암 조직과의 사투.

    승자는 결국 나, 그리고 나와 함께한 스태프들의 몫이었다.

    텅!

    내시경 도구로 끄집어낸 암 조직이 곡반 위로 떨어졌다.

    언제나 그랬지만 이 조그만 녀석이 자라서 인간을 집어삼킨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내시경 카메라로 수술 부위와 주변부를 한 번 더 확인했으나 문제는 없었다.

    교수 안성민 없이 레지던트 두 명.

    그리고 스크럽 간호사 두 명만으로 고난이도 흉강경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 것이다.

    환자를 무사히 살렸다는 사실.

    처음 하는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사실.

    스태프들이 나를 너무 잘 따라와 줬다는 사실 등등.

    감격하고 또 감동할 것이 많아 순간적으로 눈물이 핑 돌았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저희들 힘만으로 흉강경을 하다니… 정말 믿기지 않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진짜.”

    우리는 벅찬 전우애를, 끈끈한 동지애를 느끼며 수술을 마무리했다.

    “와! 정말 교수님 없이 흉강경까지 해 버리네요? 선배, 이쯤 되면 괴물 아니에요?”

    수술방을 나와 가운과 마스크를 벗는데 허수현이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웃으며 농담조로 대답했다.

    “맞아, 나 괴물이야. 사람 살리는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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