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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169화 (169/257)

169화 제4장 파견(4)

장경철의 뻔뻔한 대답에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병원 바닥이 혹시 자갈 바닥이면 모를까, 정강이에 멍은 넘어져서 생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너 지금 나 놀리냐?”

나는 장경철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모처럼 온몸이 분노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에이, 제가 치프를 왜 놀립니까? 가장 있을 법한 이야기를 했을 뿐이에요. 치프는 다른 의견이라도 있나 보죠?”

장경철이 철판을 깐 낯짝으로 내게 되물었다.

“지금은 짤린 4년 차하고 네가 애들을 폭행했잖아. 숨기려고 해도 소용없어.”

“뭔가 오해를 단단히 한 모양인데, 그런 적 없습니다. 파견 첫날부터 생사람 잡지 마세요.”

“…….”

“군기를 잡을 생각이면 잡혀 줄 테니까. 없는 사실을 만들지는 말라고요.”

장경철이 일렬로 늘어선 레지던트들을 훑어보다가 회의실을 휙 빠져나갔다.

레지던트들이 우르르 장경철의 뒤를 따랐다.

분하지만 당장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보다 장경철이 레지던트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는 것을.

나야 오늘 막 파견 나온 본 원 스태프일 뿐이지만

장경철은 3개월에서 1년 넘게 그들과 함께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하지만 이로써 또 하나의 사실이 확실해졌다.

레지던트들은 폭행을 당하고 있으며 그 주인공은 장경철이라는 사실 말이다.

의국의 쇄신하기 위해서 나는 장경철 퇴치를 첫 번째 숙제로 삼았다.

머저리 같은 놈.

지금이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치겠지만 곧 알게 될 거다.

날 자극한 게 네 인생 최악의 실수였다는 걸.

* * *

“네, 도착하셨어요?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받고서 나는 주차장을 찾았다.

약속한 장소에서 만난 사람은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용인까지 한걸음에 달려온 건 아파서가 아니었다.

내게 부탁받은 물건을 전해 주기 위해서였다.

“음식이나 생필품 같은 걸 챙겨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캠코더를 챙겨 달라고 하다니, 정말 의외구나.”

캠코더 가방을 내밀며 아버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사들 일상을 촬영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글 쓰시는 데 방해해서 죄송해요.”

“자주 방해해도 된단다. 아빠야, 큰아들 얼굴도 보고 좋지.”

아버지와 짧게 잡담을 나누고 나는 병동으로 돌아갔다.

이동하는 도중 확인한 캠코더의 상태는 훌륭했다.

배터리는 가득 차 있었으며 실험 삼아 촬영한 영상은 잘 저장이 되었다.

외과의로서 내가 가진 최고의 무기가 회귀라면 모략가로서 내가 가진 최고의 무기는 캠코더였다.

“도경아, 잠깐 나가 있을래? 내가 잠깐 할 일이 있거든?”

“네, 치프. 안 그래도 스테이션 콜이 막 들어왔습니다.”

“겸사겸사 잘됐네.”

강도경이 떠나면서 복귀한 당직실에 남은 사람은 나 혼자였다.

나는 음흉하게 웃으며 미리 봐 둔 장소에 캠코더를 설치했다.

장소는 출입문을 마주 보고 있는 캐비넷의 상단부.

이 위치는 당직실에서 벌어지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는 명당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잘했다고 소문이 날까.

캠코더를 설치한 후 나는 그 주변 부분을 정성껏 위장했다.

이 단계가 가장 중요했다.

캠코더는 양날의 검으로 장경철을 물리칠 무기가 되어 줄 수도, 내 평판을 구렁텅이로 떨어트릴 흉기가 될 수도 있었다.

나는 척 봐도 읽지 않을 것 같은 옛날 의학 서적들을 캠코더 주변에 배치했다.

동시에 렌즈의 시야가 책에 가리지 않도록 신경 썼다.

‘이만하면 됐겠지?’

꼼꼼하게 캠코더를 살핀 후 나는 밟고 있던 의자에서 내려왔다.

함정 설치 완료.

이제 쥐새끼가 덫 밟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 * *

그 날 저녁 당직실.

“다 집합했지?”

장경철이 집합한 레지던트들을 도끼눈으로 쳐다보았다. 그의 험상궂은 눈빛에 레지던트들이 바들바들 떨었다.

“네, 치프.”

“네, 치프.”

이믿음이 없을 때 레지던트들은 장경철을 치프로 호칭했다.

이믿음이야 파견 인력이라서 어차피 떠날 몸이었다.

반면 장경철은 의국의 왕고참이자 동시에 차기 치프가 될 것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그 영향력이 동일선상에 있을 수가 없었다.

“나한테 맞았다고 이믿음한테 고자질한 사람 있어? 좋은 말할 때 자수해라.”

장경철은 호통치며 레지던트들을 다그쳤다. 자신이 후배들을 폭행했다는 사실을 놀랍게도 이믿음이 알고 있었다.

후배들에게 기압을 주던 도중 이믿음에게 현장을 들킨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다면 밀고자가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대체 어떤 새끼냐고!”

장경철은 손에 잡히는 필기구나 약병 따위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는 후배들의 기강이 해이해졌길래 정신을 차리라고 가볍게 육체적인 자극을 줬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사소한 자극을 못 참았단 말인가.

심지어 파견 온 외지인한테 그 사실을 냉큼 불어 버렸단 말인가.

인내심이 없는 요즘 것들에게 장경철은 단단히 화가 났다.

나 때는 야구 방망이로 맞다가 다리가 부러져서 깁스도 했는데!

“진짜 안 나온다 이거지?”

“치프, 사실은…….”

허수현이 모기만 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좋아, 허수현. 계속해 봐.”

“믿음 선배한테 고자질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눈썰미가 빠른 사람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무당처럼 척 보고 너희가 폭행당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장경철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씨발, 너 그걸 말이라고 하니? 유 헤드 빙빙? 일러바친 사람이 없다는 건 바꿔 말하면 너희 모두가 일러바쳤다는 뜻이 될 수도 있지.”

“…….”

“강도경은 나가서 망보고 나머지는 엎드려.”

장경철은 옷장 뒤에 숨겨 놓은 야구 방망이를 꺼냈다.

의료 사고로 쫓겨난 4년 차가 쓰던 물건이었다.

장경철 본인은 절대 쓸 일이 없을 거라고 마음먹었거늘 결국 방망이에 손을 대게 되었다.

하지만 이건 다 후배들이 어리석은 잘못을 저지른 탓이었다.

후배들이 예쁜 짓을 했다면 자신이 왜 이런 흉악한 물건을 사용하겠는가.

사람이 사람을 때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바로 상대가 맞을 짓을 해서.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니까 잘들 생각해라. 너희들이 앞으로 누구랑 계속 가는지. 퉤, 퉤.”

장경철은 양 손바닥에 마른침을 뱉고 야구 방망이를 휘둘렀다.

후우우웅.

* * *

‘재수 없을 정도로 속 편하게 자는군.’

다음 날 새벽, 잠에서 깬 나는 2층 침대의 1층에서 자고 있는 장경철을 마땅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장경철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팔다리도 쭉 뻗은 채 곯아떨어져 있었다.

맞은 놈은 펴고 자고 때린 놈은 오그리고 잔다.

가해자가 죄책감에 시달리는 걸 표현한 속담인데 장경철은 이 속담에 포함되지 않았다.

아마 후배 폭행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장경철과 맞닥뜨린 첫날, 나는 장경철이 갱생 불가능한 악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뉘우침이란 자고로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을 통해 시작되는 법.

그런데 장경철은 죄책감도 모르고 부끄러움도 몰랐다.

갱생이 불가능하다면 따끔한 처벌을 내리는 수밖에…….

간단하게 세면과 양치를 마치고 나는 당직실을 찾았다.

그런데 당직 근무자 강도경이 서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강도경, 너 뭐해?”

“일어나셨어요? 치프. 너무 졸려서 잠 깨려고 서서 근무 중입니다.”

강도경의 설명은 무척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설명하는 표정은 무척 부자연스러웠다.

어디가 아픈지 눈썹과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치 빠른 내가 그 이유를 모를 리 없었다.

“냉동고에 아이스 팩 몇 개 있더라. 화장실에서 팩으로 엉덩이 문지르고 있어. 컨퍼런스 준비는 내가 해 줄 테니까.”

“…네, 치프. 감사합니다.”

강도경이 부리나케 자리를 비운 후.

나는 캠코더가 위치한 철제 캐비넷 상단부를 올려다보았다.

캠코더의 밤새 안부는 강녕해 보였다.

강도경의 엉덩이에 불을 지른 영상도 분명 저장되어 있겠지.

나는 재빨리 캠코더를 회수한 뒤 어제 영상을 컴퓨터로 옮겼다.

‘개 돌아이 새끼. 애들을 야구 방망이로 팼잖아?’

영상을 확인하는 동안 가슴에서 천불이 들끓었다.

얻어맞는 후배들에게 감정 이입하다 보니 나까지 야구 방망이에 맞는 것처럼 아프기도 했다.

영상을 다 옮긴 후 나는 캠코더를 다시 원위치로 돌려놓았다.

폭행 영상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찾아온 오전 컨퍼런스 시간.

나는 창가 쪽에 혼자 앉아 있었다. 내 주변에 앉는 레지던트들은 아무도 없었다.

“치프, 외로워 보이네요. 저라도 옆에 앉아 드릴까요?”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장경철이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시비를 걸었다.

하는 짓은 얄미웠으나 나는 속으로 그저 웃고 말았다.

본인이 외나무다리 위에서 위태롭게 서 있다는 사실을 장경철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너 깝쭉거릴 수 있는 시간도 얼마 안 남았어. 내가 예언 하나 할까?”

“해 보세요.”

“너 조만간 나를 찾아와서 용서해 달라고 울고불고 빌 거다.”

“그건 예언이 아니라 희망 사항 아닙니까? 혼자서 고독이나 열심히 씹으십쇼.”

장경철이 깔깔깔 웃으며 내 곁을 떠났고, 나는 장경철이 나를 더 멸시하고 약 올려 주기를 속으로 바랐다.

그래야 나중에 내게 뒤통수를 얻어맞을 때 충격이 더 심할 테니까.

잠시 후 내 주도로 오전 컨퍼런스가 진행되었다.

본격적인 컨퍼런스에 앞서 과장이 직접 나를 소개했다.

내가 흉강경 팀에서 활약했으며 뒤숭숭한 의국 분위기를 다잡기 위해 파견되었다고 알렸다.

수술이 가능한 교수진과 펠로우가 없을 경우.

내가 응급 수술을 집도할 수도 있다는 사실도 알렸다.

내게 퍽 힘을 실어 주는 연설이었다고 할까.

멍청한 장경철은 그 사실도 모르고 실실 쪼개고 앉아 있었지만.

나는 간단하게 내 소개를 하고 자리에 앉아 회의를 계속 진행했다.

“회의 중에 정말 죄송합니다. 수술실에서 급하게 연락이 오는 바람에…….”

순조로웠던 컨퍼런스에 별안간 소동이 벌어졌다. 당직 근무를 서고 있던 강도경이 회의실에 난입했던 것이다.

강도경의 다급한 외침에 의국 식구들의 시선이 강도경에게 쏠렸다.

“응급 환자 건인가요?”

공개적인 장소였기에 나는 강도경에게 존댓말을 사용했다.

“네, 치프. 1시간 전 응급실에 실려 온 T.A(Traffic Accident, 교통사고) 환자인데요. 정형외과에서 개방성 골절에 대한 치료를 했는데 흉부외과 쪽 수술도 추가적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다고 합니다.”

“환자 번호 불러 주세요.”

나는 강도경에 들은 환자 번호를 타이핑한 후 응급실 기록지와 수술 기록지를 빔프로젝터에 띄웠다.

이거 초응급 환자잖아?

심전도의 불안정한 파동.

심초음파상의 불길한 음영.

곤두박질치고 있는 혈압과 반대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맥박.

외상으로 인한 흉부 출혈이 심각하게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제가 수술방에 들어가겠습니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선생, 자네가?”

과장이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교수님들은 다 정규 수술 예약이 잡혀 있지 않습니까? 교수님들의 부담을 덜기 위해선 제가 나서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그렇지만… 흉부 외상 환자는 수술 변수가 너무 많아. 흉강경 때와는 케이스가 많이 다를 텐데…….”

“과장님께서는 이런 경우를 대비해 저를 데리고 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를 믿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참 고민하던 과장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술 허락 사인을 내린 것이다.

나는 2년 차 허수현만 데리고 쏜살같이 수술방으로 달려갔다.

환자가 애타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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