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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167화 (167/257)
  • 167화 제4장 파견(2)

    위이이잉.

    위이이잉.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고막을 흔들었다.

    벌컥!

    응급실 앞에 멈춰 선 앰뷸런스 뒷좌석 문이 열리고 구급대원들이 스트레쳐 카에 누운 환자를 응급실로 데려갔다.

    아직 다 꺼지지 않은 사이렌 소리가 여운으로 남았다.

    출근 중인 스태프들과 환자 보호자들은 응급 후송 과정을 무심하게 바라보곤 제 갈 길을 갔다.

    ‘다들 익숙하다는 건가?’

    주변의 무덤덤한 반응을 확인하고 나는 쓰게 웃었다.

    타인의 고통과 비극에 익숙해진다는 것.

    타인의 고통과 비극에 무관심해진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었다.

    오래전 용인 신원대병원은 권역 외상 지원센터로 지정되었다.

    주변 지역의 외상 환자를 이송받고 치료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송하는 중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외상 환자 특성화 병원이라서 헬기도 자주 뜨곤 했다.

    지이이잉.

    본관 자동문을 통과하는 순간.

    나는 어쩐지 지옥에 발을 들여놓은 듯한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용인은 신원대 병원 계열 중 최악의 험지였다.

    특히 외과 계열에서는.

    건물 잔해에 깔리거나, 고층에서 추락하거나, 자동차에 몸이 구겨지거나 등등.

    다양한 형태의 외상 환자가 밀려 닥치기 때문이다.

    전생의 나도 2년 차에 용인 파견을 나갔다.

    그때만 떠올리면 진저리가 쳐지는데.

    차라리 선배한테 미움받고 후배한테 무시당하는 본원에 돌아가고 싶을 정도였다.

    길고 많은 수술에 몸이 갈려 버렸으니까.

    ‘이번 생은 어떨지 모르겠네.’

    나는 지하 1층 카페로 내려갔다.

    병원 건물과 인테리어는 본원보다 용인이 훨씬 세련되고 깔끔하긴 했다.

    건물을 나중에 지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안녕하십니까, 과장님.”

    카페에 도착한 나는 입구 쪽에 앉은 사내에게 허리를 숙였다.

    안경을 낀 중년 사내는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훑었다.

    “어서 와, 이 선생.”

    김호가 맞은편 좌석을 가리켰다.

    나는 자리에 앉아 김호를 자세히 뜯어볼 수 있었다.

    용인 흉부외과 과장 김호.

    나는 그를 정치와 치료까지 능한 수완가로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 강태섭이 본원 진료부원장에 부임하기 전까지 김호가 진료부원장이었지?

    “오는 데 불편한 건 없었고?”

    “네, 딱히 없었습니다.”

    “그럼 다행이군. 근데 생각했던 것과는 외모가 많이 다른데?”

    김호는 의외로 내 외모를 가장 먼저 지적했다.

    그가 예상한 내 이미지는 어땠는지 내가 되물었다.

    “동물로 치면 독수리 같은 이미지를 기대했지. 뭔가 날카롭고 저돌적인 느낌? 하지만 직접 보니 자네는 소 같은 느낌이야.”

    “우직하고 성실해 보인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고 봐야지.”

    “그렇다면 제가 생각하는 저와 어울리는 동물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게.”

    “고양이입니다.”

    “고양이? 그건 소보다 더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

    김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고 나는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저는 얌전한 고양이입니다. 부뚜막에 제일 먼저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내 해석을 듣고 깔깔깔 웃는 김호. 그런 김호를 보며 나 역시 흡족함을 느꼈다.

    김호는 능력 있고 말 잘하는 사람을 좋아했다.

    아직 레지던트인 내가 김호에게 익살맞은 농을 던질 수도 있었던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김호의 성향을 훤히 꿰뚫고 있었으니까.

    김호와 친밀도를 높여 놓으면 용인 생활을 할 때는 물론 본원으로 복귀했을 때도 유리할 것이다.

    “파견 첫날인 데다가 날 대하고 있는데도 여유만만이군. 아주 마음에 들어.”

    “…….”

    “때로는 남의 집도 내 집처럼 여길 줄 아는 뻔뻔함이 필요하단 말이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다고 방심하진 마. 첫인상이 영원할 거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김호가 웃음기를 싹 지우고 말을 이었다.

    대부분 양 과장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용인 흉부외과 의국장이 터뜨린 불미스러운 의료 사고.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의국 분위기.

    이를 쇄신하기 위해 내게 많은 권한을 넘기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응급 환자 단독 집도 권한에.

    심지어 해외 연수 6개월 패키지까지 보상으로 주겠다고 했다.

    내 입장에서는 눈이 돌아갈 제안이었다.

    “여기까지는 다 들어서 아는 내용이겠지?”

    김호가 다리를 바꿔서 꼬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그중 제일 거슬리는 단어는 ‘여기까지는’이라는 단어였다.

    내가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내용이 존재한단 말인가. 앞으로의 대화가 중요하다는 사실에 나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느슨했던 긴장감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수완가 김호는 역시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당근이 있으면 채찍도 있어야 하는 법 아니겠나?”

    “지금부터 채찍을 보여 주시겠다는 말씀이군요.”

    “바로 맞췄어.”

    주문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김호가 말을 이었다.

    “내가 레지던트인 자네에게 말도 안 되는 권한을 줬다는 자네도 잘 알 거야.”

    “네,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김호의 제안은 파격 그 자체였다.

    신원대학교 병원 교수 이상급 스태프 중에 김호만큼 통 큰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인물도 없으리라.

    “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앞으로 3개월 동안 의국 분위기를 쇄신하지 못한다면 말이야.”

    “…….”

    “여기서 2년 동안 썩어 줘야겠어.”

    김호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경고했다.

    그 말인즉 왕관을 쓰려면 그 무게를 버티라는 말이었다.

    어쩐지 너무 내게 유리한 내용만 있길래 수상쩍다 싶더라니…….

    결국 양날의 검이었나.

    “못하겠으면 지금 당장 포기해도 좋아. 선택을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과장님, 1년으로 해 주시죠.”

    “응? 무슨 뜻이지?”

    “해외 연수 기간을 6개월이 아니라 1년으로 늘려 주시죠. 대신 목표를 못 이루면 4년 동안 용인에 남겠습니다.”

    나는 오히려 역제안을 던졌다.

    * * *

    “…….”

    “…….”

    나와 김호 사이에 묵직한 침묵이 흘렀다. 나와 김호의 눈빛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도사렸다.

    서로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한 눈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기왕 엎질러진 물이라면 제대로 질러 봐야지.’

    용인에 무려 4년 남겠다는 제안을 할 정도로 나는 이번 일을 완수하는데 자신감이 있었다.

    사람 일이라는 게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정석을 따르는 길에도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긴 했다.

    하지만 내겐 그 변수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회귀를 하면서 폐·식도 파트의 경험을 교수급으로 올려놓았다.

    소아 흉부외과 대가들의 수술을 바로 옆에서 보조하며 다양한 요령을 체득했다.

    직급은 레지던트일지 몰라도.

    그 실력만큼은 완전체 흉부외과의에 가까웠다.

    정치력, 멘탈 관리, 환자 관리, 스태프 관리, 수술 실력, 의학 지식.

    이 여섯 가지로 육각형 스탯을 만든다면 나는 정확한 육각형으로 표현될 것이다.

    “이 선생, 듣던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친구였구만.”

    내 역제안을 듣고서 김호가 깔깔깔 웃었다.

    호탕한 웃음소리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지만 김호는 개의치 않았다.

    김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오로지 자신의 앞만 보고 가는 사람.

    과거 본원 흉부외과 과장을 맡고 있던 이 과장과 김호가 다른 점이라면 보상이었다.

    이 과장은 스태프들을 곰처럼 부려 먹고 보상은 본인이 다 챙겼다.

    그에 비해 김호는 스태프들을 부려 먹으면 먹은 만큼 그에 합당한 보상을 주었다.

    “4년 동안 용인에 있겠다라? 그거 아주 당돌한 제안이군. 그런데 혹시 내가 농담하는 것처럼 보이나?”

    “…….”

    “내가 마음만 먹으면 자네를 용인에 붙잡아 두는 건 일도 아니야. 단순히 일을 잘하라고 자네를 겁박하는 게 아니란 말이지.”

    김호는 마치 맹수가 으르렁거리듯 나를 위협했다.

    본인이 인사 파트에 인맥이 있음을 넌지시 비쳤다.

    “해외 연수를 보내 주시겠다는 말씀을 듣고 어느 정도 눈치는 챘습니다. 인사 팀에 인맥이 있으실 것 같다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임시 파견 나온 제게 해외 연수권을 주는 건 비정상적인 일 아니겠습니까?”

    “…….”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비정상적인 일이 가능한 건 인맥이나 인력(人力)이 작동했을 뿐이죠.”

    나는 똑 부러지게 대답했다.

    말을 하면서도 나 스스로에게 대견함을 느낄 만큼.

    회귀를 통해 얻은 최고의 소득은 아마 눈치와 말빨이 아닐까.

    “그걸 다 알면서도 위험을 무릅쓰겠다?”

    “저는 위험을 무릅쓰는 게 외과의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술을 할 때 환자 상태를 보고 가려서 수술하는 게 아닌 것처럼.”

    내 야무진 대답에 김호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손을 내밀었다.

    “용인에 온 걸 환영하지.”

    * * *

    과장과의 미팅을 마친 후 나는 바로 5층 흉부외과 병동을 찾았다.

    비록 구두지만 파견 계약은 잘 마무리가 되었다.

    의국을 쇄신하면 나는 무려 1년의 해외 연수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본원에서 받을 연수권을 합치면 그 기간은 무려 1년 6개월이나 되었다.

    국민학교 때부터 영어 듣기, 말하기를 열심히 공부했으니 외국에 나가면 많은 기술과 기법들을 배워 올 수 있으리라.

    심지어 외국 흉부외과 대가들과 인맥도 쌓을 수 있겠지.

    “안녕하세요, 본원에서 파견 나온 의국장 이믿음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나는 가장 먼저 스테이션에 들러 간호사들에게 출석 체크를 했다.

    이후 나와 함께 병동 분위기를 책임질 레지던트가 있는 당직실을 찾았다.

    드르르륵.

    당직실에서는 두 명의 레지던트가 근무 중이었다. 한 명은 1년 차 강도경, 다른 한 명은 2년 차 허수현이었다.

    나는 두 사람과 간단하게 통성명을 주고받았다.

    용인 흉부외과 의국에 대한 정보도 들었다.

    용인 의국의 레지던트 숫자는 나를 제외하며 총 6명으로 꽤 많은 편에 속했다.

    펠로우는 총 3명.

    교수진은 조교수 3명과 부교수 2명.

    분원이라서 본원보다 스태프가 적을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하지만 의국의 T/O가 여유롭다는 사실은 오히려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사람 수가 적어서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면 사람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일들 봐. 안 그래도 바쁠 텐데.”

    “네, 감사합니다.”

    나는 잔뜩 얼어 있는 강도경과 허수현이 제 일을 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컴퓨터에 접속해 입원 환자들의 상태와 수술 스케줄을 살폈다.

    외상센터 소속 흉부외과답다고 해야 할까.

    용인은 외상 환자가 많았으며 응급실을 통해 응급 수술을 받고 입원하는 환자가 많았다.

    응급 환자가 정규 수술 스케줄에 끼어들다 보니 수술 스케줄은 개판이었다.

    교수들은 응급 처치만 하고 다른 수술방으로 이동했다.

    거기서 또 응급 처치를 하고 본 수술로 돌아오곤 했다.

    이만하면 흉부외과의가 아니라 홍길동으로 전직해야 할 판국이었다.

    이제 보니 김호가 내게 응급 수술 권한을 준 것도 이해가 갔다.

    나라도 얼마간 수술을 소화해 주지 않으면 의국이 안 돌아갈 판국이었으니까.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치프, 이거라도 한 잔 드세요.”

    1년 차 강도경이 불쑥 믹스 커피를 건네며 말을 이었다.

    “스케줄표 보니까 질리시죠?”

    나를 향한 강도경의 눈빛에는 어느새 동정과 연민이 깃들어 있었다.

    마치 앞으로 펼쳐질 험난한 용인 생활을 암시라도 하는 것처럼.

    하지만 강도경의 기대와 달리 나는 현 상황이 무척 기뻤다.

    응급 집도 권한을 이용해 내 수술 실력을 뽐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

    더 이상 실력을 숨길 필요가 없었으니까.

    집도를 하다 보면 무아경에 대한 단서도 얻을 수 있을 테고.

    그래서 나는 씨익 웃으며 강도경을 쳐다보았다.

    “질린다고? 오히려 재미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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