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160화 (160/257)

160화 제2장 네, 치프(5)

치이이익.

고기가 불판에 올라간 순간 시원한 빗소리가 퍼졌다.

스태프들은 잘 익은 고기를 집어먹었고, 소주를 곁들였으며 평소 하지 못했던 속내를 털어놓았다.

겉모습만 놓고 보면 영락없이 직장인들의 회식 자리.

다만 흉부외과 스태프들의 회식과 직장인들의 회식은 그 횟수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흉부외과는 1년에 한 번 회식을 해도 감지덕지였다.

회식 자리에서 말이 가장 많은 사람은 부교수 박성진이었다.

회식 대화의 시작과 끝에는 항상 박성진이 있었다.

이 과장 라인이었던 박성진은 양 과장 밑에서도 뛰어난 처세술로 살아남았다.

하긴 그에겐 윗사람이 이 과장이냐, 양 과장이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본인이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본인이 승진만 할 수 있다면.

“믿음아, 너 술 못 마시니?”

곁에 앉은 서 교수가 문득 소주병을 가리키며 물었다.

고깃집에 온 도착한 후 나는 술로 목을 적신 적이 없었다. 예의상 첫 잔은 마실 법 한데 단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비 때문이었다.

이유가 궁색하고 어처구니없어 보이겠지만 사실이었다.

전생부터 나는 비 오는 날의 징크스가 있었다.

꼭 비 오는 날 응급 환자와 마주쳤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대학교 OT 때 교통사고도 아마 비오는 날 발생했지?

“못 마시는 건 아닌데,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아서요. 한 잔만 마셔도 취할 것 같아요.”

“거짓말 하지 마. 응급 환자 생길까 봐 걱정해서 못 마시는 거 아니니?”

서 교수가 나의 속을 꿰뚫어 보며 말을 이었다.

“그때를 대비해서 실력 좋은 2년 차 펠로우를 두고 왔잖아. 그러니까 오늘 같은 날은 아무 걱정 없이 마셔도 돼.”

“…….”

“이런 날이 또 올 것 같니?”

서 교수의 다정한 말에 잠잠했던 마음이 요동쳤다.

갑자기 술이 자석처럼 당겼다.

근 3년 동안 술을 입에 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회식자리가 있어도 짬이 안 돼서 번번이 응급 대기를 했던 탓이었다.

마음 놓고 술을 마시려면 교수쯤은 되어야 할 텐데…….

확실히 이런 기회가 흔하지는 않은데…….

“그럼 저도 마시겠습니다. 소주처럼 투명한 사이다를…….”

나는 눈물을 머금고 소주 대신 사이다 캔을 손에 쥐었다.

“그렇게 불안하면 어쩔 수 없지. 나야 친구가 있어서 좋고. 우리 둘이 짠 하자.”

“네, 교수님.”

나는 서 교수와 음료수 건배를 하고 음료를 들이켰다.

서 교수는 나와 달리 술을 안 마시는 게 아니라 못 마시는 타입이었다.

박성진의 주도하게 회식은 계속되었다.

나는 가끔씩 대화에 끼면서 양 과장을 살폈다.

건강 악화 및 노쇠로 은퇴하는 양 과장은 무척 왜소해 보였는데, 그 모습이 내겐 무척 낯설었다.

양 과장이 나보다 키가 작음에도 나는 양 과장이 항상 나보다 크다고 느껴 왔기 때문이다.

특히 수술실에서 양 과장은 거인이었다.

내가 양 과장을 작게 보는 것은 내가 성장했기 때문일까.

양 과장이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까.

두 가지가 복합적인 상호 작용을 하기 때문일까.

정확한 이유를 꼬집을 수는 없었지만 나는 서글펐다. 믿고 의지했던 양 과장이 더 이상 곁에 없다는 사실에.

이별을 알고 있다고 해서 이별이 덜 슬픈 것은 아니었다.

* * *

“과장님, 오늘 즐거워 보이셨습니다.”

“실제로 즐거웠단다. 술도 마시고, 모처럼 옛날이야기도 툭 터놓을 수 있었고 말이야.”

양 과장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회식은 밤 10시쯤에 끝났는데, 그때까지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교수들은 대리 운전 또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집으로 돌아갔고, 나머지 인원은 걸어서 본원으로 복귀했다.

나는 양 과장의 운전기사를 자처했다.

여럿이 있을 때는 할 수 없는 사제지간의 긴밀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였다.

“세월이 참 야속하구나. 믿음이 네가 고속도로에서 응급 처치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의국장이 되고 난 은퇴라니…….”

“시간은 돌아볼 때만 빨리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나이를 조금 더 먹으면 그런 생각 안 들 거란다. 미래도 휙휙 지나가 버리지.”

“…….”

“요즘은 아침을 먹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점심을 먹고 있는 경우도 있더구나.”

양 과장의 농담에 나는 피식 웃었다.

이렇게 양 과장이 아주 가끔씩 던지는 농담을 나는 좋아했다.

농담은 양 교수의 평소 성격과 어울리지 않아 반전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빈도가 낮아 희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농담을 직접 듣지는 못할 것이다.

이따금 기억에서 꺼내 봐야 할 것이다.

“과장님.”

“그래, 믿음아.”

“정말 죄송하면서 감사합니다. 저 때문에 흉부외과에 복귀하신 뒤 안 해도 되는 고생을 하셔서 죄송하고, 저라는 모자란 인간을 지금까지 지켜봐 주시고 격려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마음속에만 간직하고 있던 낯간지러운 말을 힘겹게 꺼냈다.

전생의 나는 감정 표현에 서툴렀다. 아니, 감정 표현이라는 것을 아예 할 줄 몰랐다.

내가 이렇게 느끼고 있으면 상대도 응당 그렇게 느끼겠지 하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회귀해서 살아 보니 아니었다.

전생의 나는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었다.

내 마음과 감정은 상대에게 전할 때야 비로소 진정한 색을 되찾는 것이었다.

“흠흠. 녀석, 괜히 나까지 부끄럽게 하는구나.”

사제 간의 달달한 분위기가 어색했는지 양 과장이 괜히 헛기침을 했다.

“따지고 보면 도움을 받은 건 네가 아니라 나란다. 은퇴를 하고서 난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의미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

“…….”

“그때 네가 나타났단다. 하늘이 내려 준 재능과 인간미로 무장한 네가 말이야.”

“…….”

“그동안 이런저런 시련이 있었지만 너와 함께한 시간은 다 행복이었단다.”

“저도 교수님의 제자여서 행복했습니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뱃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코끝은 시큰해지고 눈가는 뜨거워졌다.

나는 이번 생에서 인연을 맺은 양 교수와 이별하고 있었다.

소중한 사람과의 첫 이별을 경험하고 있었다.

만약 다시 회귀한다면.

나는 기꺼이 양 교수의 제자가 될 마음이 있었다.

당신이 제게 물려준 의과의 정신과 유산들.

제가 후배들에게 고스란히 돌려주겠습니다.

이제 부디 편히 쉬시길.

* * *

“선배, 저 응급실 다녀오겠습니다.”

“오냐,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콜하고.”

윤재호는 2년 차 최진우에게 보고하고 당직실을 떠났다.

문득 바라본 창밖은 어두웠다. 아직도 굵직한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비가 오는 날에 응급실 환자.

그것도 흉통을 호소하는 환자를 진료한다는 사실은 윤재호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비가 오는 날은 경증 환자가 적은 편이었다.

비를 맞으며 대학 병원에 오는 것 자체가 번거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이런 날씨에 병원을 온다는 건 정말 아픈 환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가만 보자.’

응급실로 향하는 동안 윤재호는 방금 전 살폈던 환자의 응급 기록지를 다시금 떠올렸다.

환자 이름은 손영호.

나이는 55세.

지병으로는 심하지 않은 고혈압과 고지혈증, 지방간.

주 호소는 흉통이었으며 호흡 곤란이나 기침이나 가래 같은 증상은 없었다.

환자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다 보니 도착한 응급실.

그는 간호사에게 물어 손영호 환자에게 다가갔다.

환자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가슴에 손을 얹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환자 곁에는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아들이 서 있었고.

“흉부외과 당직의입니다.”

“선생님, 왼쪽 가슴이 너무 아파요. 누가 칼로 쑤셔 대는 것 같습니다.”

윤재호가 채 질문을 하기도 전에 환자가 먼저 통증을 호소했다.

햇빛에 그을린 환자의 구릿빛 피부가 더욱 까맣게 보였다.

“언제부터 아프셨죠?”

“한 2시간 전부터 아팠는데 지금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수준이에요.”

“2시간 전에는 뭐하셨죠?”

“빈속에 소주 한 병 마셨습니다. 일당이 계속 밀리다 보니 속상해서.”

음주한 것에 비해 의외로 정신이 멀쩡한 환자.

윤재호는 차분하게 문진을 이어 나갔다.

좋은 질문은 좋은 대답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좋은 대답은 환자의 질환을 밝혀낼 좋은 열쇠가 되기 마련이다.

4년 차인 이믿음은 그에게 문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래서 윤재호는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환자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중요한 정보들은 수첩에 메모하면서.

“청진을 해 봤는데 일단 폐에 문제는 없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심장 쪽일 확률이 큰데요.”

윤재호는 청진기를 다시 목에 걸며 말했다.

“검사 결과 확인하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환자를 남겨 두고 스테이션으로 향한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끔찍한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와 달리 검사 결과는 별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엑스레이 이상 무.

피 검사 이상 무.

심전도 이상 무.

심지어 경흉부 초음파에서도 별다른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

‘인턴이 진료를 봤나?’

윤재호는 쓰게 입맛을 다셨다.

심장 검사에서 이상이 없는 환자가 흉통을 호소한다?

그렇다면 환자는 위장 질환을 앓고 있을 확률이 컸다.

역류성 식도염이나 위염으로 발생한 작열감과 흉통.

이것을 심장 질환과 착각하는 경우가 흔하니까.

공교롭게 환자는 빈속에 소주 한 병을 마셨으며.

동네 의원에서 역류성 식도염 진단을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이쯤 되면 지금까지 수집한 모든 정보가 역류성 식도염을 가리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산제 정도만 처방해서 보내면 되겠지?’

윤재호는 다시 환자에게 돌아갔다.

환자의 흉통이 역류성 식도염 때문일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환자는 이를 완강히 부정했다.

“단순히 속 쓰린 게 아니에요. 젤포스를 두 개나 짜먹었는데 낫질 않아요. 평소 같았으면 괜찮아졌을 텐데…….”

환자는 여전히 지독한 통증을 호소했다.

얼굴에는 어느새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환자가 뜻밖에 저항을 했던 탓에 윤재호만 난처해졌다.

[힘들 때 혼자 끙끙 앓지 마. 모르는 게 있으면 주변 사람에게 물어봐.]

상황 판단을 못해 우물쭈물하던 그의 머릿속에 이믿음의 조언이 번뜩 스쳐 지나갔다.

이믿음의 말대로였다.

자신이 해결 할 수 없는 일을 고민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금은 모자란 것을 인정하고 도움을 청할 때였다.

그는 침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당직실에 있던 2년 차 최진우가 전화를 받았다.

“선배, 저 재호인데요. 노티 드릴 환자 있는데… 한 번 봐주시면 안 될까요?”

-뭐야? 응급실 환자?

“네.”

윤재호는 속사포로 환자를 노티했다. 자신은 환자의 병인을 역류성 식도염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

노티하는 동안 최진우는 아무 말이 없었다.

환자의 검사 결과를 같이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최진우의 침묵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윤재호는 불안했다.

-재호야.

“네, 선배.”

-이 환자 당장 조영제 심장 CT 촬영해라. 아무래도 우리 x된 것 같다.

“왜요?”

윤재호는 놀라서 되물었고, 최진우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환자 아마 응급 수술해야 할 거야. 네가 놓쳤나 본데, 엑스레이에서 calcium sign 나왔다. 그것도 심장에서 10mm 이상 떨어진 자리에서.

“아… 그럼 설마…….”

-그래, 이 환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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