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제2장 네, 치프(4)
나는 몸을 일으키고 하품했다.
숙직실 침대 앞에 드리운 커튼을 조용히 걷어 내고 욕실로 들어갔다.
눈이 맑은 청년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항상 돌아볼 때만 빠르단 말이지.’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바라보며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시간은 바람처럼 무심하게 흘러나는 어느덧 레지던트 4년 차 의국장이 되었다.
지난 3년간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변화가 있었다.
다행히도 그 모든 것들은 신원대학교 병원 흉부외과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었다.
스태프의 숫자가 늘고.
신규 클리닉이 개설되고 근무 환경이 개선되고 등등.
조금 부끄럽지만 나는 나로 인해 깨달았다.
한 사람이 조직이나 사회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은 의외로 막대하다고.
그러니까 스스로가 부족하다는 사실에 좌절하지 말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고.
그러다 보면 결국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세면을 마친 나는 곧바로 당직실로 이동했다.
“치프, 벌써 일어나셨어요?”
당직 근무자인 1년 차 윤재호가 아침 인사를 건넸다. 치프라는 단어에 귓속이 간지러워졌다.
“오냐, 병동이나 응급실에선 별일 없었고?”
“네, 어제는 조용했습니다.”
“차트 작성 못한 거 있으면 알려 줘. 같이 끝내자.”
“아니에요. 제가 하겠습니다. 제 일인데…….”
“흉부외과에 네 일, 내 일이 따로 있나? 전부 다 환자에 관련된 일이지. 치프 명령이니까 빨리 내놔.”
“…감사합니다, 치프.”
나는 윤재호가 입력해야 하는 처방을 나눠서 입력하기 시작했다.
내가 유별나게 선한 사람이라거나 친절하게 베푸는 성격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다.
나는 흉부외과에 그런 전통이 뿌리 내리기를 바랄 뿐이었다.
전생의 흉부외과 레지던트 분위기는 삭막했다.
사람은 적은데 일은 넘치다 보니 다들 성격에 모가 나고 날카로웠다.
자기 일을 하기도 바쁜데 후배를 신경 쓰고 교육해야 하고.
거기에 선배가 던져 준 일까지 처리해야 하니 미칠 노릇인 것이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3, 4년 차가 나서야 했다.
짬이 되는 사람들이 솔선수범해서 1, 2년 차의 일을 거들어 줄 필요가 있었다.
3, 4년 차에게 도움을 받은 1, 2년 차가 나중에 3, 4년 차가 됐을 때 다시 1, 2년 차를 도와주고…….
이런 선순환이 생긴다면 흉부외과 근무도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일 것이다.
비슷한 의미에서 나는 얼마 전 악독한 100일 당직 문화까지 깨트려 버렸다.
무려 100일씩이나 당직을 서라는 건 고문이었다.
100일 당직을 하더라도 밤에 요령껏 자면 된다는 말은 언어 폭력이었다.
100일 당직 같은 악습을 철폐하는 것도 흉부외과의 미래를 위한 일 아닐까.
“난 끝났다.”
나는 처방 입력을 끝내고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오전 컨퍼런스까지 무려 1시간이나 남은 시점이었다.
이 정도면 윤재호도 조금이나마 자기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와, 치프 엄청 빠르시네요?”
“너랑 나랑 짬 차이가 있는데 입력 속도가 같으면 내가 뭐가 되니? 안 그래?”
“하하하.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러네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윤재호의 감사 인사를 받으며 나는 당직실을 나왔다.
아직 불이 꺼진 병동 복도를 조용하게 거닐었다.
회귀를 한 덕분에 내 인생은 180도 달라졌다.
전생의 이맘때쯤 나는 간신히 사람이 됐다는 평가를 들었다.
이때야 비로소 수전증을 완전하게 극복했기 때문이다.
다만 처치와 수술에 자신감이 붙었음에도 내 인간 관계는 여전히 엉망이었다.
후배들과 선배들은 여전히 나를 불신했다.
한 번 찍힌 낙인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거의 식물과 다름없는 치프 생활을 했었다.
전생과 이번 생을 비교하고.
둘 사이에 벌어진 어마어마한 간격을 확인한 순간,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환경도 똑같고 사람도 똑같은데 어떻게 이만한 격차가 날 수 있단 말인가.
“선배,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해요?”
숙직실에서 남하늘이 튀어나왔다.
덕분에 깊게 빠졌던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고민은 아니고 생각 정도?”
“또 일찍 일어나서 당직 근무자 도와주고 왔죠? 한두 번은 괜찮은데 너무 자주 도와주시는 거 아니에요?”
“…….”
“그러다가 애들 버릇 나빠지면 어떻게 하려고요.”
3년 차인 남하늘은 내가 1, 2년 차 돕는 일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너 이제 와서 되게 치사한 소리 한다?”
“제가요?”
“내가 너 일 도와줄 때는 입 싹 닫고 있더니 내가 후배들 도와줄 때는 버릇 운운하잖아.”
“선배랑 저는 1년 차이밖에 안 나니까 그렇죠.”
남하늘이 멋쩍게 웃었다.
“그럼 너랑 1년 차이밖에 안 나는 2년 차도 예뻐해 줘야지. 너 지금 완전 적반하장이다?”
나는 말빨로 남하늘을 찍어 눌렀고, 남하늘은 찍 소리도 못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회귀한 내 혀는 메스보다 날카롭고 고추보다 매웠다.
“하늘아, 우리 후배들한테는 좋은 것만 물려주자. 고생 같은 건 그만 물려주고.”
“알았어요. 저도 앞으로 애들한테 신경 쓸게요. 하여간 선배 입은 못 당한다니까.”
남하늘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렸다.
전생에는 없었던 1년 후배의 모습이 문득 귀여워 보였다.
내가 흉부외과 레지던트 1년 차가 막 되었을 때.
남하늘은 흉부외과에서 수련 중인 인턴이었다.
당시 내가 흉강경 팀에 소속되어서 고군분투하고 활약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을까.
정확히 1년 뒤 남하늘은 흉부외과 레지던트에 지원했다.
이후로는 거의 형, 동생처럼 격의 없이 지내는 중이었고.
“모처럼 식당에서 아침이나 먹자. 오늘은 내가 쏜다.”
“칫, 누가 들으면 고기라도 사는 줄 알겠어요?”
“라면이나 빵에 비교하면 식당 밥은 고기지.”
나는 피식 웃으며 회귀로 인해 바뀐 시간선을 걸어 나갔다.
* * *
오전 컨퍼런스에 참여하기 위해 회의실을 찾았다.
이전과 달리 회의실은 벌써부터 북적북적했다. 3년 전 흉강경 수술의 성공으로 늘어난 인력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15명이었던 정원은 현재 23명으로 대폭 늘었다.
다른 과와 비교하면 여전히 일손이 부족하지만 이전 상황과 비교한다면 거의 흉부외과의 황금기라고 부를 수 있는 인력 풀이었다.
하지만 인원이 늘어난 회의실을 훑어보며 나는 의외로 외로움을 느꼈다.
이 자리에 나와 함께 시간을 보냈던 선배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많던 선배들은 예외 없이 강제적으로 병원에서 쫓겨났다.
그것도 무려 3년씩이나.
어디로?
군대로!
허성호는 내년에 황은우는 내후년쯤은 되어야 흉부외과에 복귀할 것이다.
볼 수는 없어도 두 사람과 자주 통화하는 편인데, 두 사람 다 펠로우 과정을 밟을 예정이라고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복귀할 때쯤이면 내가 군대에 있겠지.
그리고 내가 제대하고 복귀할 때쯤이면 원수 강태섭이 흉부외과 과장으로 부임해 있을 테고.
‘점점 가까워지는구나, 그 인간과.’
강태섭과 마주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심장이 쿵쿵 뛰고 근육은 팽팽하게 당겨졌다.
강태섭을 물리쳐야만.
전생의 원한을 되갚아야만.
비로소 온전히 이번 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흉부외과 스태프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나는 단상으로 이동해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았다.
문득 양 교수, 아니 양 과장과 눈이 맞았다.
우리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눈과 입으로 웃었다.
흉강경 수술이 성공한 후 양 과장은 탄탄대로를 달렸다.
병원과 학계에서 동시에 인정을 받았고, 매스컴은 양 과장을 모시기 위해 안달이 났다.
양 과장이 일약 스타덤에 오른 반면 이 과장의 입지는 폭삭 주저앉고 말았다.
그 잘난 정치질도 위대한 성취와 업적 앞에서는 힘을 못 썼던 것이다.
양 과장은 흉강경 수술을 성공시키고 흉강경 클리닉을 훌륭하게 이끈 공로로 과장이 되었다.
반면 이 과장은 조교수로 강등되어 1년을 보내다가 지방 분원의 흉부외과 과장으로 발령을 받아 떠났다.
흉강경 수술이 성공하던 당시.
내가 먼저 봤던 미래가 결국 현실이 된 것이다.
“지금부터 오전 컨퍼런스를 시작하겠습니다. 입원 환자 브리핑입니다. 윤 선생님, 맡은 환자 상태 노티해 주세요.”
나는 차분하게 회의를 이끌었다.
성품 좋은 양 과장이 부임하고.
넉넉한 인원이 충당되고.
과거의 이 과장 같은 악당이 없었기에 회의 중 잡음이 일어날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컨퍼런스가 마무리 될 때쯤 나는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양 과장님 송별식 참여 인원]
출력물에 적힌 단어가 가시처럼 가슴에 박혔다.
나의 존경하는 스승 양 과장이 이번 주에 은퇴를 앞두고 있었다.
오로지 나의 성장을 지켜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은퇴를 번복하고 복귀한 늙은 의사.
환자에게 봉사하겠다는 일념으로 바쁜 흉강경 수술을 스케줄을 전부 소화해 낸 늙은 의사.
아쉽지만 이제 양 과장을 놓아주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이번 주 양 과장님의… 송별식이 있습니다.”
나는 힘겹게 말을 이어 나갔다.
“자세한 날짜와 시간과 장소를 공지할 테니 참석하실 수 있는 분은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
“이것으로 오늘 오전 컨퍼런스를 마치겠습니다.”
컨퍼런스가 끝난 뒤 스태프들이 우르르 복도 앞에 정렬하기 시작했다. 곧바로 이어질 회진 때문이었다.
나는 일부러 대열 후미에 서서 눈물을 훔쳤다.
* * *
“믿음아, 오늘도 고생 많았다.”
“아닙니다. 고생이야 서 교수님이 다 하셨죠.”
“녀석, 겸손하기는…….”
흉강경 폐엽 절제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나는 서 교수와 함께 수술방을 나오고 있었다.
마스크와 가운, 장갑을 훌훌 벗어 던지고 우리는 곧바로 휴게실을 찾았다.
두 번 연속으로 펼친 흉강경 수술로 탈진한 기력을 캔 커피로 보충했다.
“어떤 수술이 됐든 믿음이 네가 퍼스트를 서면 느낌이 다르단 말이지. 오늘도 거의 40분 정도 단축한 것 같은데?”
서 교수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눈을 찡긋거렸다.
“덕분에 잠깐이라도 쉴 수 있겠어.”
“잠깐이 아니라 푹 쉬세요. 요즘 일정 보면 진짜 탈 나실 것 같아요.”
나는 진심으로 서 교수를 걱정했다.
양 과장은 작년부터 흉강경 수술에 손을 뗐다.
그리고 그 바통을 이어받은 사람이 바로 펠로우에서 조교수가 된 서 교수였다.
흉강경 클리닉의 책임자라서 서 교수의 수술 스케줄은 다른 교수들에 비해 빡빡했다.
많게는 하루에 네 번까지 수술을 한 적도 있었다.
“이번에 인원을 또 보충해 준다니까 그때까지 버텨 봐야지. 그건 그렇고.”
서 교수가 화제를 돌렸다.
“양 과장님 송별식은 어떻게 됐어?”
“시간이 오늘 밖에 안 되신다고 하셔서요. 어쩔 수 없이 병원 근처에 있는 고깃집으로 급하게 잡았습니다.”
“그건 좀 아쉽네. 좀 더 근사한 곳에서 멋지게 보내드리고 싶었는데.”
“저도 교수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짧은 대화 후 찾아온 침묵.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창밖을 바라보았다.
먹구름이 껴 우중충한 하늘이 빗방울을 하나둘 떨어트리고 있었다.
그리고 금방 거세지는 빗줄기.
쏴아아아아.
“과장님, 송별식에 비가 쏟아진다라… 어쩐지 느낌이 안 좋은걸?”
서 교수가 캔 커피를 홀짝거리며 혼잣말을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나 역시 서 교수와 같은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