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158화 (158/257)
  • 158화 제2장 네, 치프(3)

    “여보, 무슨 일 있었어?”

    이진영이 출근 준비를 마치고 식탁에 앉자 아내가 대뜸 물었다.

    “왜? 그래 보여?”

    “당신이 만취해서 집에 온 건 오랜만인 것 같아서.”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거지, 뭐.”

    이진영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휘휘 손을 저었다.

    하지만 아내가 보여 준 놀라운 관찰력에 새삼 놀랐다.

    아내의 말이 맞았다.

    그에겐 무슨 일이 있었고, 그 일은 그에게 썩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어제 오전 양순재가 흉강경 수술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참나, 일이 꼬이려고 하니까 이렇게까지 꼬이나?’

    이진영은 쓰린 속을 달래기 위해 찬물부터 들이켰다.

    양순재의 흉강경 수술은 그 누가 봐도 실패할 수술이었다.

    연습 기간은 30일 정도로 짧았으며 부담스러운 참관자가 수십 명이었고, 모형이 아닌 실전은 어제가 처음이었다.

    그 수많은 악재를 딛고 양순재는 보란 듯이 흉강경을 완성시켰다.

    그 때문에 이진영의 계략은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이젠 양순재의 인사 고과를 바닥으로 떨어트린 것도 의미가 없었다.

    신수술이 성공하면서 양순재의 인사 고과는 하늘까지 치솟았으니까.

    하… 안타깝단 말이지.

    양순재를 내쫓고 박성진을 부교수로 앉혔으면 흉부외과를 완벽하게 장악했을 텐데…….

    이루어지지 않은 꿈의 뒷맛은 썼다.

    “나 갈게. 오늘도 조금 늦을지 몰라.”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이진영은 병원으로 출근했다.

    차를 운전하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앞으로 어떤 방법을 써서 양순재를 쫓아내야 할까.

    그의 머릿속은 오로지 그 생각 하나로만 가득 찼다.

    깊은 고뇌 속에 도착한 회의실.

    양순재는 먼저 도착해서 흉강경 팀의 퍼스트였던 서인석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진영은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진지하게 흉강경 팀의 스태프들을 유심히 살폈다.

    펠로우 과정의 서인석.

    3년 차 허성호.

    인턴이자 곧 레지던트가 될 이믿음.

    그중에서 제일 신경 쓰이는 사람은 의외로 이믿음이었다. 어제 수술 참관 당시 이믿음은 그와 참관의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수술 시야를 확보하는 솜씨가 수준급이었기 때문이다.

    수술 부위의 해부학적 지리에 해박해야만.

    내시경이라는 도구에 익숙해야만 가능한 수술 시야 관리를 인턴인 이믿음이 완벽하게 해냈다.

    그래.

    환자에게 출혈이 발생했을 때 시야를 잡아 준 것도 분명 이믿음이었지?

    내가 관상동맥 우회술 문합을 할 때 누수가 있다고 설쳤던 것도 이믿음이었고.

    ‘저 요망한 녀석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이믿음을 바라보는 이진영의 눈빛은 복잡해졌다.

    이대로 두면 이믿음은 내년에 레지던트가 된다. 자연스레 양순재의 오른팔 내지는 왼팔이 될 것이다.

    저걸 차라리 레지던트가 되지 못하게 잘라 버려.

    잡초는 성장하지 전에 베어야 편한데…….

    잠시 후 오전 컨퍼런스가 시작되었다.

    입원 환자 브리핑, 수술 환자 스케줄 관리, 논문 발표 등등.

    모든 과정이 끝난 후에야 이진영은 입을 열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공식적인 공지도 필요하겠죠?”

    “…….”

    “어제 양순재 교수님이 이끄는 흉강경 팀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흉강경 수술에 성공했습니다. 그 큰 업적에 다들 박수를 보냅시다.”

    짝. 짝. 짝.

    회의실에 박수갈채가 터졌고, 이진영의 복장도 터졌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이치였다.

    아픈 배를 다스려 가며 오전 회진을 마치자 양순재가 잠깐 보자며 이진영을 불렀다.

    드물 일이라 의아해하면서도 이진영은 양순재와 회의실로 이동했다.

    “선배,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역시 명의는 명의란 말이죠.”

    “마음에 없는 소리 할 필요 없어.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젠 너무나 잘 아니까.”

    양순재의 눈빛과 목소리에서 냉기가 폴폴 풍겼다.

    이진영이 알고 있던, 평소 배알 없이 허허실실 웃고 다니던 양순재는 어디가고 없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이진영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예요? 선배를 위해서 흉강경 도구를 해외에서 들여온 나예요. 수술 자리를 빛내기 위해 다른 병원 의사를 불러온 나라고요.”

    “…….”

    “지금 그런 나를 나쁜 놈으로 모는 겁니까? 섭섭하게?”

    “웃기는 소리. 지금까지 말한 것들은 다 날 궁지에 몰기 위해 한 일 아닌가. 날 위했던 것처럼 포장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양순재의 똑 부러진 반격에 이진영은 크게 당황했다.

    의술 말고는 까막눈인 양순재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자신의 의도와 계략을 매섭게 꿰뚫고 있었다니…….

    “그 잘난 네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말이야.”

    양순재가 차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흉강경 수술을 게 눈 감추듯이 처리한 건 다 너 때문이었지. 네가 날 처내려 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거든.”

    “그… 그런…….”

    “천하의 이 과장께서 말도 더듬을 줄 아는군. 새롭고 놀라운 발견이야.”

    양순재가 불연 듯 휴대폰을 꺼내 음성파일을 재생했다.

    「그 양반 쫓아내면 부교수 자리는 무조건 네 거야. 그때부터 의국 스태프들도 한번 싹 갈아 보자고.」

    파일을 확인한 순간 이진영은 아차 싶었다.

    누군가가 그와 박성진이 나눈 대화를 녹음했던 것이다.

    상황이 이쯤 되면 거짓말이나 핑계도 의미가 없었다.

    이제 이진영은 자신과 양순재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았음을 깨달았다.

    다시는 양순재를 이용해 먹을 수 없다는 것도.

    “앞으로 역겹게 친한 척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제 할 말만 하고 쌩하니 떠나는 양순재의 모습을 이진영은 지켜보기만 했다.

    오늘 오전은 시작부터 최악이었다.

    * * *

    “녀석, 얼굴이 아주 볼만하더구나. 할 수만 있었다면 사진이라도 찍어서 네게 보여 주고 싶은 심정이었단다.”

    양 교수가 껄껄껄 시원하게 웃었다.

    오전 정규 수술이 끝난 후 나는 휴게실에서 양 교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화제는 양 교수가 오전에 이 과장을 만나서 나눈 대화에 관한 것.

    들어 보니 양 교수가 이 과장에게 시원하게 한 방 먹인 모양이었다.

    덕분에 내 가슴도 통쾌해졌다.

    이 과장은 본인의 승진을 위해 주변 사람들을 이용해 먹는 전형적인 악당이었다.

    전생에서는 무난하게 지방 분원에 진료 부원장이 되는데.

    이번 생은 그의 맘대로 술술 풀리지 않을 것이다.

    신수술을 완성한 양 교수가 반대 세력으로 굳건하게 자리 잡았으니까.

    회귀한 나 역시 이 과장을 끌어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테니까.

    “수술이 무사히 끝나서 다행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교수님과 함께할 수 있어서.”

    “그래, 나도 믿음이 너와 함께 있을 수 있어서 기쁘단다. 최소한 네가 전문의가 될 때까지는 봐주고 싶었거든.”

    나를 바라보는 양 교수의 눈빛이 포근했다.

    양 교수를 바라보는 나의 눈빛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참 다행이야. 이번 수술의 마침표가 해피엔딩이라서.’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양 교수에게 받은 은혜를 이번 수술로 조금이나마 갚았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끼면서.

    “이 과장에게 본때를 보여 준 것도 좋고, 흉강경을 완성한 것도 좋은데…….”

    문득 양 교수가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볼을 긁적거렸다.

    양 교수가 왜 곤란해하는지 나는 벌써 알 것도 같았다.

    “앞으로 엄청 바빠지겠구나. 흉강경 클리닉도 생길 테고, 매스컴이 떠들면 환자도 늘어날 텐데.”

    “그 유명세로 교수님이 과장이 되셔야죠.”

    “과장?”

    “네, 저는 교수님이 이번 기회를 발판으로 과장에 오르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야무지게 양 교수를 차기 과장으로 밀었다.

    이 과장의 과장 임기는 올해 말까지였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는 양 교수가 흉강경 수술로 정점을 찍을 때쯤이었다.

    세대교체를 하기에 최적의 타이밍.

    그렇게 양 교수가 과장이 된다면 흉부외과는 전생과 달리 살 만해지지 않을까.

    이번 생의 나는 전생과 다른 길로 뻗어 나가는 흉부외과를 보고 싶었다.

    “내년에 과장이 되신 다음에 천천히 흉강경을 내려놓으면 되지 않을까요? 서 선생이나 강 선생 정도면 충분히 대타로 내세울 수 있습니다.”

    “허… 넌 벌써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구나.”

    양 교수가 혀를 차며 말했다.

    “제가 잔꾀가 많은 편이라…….”

    “원, 녀석도. 그런데 살아 보니까 살아가는 데는 적당한 꾀도 필요한 것 같더구나. 이 나이를 먹고 너 때문에 그걸 깨달았단다.”

    “…….”

    “그래. 기왕 엎질러진 물, 내가 과장까지 도전해 보마. 진영이 녀석이 설치는 것도 더 이상 보기 싫으니까.”

    “저도 물심양면으로 교수님을 돕겠습니다.”

    양 교수의 호탕한 결심에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전생과 달리 조금씩, 조금씩 바뀌고 있는 이번 생의 신원대학교 흉부외과.

    이런 변화들이 모이고 쌓이다 보면 언젠가 흉부외과 전체의 환경을 개선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 당돌한 희망의 씨앗을 가슴에 심었다.

    * * *

    시간이 흐르고 계절은 바뀌었다.

    흉강경 수술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후 양 교수는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학회에 참여하고 논문을 작성하고 각종 매스컴에 출연하느라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양 교수가 유명세에 오르면서 흉강경 팀 역시 덩달아 바빠졌다.

    흉강경 수술 예약이 홍수처럼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한 번의 성공에 자만하지 않고 우리는 주말마다 모여 흉강경 수술의 완성도를 높였다.

    땡볕이 내리 쬐던 그 해 여름.

    서울 신원대학교병원 흉부외과는 국내 최초의 흉강경 수술 전문 집도 병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안 그래도 일손이 부족한데 무슨 수로 밀려드는 수술까지 감당하냐고?

    그런 면에서는 병원을 우습게 보면 안 된다.

    흉강경 수술은 해외에서 들여오는 처치 도구를 사용하는 만큼 수술 단가가 높았다.

    게다가 환자의 회복이 빨라 병상 회전율까지 극대화할 수 있는 수술이 흉강경 수술이었다.

    한마디로 돈이 되는 수술이었다.

    돈 냄새를 맡은 병원이 흉강경 팀을 지원하지 않을 리 없었다.

    병원에서는 급하게 흉부외과 레지던트의 추가 모집을 공고했다.

    놀랍게도 두 명이 지원해서 두 명이 뽑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병원은 지방 분원에 있는 흉부외과 레지던트를 임시로 본원에 파견시키기도 했다.

    인력난이 해결되면서 빈곤에 허덕이던 흉부외과의 인재 풀이 일시적으로 상승했다.

    혼자서 항상 3인분 넘는 일을 하다가 1인분 정도의 일만 하게 되니 일할 맛이 났다.

    오죽하면 내가 그 악랄한 100일 당직을 피했을까.

    “야, 이믿음. 나 너한테 서운한 거 있다?”

    어느 날 병동 복도를 걷고 있는데 허성호가 내게 말을 걸었다.

    “제가 선배한테 실수하거나 무례하게 한 기억은 없는데… 그게 뭐죠?”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허성호는 내가 좋아하는 선배이자 선임이었다.

    잘해 주면 잘해 줬지 못 되게 군 적은 없거늘 대체 무엇 때문에 섭섭한 걸까.

    “의외로 간단한데 그걸 모르네.”

    “이 기회에 허심탄회하게 말해 주세요.”

    “짜식 말이야. 네가 치프가 된 지 얼마나 오래됐는데 아직까지 나를 선배라고만 부르냐. 나도 치프 소리 좀 듣고 싶다고.”

    허성호의 귀여운 투정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네, 치프. 그동안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그치? 네 생각도 그렇지?”

    우리는 화기애애하게 잡담을 나누며 당직실로 들어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계절은 무려 세 바퀴를 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당직실을 나오면서 내가 남하늘에게 말을 걸었다.

    “다음 심막절제술 할 때는 좀 더 과감하게 해 봐. 아까는 손이 너무 얼어 있었으니까.”

    내 당부에 남하늘이 대답했다.

    “네, 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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