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154화 (154/257)
  • 154화 제1장 날실과 씨실(4)

    수술 당일 새벽.

    나는 팔짱을 낀 채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눈을 감은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졸고 있는 것도, 자고 있는 것도 아닌 훈련 상태였다.

    일종의 이미지 트레이닝.

    까만 암흑을 도화지 삼아 나는 오늘 흉강경 수술 중에 벌어질 수 있는 다양한 악재들을 그려 보았다.

    흉막 유착이나 폐동맥 출혈.

    갑작스런 심정지와 CPR 상황.

    긴장한 스태프들이 저지르는 의료 사고 등등.

    중요한 일을 앞두고 최악의 사태를 상상해 보는 것은 꽤 중요했다.

    상상을 통해 대비책을 얻을 수 있으니까.

    나는 내친김에 사건 사고의 범주를 나누었다.

    범주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자잘한 사건, 사고를 떠올린 뒤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필기를 하자 맞서 싸워야 하는 적들의 정체와 실체가 드러나는 기분이었다.

    볼 수 없는 적은 상대할 수 없지만 볼 수 있는 적은 상대할 수 있겠지.

    머리가 지끈거리고 손가락이 쑤실 때쯤 나는 작업을 멈추었다.

    작업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오늘 흉강경 팀에 발생할 수 있는 사고란 사고는 노트에 다 적혔고, 나는 그 사고를 막을 대비책까지 세워 두었다.

    회귀한 지식을 쥐어짜 가면서 말이다.

    만반의 준비를 끝마쳤기 때문일까.

    나는 1초라도 빨리 수술실에 들어가고 싶었다.

    흉강경 팀의 고생이 빛을 보며 이 과장의 간사한 계략은 무너지길 바랐다.

    창밖으로 이동해 기지개를 켰다.

    커튼을 걷어 내며 바깥을 바라보니 푸른 먼동이 트고 있었다.

    “선배, 안 피곤하세요?”

    문득 당직 인턴 남하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선배라는 단어에 괜히 낯이 간지러웠다.

    늘 후배 노릇만 하다가 레지던트 1년 차가 되면서 선배 대접을 받은 탓이었다.

    “오늘 중요한 수술 있으시잖아요. 잠깐이라도 눈 좀 붙이세요. 밤새신 것 같은데.”

    “지금 자면 아예 못 일어날 것 같아서. 수술방 들어가기 전에 커피 한 잔 때리면 괜찮아.”

    나는 남하늘을 안심시켰다.

    “커피 마시면 화장실 가고 싶지 않으세요?”

    “가고 싶으면 참아야지. 수술 중에 화장실 가겠다고 할 순 없잖아?”

    “흉부외과 선배님들은 참는 게 참 많은 것 같아요.”

    남하늘이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보아하니 내년 흉부외과 레지던트 지원자 한 명이 또 줄어들 모양이었다.

    하긴, 한 달만 발을 담가도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과가 흉부외과이긴 하지.

    내겐 남하늘에게 흉부외과를 어필하거나 매혹할 방법이 없었고.

    설령 있다고 해도 그 방법이 남하늘에게 통할 것 같지도 않았다.

    “유민식 환자는 내가 직접 관리할 거니까 신경 쓸 필요 없다.”

    “오늘 흉강경 수술받는 환자 말씀하시는 거죠?”

    “오냐.”

    “근데 선배, 저 예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요.”

    남하늘이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순진하게 생긴 외모와 달리 남하늘은 저돌적이고 직선적인 성격이었다.

    “선배는 의대 다닐 때부터 사람 살리고 엄청 유명했잖아요. 인턴 때도 날아다녔고요.”

    “짜식, 쑥스럽게 옛날이야기는 또 왜 꺼내?”

    “그런 선배가 왜 흉부외과로 오셨어요? 좀 더 여가 시간이 보장되고 돈 많이 버는 과목도 많잖아요.”

    “…….”

    “솔직히 저는 선배가 사서 고생하는 것처럼 보여서 안타까워요.”

    남하늘의 말은 얼핏 버릇없어 보였지만 순수하게 나를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근무 도중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는 적도 많았고.

    “하늘아.”

    나는 피식 웃으며 남하늘에게 다가갔다.

    왜 고생만 하는 흉부외과를 택하셨어요?

    …라는 남하늘의 질문을 나는 전생부터 이번 생까지 수백 번 들었다.

    당연히 모범 답안을 가지고 있었다.

    “남이 시켜서 하는 일은 고생이지만 내가 선택해서 하는 일은 경험이란다.”

    “…….”

    “나는 흉부외과를 경험하면서 매일매일 성장하고 있어.”

    남하늘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리고 나는 남하늘을 스쳐 지나갔다.

    내 얄팍한 명언은 남하늘의 가슴에 어떤 여운을 남겼을까.

    그 여운은 남하늘을 흉부외과에 붙잡아 둘 수 있을까.

    결과는 11개월 뒤에나 알 수 있을 것이다.

    * * *

    오전 컨퍼런스 준비를 마친 뒤.

    나는 곧바로 유민식 환자가 있는 병실을 찾았다.

    유민식은 올해로 51세이며 본원 건강 검진에서 촬영한 흉부 엑스레이에서 결절이 발견되었다.

    이후 촬영한 CT 결과에서 우측 폐의 종양이 발견되어 닷새 전 입원하게 되었다.

    T(종양의 크기), N(림프절 전이), M(다른 장기로의 전이) 병기로 분류했을 때 유민식의 폐암은 T2N0M0이었다.

    즉, 흉강경 수술에 적합한 폐암 1기였다.

    “몸은 좀 어떠세요?”

    “죽겠어요. 배도 고픈 데다가 잠도 못 잤으니…….”

    “창가 쪽에 계신 분이 코를 엄청 골더라고요.”

    내 질문에 환자와 보호자가 기다렸다는 듯 고충과 불만을 토로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참 고생이 많으셨습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치료를 위해 6인실에 입원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 좁은 공간에 환자와 보호자 12명이 복작거리면 얼마나 불편하고 불쾌한지를…….

    그렇다고 하루 병실비가 10만 원을 넘어가는 1~3인실을 쓸 수도 없으니 환자와 보호자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저 같은 병실을 쓰는 사람 중 진상이 없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

    나는 환자에게 계속 일상적인 질문을 던졌다.

    밥은 입맛에 맞느냐.

    수술을 앞두고 초조하지는 않느냐.

    하루 종일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냐 등등.

    질문을 던진 후에는 환자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어 주었다.

    스태프가 환자의 말을 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환자의 입원 만족도는 대폭 올라가기 마련이었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나도 전생에 입원 치료받을 때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드디어 시작인가?’

    환자와 충분히 라포를 쌓은 나는 심호흡을 했다.

    지금부터 큰 산을 넘어야 했다.

    바로 수술 동의서를 받는 일이었다.

    동의서는 보통 수술 전날에 받지만

    어제 내 설명을 들은 유민식은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

    일반 수술이 아닌 흉강경 수술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불안해하는 환자의 마음을 나는 십분 이해했다.

    누군가 검증되지 않은 신수술법을 내게 적용한다면 나를 실험 대상으로 여기는 듯한 기분이 들 테니까.

    “마음의 결정은 하셨나요?”

    나는 유민식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한테는 죄송하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네요.”

    유민식이 멋쩍어하며 말을 이었다.

    “말만 들어 보면 흉강경 수술이라는 게 회복도 빠르고, 흉터도 안 남는다고 하지만… 아직 대중적인 수술은 아니잖아요?”

    “네, 맞습니다.”

    나는 순순하게 인정했다.

    환자에게 흉강경 영업을 하려고 굳이 애쓰지 않았다.

    그런 짓을 해 봐야 역효과만 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선택은 환자분이 하시면 됩니다. 회복 시간을 줄이고 통증을 완화하며 또 흉터를 신경 쓰신다면 흉강경을…….”

    “…….”

    “안정적인 수술을 원한다면 개흉 수술을 추천드립니다.”

    나는 가운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동의서 두 장을 꺼냈다.

    하나는 개흉 수술의 동의서고.

    다른 하나는 흉강경 수술의 동의서였다.

    “하… 진짜 곤란하네. 만약 선생님이 제 입장이라면 무슨 수술을 받으실 겁니까?”

    유민식이 갈등하다가 바통을 내게 넘겼다.

    나는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왔음을 느꼈다.

    여기서 내가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유민식의 폐암 수술 방법이 바뀔 것이다.

    이 상황에서 흉강경을 추천하면 너무 노골적일까.

    그렇다고 개흉 수술을 추천하면 역시 검증된 수술이 좋다며 덥석 개흉술을 택할 것 같은데…….

    공존할 수 없는 두 가지의 갈래길이 나를 괴롭혔다.

    짧으면서도 긴 고뇌 끝에 나는 결국 가야 할 길을 정했다.

    “제가 수술을 받는다면… 흉강경 수술을 택하겠습니다.”

    나의 선택은 돌직구였다.

    에두르지 않고 솔직함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내가 본심과 의도를 숨긴다면

    상대가 내 본심과 의도를 어떻게 알겠는가.

    그렇다면 내 마음을 직구로 던지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 마음을 받고, 받지 않고는 상대방의 문제일 테니.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흉강경 수술은 국내에서는 아직 펼쳐진 적이 없는 수술이라고 하셨잖아요. 아무리 선생님이라도 불안하지 않아요?”

    “우리나라에서 아직 더딜 뿐 미국에서는 한참 유행하고 있는 수술입니다.”

    “미국과 한국은 상황이 다르잖아요.”

    환자는 계속해서 흉강경 수술에 의문과 의심을 품었다.

    신수술을 향한 환자의 마음의 벽은 역시 높고 두터웠다.

    “그렇죠. 환자분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흉강경 수술 도중 문제가 생긴다면 개흉 수술로 전환할 수도 있습니다.”

    “…….”

    “위기에 대처할 방법이 있으니 저라면 흉강경 수술을 할 것 같네요.”

    “으음, 그렇다면… 좋습니다. 선생님 말 믿고 흉강경 수술로 가겠습니다.”

    유민식이 호쾌하게 대답하고 내 오른손에 있던 흉강경 수술 동의서를 낚아챘다.

    나는 그제야 팽팽하게 긴장했던 몸의 근육을 풀 수 있었다.

    유민식이 흉강경 수술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수술 스케줄은 속절없이 뒤로 밀렸을 것이다.

    흉강경에 적합한 환자를 기다리며.

    또 그 환자가 수술에 동의해 주기를 기다리는 악순환에 빠졌을 것이다.

    그런데 유민식이 선뜻 수술에 동의해 준 덕분에 시간을 절약했다.

    나를 믿어 준 유민식이 나는 그저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었다.

    이에 대한 보답이라면 역시 수술을 완벽하게 집도하는 것이겠지.

    “제 의견을 물어보셔서 그렇다는 겁니다. 제 말에 너무 휘둘리실 필요는 없어요.”

    나는 일부러 한 발짝 물러났다.

    “환자가 의사를 못 믿으면 되겠습니다. 또 평소에 선생님이 저를 워낙 신경 써 주셨기도 하고.”

    “알겠습니다. 그럼 흉강경 수술로 준비하겠습니다.”

    나는 수술 동의서의 내용을 한 번 더 꼼꼼하게 설명하고 서명을 받았다.

    이걸로 수술에 필요한 모든 퍼즐 조각들이 모였다.

    이제 남은 건 이 조각들을 제자리에 잘 맞춰서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하는 것뿐이었다.

    * * *

    오전 컨퍼런스가 시작되기 전, 회의실.

    “이야, 대박! 동의서 받았다고?”

    놀란 허성호가 입을 쩍 벌리며 물었다.

    “네, 어제 서명을 안 하겠다고 하셔서 조금 불안했는데 오늘은 해 주시더라고요.”

    “너도 능력자는 능력자다. 환자가 신수술 동의서도 넙죽넙죽 사인해 주고.”

    “환자는 주치의 하기 나름이죠.”

    “짜식, 잘난 체는.”

    허성호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옆구리를 건드렸다.

    환자를 존중하고 환자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기.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동시에 주치의로서 환자에게 너무 끌려다니지 않기.

    이런 환자들 다루는 덕목은 전생에서 물려받은 내 특기였다.

    비록 한 많은 전생이었지만 전생이 꼭 내게 나쁜 것만 남긴 것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네가 제일 중요한 일을 했다. 빡세게 연습해서 수술 완성도를 높여 놓으면 뭐 하겠어. 환자가 없어서 수술을 못한다면.”

    “…….”

    “양 교수님이나 서 선생님도 좋아하겠다.”

    “그러게요.”

    짧은 잡담이 끝난 후 오전 컨퍼런스가 시작되었다.

    내 곁에 앉아 있던 허성호는 어느새 단상으로 이동했다.

    기존 의국장 신창수가 펠로우가 되면서 3년 차였던 허성호가 의국장을 차지한 것이다.

    “이 선생, 유민식 환자 흉강경 동의서는 받았어요?”

    주치의들이 입원 환자 브리핑을 끝내고.

    수술 스케줄을 정리하는 시점에서 이 과장이 나를 불렀다.

    그 의도가 뻔히 보였기에 나는 속으로 웃었다.

    분명 동의서를 못 받을 거라 생각하고 있겠지.

    “네, 과장님. 오늘 오전에 충분히 설명드리고 받았습니다.”

    “아, 그래요? 잘했어요.”

    내 기대와 달리 이 과장은 실망한 표정을 짓지 않고 오히려 잘됐다는 듯 미소를 띠었다.

    이거 내가 모르는 꿍꿍이가 있는 건가?

    그 이유는 컨퍼런스가 끝날 때쯤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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