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152화 (152/257)

152화 제1장 날실과 씨실(2)

회의실에서 진행되는 오전 컨퍼런스.

양순재는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혹시 특별히 더 하실 말씀 있는 분 계십니까?”

입원 환자 브리핑, 수술 스케줄 정리, 케이스 발표 등의 순서가 지나고 의국장이 의례적인 질문을 던졌다.

지금이 바로 양순재가 나설 때였다.

그는 고요하게 손을 들었다.

의국 스태프들의 시선이 일순간 양순재에게 쏠렸다.

“양 교수님, 말씀해 주세요.”

“흠흠,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것 같습니다. 너그럽게 양해들 부탁드립니다.”

양순재는 헛기침을 하고 스태프들의 얼굴을 훑었다.

심드렁한 얼굴, 의아한 얼굴, 궁금한 얼굴 중에 그의 기운을 북돋워 주는 얼굴이었다.

천재 외과의 이믿음의 얼굴이었다.

이믿음은 소리를 죽인 채 입술로 교수님 파이팅이라고 말을 했다.

어떤 때는 책략가 같으면서, 어떤 때는 환자밖에 모르는 바보 같고, 어떤 때는 귀여운 구석도 있는 이믿음이었다.

“이 과장님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얼마든지 말씀하시죠.”

이 과장이 성인군자처럼 너그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 과장의 진실과 진심을 이믿음을 통해 녹음 파일로 들었기 때문일까.

저 표정과 태도와 목소리가 가증스럽고 위선자처럼 역겨웠다.

“앞으로 3개월 이내에 흉강경 폐암 수술을 도입할 예정입니다. 필요한 장비를 지원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갑자기 흉강경 수술을요?”

놀란 이 과장이 눈을 깜빡거렸다.

다른 스태프들의 반응도 이 과장과 다를 바 없었다.

양순재가 흉강경 수술을 도입해야 하는 이유를 전혀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설마 제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죠?”

“똑똑히 잘 들었습니다. 은퇴하기 전에 후학들을 위해 뭐라도 하나 남겨 주고 싶어서 말입니다.”

“흉강경 수술, 그거 만만치 않을 텐데요? 노구(老軀)로 소화 가능하시겠습니까?”

이 과장의 입가에 흐릿한 냉소가 떠올랐다.

겉으로는 걱정해 주는 것 하면서 사실 속으로는 그의 도전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흉강경 수술에 자신이 없다면 이렇게 공식적인 자리에서 입에 담지도 못했겠죠.”

양순재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지금부터가 진짜 승부였다.

이 과장을 구워삶아서 수술 도구 지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과장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 이 과장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이랄까.

“꼭 그렇게까지 일을 벌여야겠습니까?”

이 과장이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양 교수님은 이미 학계에서 인정받는 명의신데요. 굳이 고생을 사서 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

“하나 더. 흉강경 수술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알고 계시죠? 미국에서도 요즘에야 유행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다 알고 있습니다.”

양순재는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흉부외과라는 과목이 생긴 이래 외과 수술이란 곧 개흉수술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개흉을 하지 않겠다고?

피부에 고작 구멍 두세 개 뚫고 그 자리에 카메라와 수술 도구를 넣어서 수술을 하겠다고?

즉, 흉강경 수술은 지난 수술의 질서를 파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흉부외과의들이 흉강경 수술에 거부감과 동시에 두려움을 가지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양순재 역시 다른 흉부외과의처럼 두려웠다.

하지만 두려움보다 이 과장을 괘씸하게 여기는 마음이 더 컸다.

이 과장에게 느끼는 배신감이 더 컸다.

본 원에 남아 이믿음의 성장을 더 지켜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

“과장 회의 때 진료 부원장님께 말씀은 드려 보겠습니다. 과연 허락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이 과장의 애매한 대답.

양순재는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이 과장님이 힘 좀 써 주세요. 이번 흉강경 수술에 제 모든 것을 바칠 예정이니까.”

“모든 것을 바친다니… 너무 거창한 말씀 아닙니까?”

“거창한 거 맞아요. 흉강경 수술 실패하면 그땐 진짜 은퇴할 거니까.”

양순재는 미끼를 던지고 이 과장을 응시했다.

이 과장이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리는 소리가 귀에 선명하게 들리는 듯했다.

이 과장은 양순재를 어떻게 해서든 내치고 싶어 했다.

그런데 신수술 도입에 실패하면 제 발로 나가겠다고 하니 구미가 확 끌린 것이다.

“흉강경은 어떻게 보면 실패하는 게 당연할 수도 있는 수술인데… 은퇴까지 거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위선자 녀석, 끝까지 나를 위하는 척하는구나.’

양순재는 콧방귀를 낀 뒤 말을 이었다.

“아까 말했다시피 말년에 족적을 남기고 싶어서 그럽니다. 그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죠. 양 교수님이 수술 연구를 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돕겠습니다.”

아까 전의 미지근했던 반응과는 180도 다른 반응.

양순재는 이 과장이 자신이 던진 미끼를 물었음을 확신했다.

미끼를 문 이 과장에게 끌려 오히려 물속에 빠지느냐.

이 과장을 뭍으로 건져 올리느냐.

이번 낚시의 향방은 이제 양순재의 손에 달려 있었다.

* * *

오전 컨퍼런스가 끝난 뒤 이진영은 박성진을 끌고 본 원 옥상에 올랐다.

봉화대에 불이 붙고 연기가 치솟듯

옥상 곳곳에서 불이 붙고 담배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그 모습은 흡연자 스태프들이 고단한 하루가 시작됐다는 전보를 주고받는 것 같았다.

“그 양반, 아침을 잘못 먹었나? 왜 갑자기 폭탄선언을 하지?”

이진영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물었다.

지금도 양순재의 의도가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말년에 신수술을 도전해 보고 싶다는 말에.

신수술에 실패하면 은퇴하겠다는 말에.

덜컥 수락은 했다만 뒤가 구린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점잖은 사람이 평생 안 하던 짓을 하고 있었으니까.

“설마 우리 계획을 눈치챈 건 아니겠지?”

“제가 양 교수와 가끔 이야기를 나누는데,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양 교수는 순진한 사람이라 본인 감정을 못 숨깁니다.”

박성진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본인이 배신당했다는 걸 알았다면 과장님을 찾아와 노골적으로 따졌겠죠. 왜 그랬냐든가, 섭섭하다든가.”

“하긴, 그것도 그렇지? 후우.”

이진영은 담배 연기와 안도의 한숨을 동시에 내쉬었다.

지금의 이진영을 만든 것은 쓸데없을 정도로 깊은 걱정과 그 걱정을 해소하기 위한 철저한 준비성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련의 과정이 요즘은 귀찮았다.

그래서 요즘은 박성진의 두뇌를 자주 빌리고 있었다.

“뭐, 지방 분원으로 쫓아내는 정도로 끝내려 했더니만… 제 발로 나가 주겠다고 하니 고마울 따름이네.”

“모든 상황이 과장님께 웃어 주는 것 같습니다.”

“맞아, 일이 너무 잘 풀려서 두려울 정도야. 그렇다고 너무 방심해선 안 돼.”

이진영은 박성진에게 양순재의 감시를 소홀히 하지 말라고 전했다.

양순재가 눈 밖에서 사라지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끝난 게 아니었다.

“한 대 더 피우십니까?”

“어.”

만성 역류성 식도염을 앓아 속이 쓰렸음에도 이진영은 기어이 두 번째 담배에 손을 댔다.

편하게 마음을 놓고 싶은데 이상하게 계속 찜찜하고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만약에 말이다.

양 교수가 흉강경 수술을 성공적으로 소화한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까지 준비했던 계략들은 과연 의미가 있을까.

* * *

아무도 없어 고요한 당직실에서 나는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기댔다.

‘시간 참 빠르네.’

문득 벽에 걸린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12월 27일.

풋내기 인턴으로 병원에 들어온 게 엊그제 같거늘, 벌써 한 해가 다 저물어 가고 있었다.

드르르륵.

모처럼 여유와 평화를 만끽하던 그때.

당직실 문이 열리고 황은우가 나타났다.

“이야, 이믿음 팔자도 좋다? 멍 때릴 여유도 있고?”

“그 전까지 일한 걸 못 보셔서 그래요. 차트 입력하느라 얼마나 바빴다고요.”

“그래서 다 했고?”

“제가 할 일은 다 했죠. 잠깐 쉬었다가 선배 일도 대신해 드리려고요.”

“뭐야? 설마 수술 기록지라도 적어 주려고?”

“네.”

“넌 남자지만 너무 예뻐. 뽀뽀해 주고 싶을 정도로.”

“어휴, 끔찍한 소리 마세요.”

황은우의 농담에 진저리 치며 나는 황은우를 응시했다.

최근 며칠 사이 황은우의 얼굴은 꽃처럼 활짝 폈다.

그의 간절한 소원이 마침내 이뤄졌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닷새 전.

신원대학교 병원 홈페이지에 레지던트 지원 모집 공고가 떴다.

모집 인원은 총 170여 명.

그중에서 흉부외과 모집 인원은 네 명이었다.

흉부외과 해바라기였던 나는 당연히 흉부외과에 지원했고, 당당하게 합격했다.

다만 여기서 서글픈 사실 하나.

당시 흉부외과 지원자가 나 하나뿐이었다는 점이었다.

어쨌거나 내가 정식으로 흉부외과 레지던트 1년 차가 되면서 황은우는 드디어 막내를 벗어나게 되었다.

운신의 폭이 자유로워진 것이다.

그러니 황은우가 전생처럼 흉부외과를 탈주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그 괘씸한 자식은 어떻게 됐냐?”

“태호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너랑 나 사이를 이간질했던 그 몹쓸 놈팡이.”

“우리 병원 성형외과 지원했다가 떨어진 모양이에요.”

손태호 이야기를 꺼내는 내 입가에 고소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민호에게 버림받은 시점에서 손태호의 미래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마 지금쯤 부리나케 다른 병원의 레지던트 공고를 뒤지고 있지 않을까.

“짜식, 쌤통이다. 그 자식은 성형외과에 지원하기 전에 자기 마음부터 성형해야 돼. 의사가 되기 전에 사람부터 되어야지.”

“저도 동감입니다.”

짧은 잡담 후 황은우가 수술 보조를 위해 당직실을 떠났다.

나는 황은우의 아이디로 프로그램에 접속해 수술 기록지를 번개처럼 작성했다.

전생의 짬밥 덕분에 밀린 수술 기록지 작성은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이제 제일 중요한 스케줄 하나만 남았구나.’

오늘 저녁은 나와 양 교수에게 무척 중요한 시간이었다.

수술실에서 모형을 이용해 흉강경을 연습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양 교수와 서인석.

허성호와 나, 그리고 예비 스태프인 황은우.

이렇게 5인으로 꾸려진 흉강경 수술 팀은 지난 2주일 동안 뼈를 깎는 노력을 해 왔다.

일과와 밀린 업무까지 모두 마친 뒤

늦은 저녁에 모여 3, 4시간씩 논문을 공부하고 환자 케이스 발표를 했다.

노력한 만큼 보람도 있었다.

흉강경 수술의 이론적 토대를 탄탄하게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실전뿐이었다.

‘제일 큰 골칫거리는 시간인데…….’

나는 주어진 날짜를 확인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하늘은 얄밉게도 이 과장의 편을 들어 주었다.

어제 오전 컨퍼런스 도중 떨어진 날벼락 같은 소식.

그것은 교수들의 근무 실적 평가가 한 달 앞으로 당겨졌다.

QA(Quality Assurance, 의료의 질 보장).

그러니까 교수의 실적 평가를 병원 내부에서 의료의 질을 평가하는 시기에 맞추겠다는 것이다.

인사 고과가 한 달 앞당겨지면서 나와 양 교수의 발등에는 불이 떨어졌다.

인사 평가 전에 흉강경 수술을 완성해서 성적을 내야 했기 때문이다.

만약 기간 안에 흉강경 수술을 완성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과장이 정치질로 깎아 놓은 양 교수의 인사 고과가 그대로 반영될 것이다.

양 교수는 힘 한 번 못 써 보고 지방 분원으로 좌천될 것이다.

그야말로 최악의 시나리오.

하나, 둘, 셋, 넷…….

나는 달력을 보며 흉강경을 완성까지 필요한 날짜를 손으로 세었다.

최소한 40일 안에는 시연까지 마쳐야 했다.

개흉에 익숙한 이 시대의 한국 서전들이 과연 40일 만에 흉강경을 소화하고 흡수할 수 있을까.

나는 불현듯 치밀어 오르는 걱정과 우려를 떨쳐 냈다.

회귀한 내가 있다면 못할 것도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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