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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147화 (147/257)
  • 147화 제5장 한번 붙어 보자(2)

    “시간이 없다고? 없으면 만들어. 네가 언제부터 내 말에 토를 달았지?”

    -…….

    “그래.”

    이민호는 무심한 목소리로 통화를 끊었다.

    본래라면 30분 뒤에 수술 어시스트에 들어가야 했지만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취소했다.

    인턴 신분에 멋대로 스케줄 관리를 할 수 있었던 건 큰아버지가 진료부원장이어서였다.

    돌연 어시스트를 취소한 이유는 이믿음 때문이었다.

    이믿음을 만나 대화를 나눈 뒤 이민호의 마음이 극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이 혼란을 정리하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아직도 헷갈린단 말이지.’

    이민호는 얼굴을 찌푸리며 턱을 쓸어내렸다.

    자신의 수하라고 생각했던 손태호를 이믿음은 이중 스파이 같은 존재라고 주장했다.

    얼마 전부터 손태호가 자신과 관련된 정보와 계획을 이믿음에게 흘렸다고 주장했다.

    놀랍게도 마냥 헛소리로 치부할 것은 아니었다.

    개연성과 인과 관계가 충분히 존재했다.

    먼저 개연성을 살펴보자.

    간호사 희롱 유도와 윗 연차 선배와의 이간질.

    손태호가 최근 펼친 공작을 이믿음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대단한 공작은 아니었다만

    교묘하고 야비해서 이믿음을 충분히 괴롭히고 몰락시킬 만한 공작이었다.

    그런데도 이믿음은 계획을 전부 피해 내 끄떡없었다.

    이믿음은 과연 어떻게 그 계획을 전부 피할 수 있었을까.

    의료 지식만 뛰어날 뿐 간사한 계략에는 한없이 약한 인간일 텐데 말이다.

    그렇다면 역시 첩자가 있다고밖에 볼 수 있지 않을까.

    둘째로 인과 관계를 살펴보자.

    손태호는 오랫동안 자신의 수족으로 지내 왔다. 자연스레 그 기간만큼 울분이 쌓여 있다고도 볼 수 있었다.

    자신의 강압을 참다못해 이믿음 쪽에 붙었다고 하면 배신한 이유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함께한 시간이 무려 9년이다. 이제 와서 나를 배신한다면 득보다 실이 더 많을 텐데?’

    이민호의 이마에 진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이믿음의 주장 쪽으로 마음이 기울다가 이번에는 손태호를 믿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이민호는 손태호를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냈다.

    영악한 손태호는 그때부터 그의 곁에 붙어 다니며 충성스러운 개처럼 굴었다.

    틱틱거리는 말투로 가끔 그의 심기를 건드렸으나 결코 선을 넘은 적은 없었다.

    손태호는 기가 막히게 선을 잘 지키는 놈이었다.

    이민호가 손태호를 좋아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고.

    그런 손태호가 이믿음 쪽에 홀라당 붙어 버렸다라…….

    솔직히 납득하기 어려웠다.

    하…….

    이민호의 입술 사이로 모처럼 힘 빠지는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럴듯한 논리를 가진 두 개의 주장이 서로를 거짓이라 말하고 있었다.

    잔인하게도 제3의 길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가 참이라면 다른 하나는 반드시 거짓이 되어야 했다.

    이믿음의 주장대로 손태호가 첩자일까?

    공평하게 경쟁을 하고 싶어서 손태호가 첩자라는 사실을 밝힌 걸까?

    그게 아니라면 말이다.

    이믿음은 그저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해 연막 작전을 펼쳤던 걸까.

    이민호는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벌컥!

    때마침 휴게실 문이 열리고 오늘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첩자일지도 모르는.

    혹은 누명을 썼을지도 모르는 손태호가 나타난 것이다.

    “민호야, 오늘은 좀 심했다? 나 보고 싶은 건 아는데 병동 일은 다 끝나고 봐야지.”

    너스레를 떨며 맞은편에 앉는 손태호.

    이민호는 대답하지 않고 가라앉은 눈빛으로 손태호를 훑어보았다.

    이믿음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라서 그럴까.

    손태호의 행동과 말투, 눈빛 하나하나가 다 의심스러웠다.

    “내가 널 부른 이유가 있다.”

    “뭔데? 오늘은 표정이 꽤 심각해 보인다?”

    “모르는 거냐?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냐?”

    “뭔 소리야. 초능력자도 아니고 네가 날 부른 이유를 내가 어떻게 알아?”

    이민호가 슬쩍 찔러봤으나 손태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믿음에게 들은 것이 없는 걸까.

    다 듣고 오히려 철저한 연기를 준비해 온 걸까.

    이민호의 마음은 다시 갈대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 이믿음이 나를 보고 갔다. 사실은 네가 얼마 전부터 첩자 노릇을 시작했다고 하더군.”

    이민호는 늘 그랬듯 본론부터 찌르고 들어갔다.

    현 상황이 많이 혼란스럽긴 하지만 해결할 자신이 있었다.

    금수저로 태어난 그는 눈을 감고 걸어도 결국 옳은 길을 선택한다는 자부심이 있었으니까.

    이번에도 그의 선택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 * *

    “그 새끼가 하는 말을 믿어? 민호야, 제발 정신 차려. 내가 그럴 리 없잖아, 응?”

    “…….”

    “그거 다 거짓말이라고. 이믿음 그 새끼가 그냥 나를 골탕 먹이고 싶어서 하는 짓이라고. 이제 와서 내가 너를 배신하면 무슨 이득이 있는데? 내 말이 맞잖아.”

    5분 전, 손태호는 이민호의 입에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이믿음이 자신을 이믿음의 첩자라고 밝히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어이가 없고 화도 나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손태호는 한동안 말문을 잃어버렸다.

    다양한 감정이 뒤섞인 가운데 선두로 치고 나온 감정은 위기감이었다.

    이민호가 이믿음의 헛소리를 믿어 버리면 손태호는 끝장이었다.

    지난 몇 년간 했던 개고생이 물거품으로 변하면서 로얄 패밀리에서 내쫓김당할 것이다.

    성형외과를 개원해서 돈을 긁어모으겠다는 야무진 꿈은 찢어질 것이고.

    당장 몇 달 뒤에 있을 성형외과 레지던트 합격조차 불가능해질 것이다.

    손태호는 이민호라는 동아줄이 끊어지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민호 패거리와 어울렸던 그를 좋아해 줄 동기나 선후배는 한 명도 없을 테니까.

    그야말로 완벽한 고립.

    “나를 배신한다고 해서 무조건 이득이 없다고 볼 수는 없지.”

    이민호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무슨 끔찍한 소리야?”

    “자, 일단 배신을 안 들킨다는 가정을 해 보지. 내 곁에서 받을 수 있는 이득이란 이득은 다 챙기면서 나중에 이믿음을 도와 나를 물리친다면 말이야.”

    “…….”

    “네가 바라는 최고의 시나리오가 되지 않을까?”

    “민호야, 너 미쳤니? 너답지 않게 왜 그래? 언제부터 네가 소설가가 된 건데?”

    이민호의 상상력이 풍부한 주장에 손태호는 더욱 당황했다.

    그 냉정했던 이민호가 이믿음의 헛소리에 이렇게 빠져든다고?

    이 상황이 꿈인가 싶어서 볼을 꼬집었지만 볼은 아프기만 했다.

    “방금 나보고 미쳤냐고 했나? 너 따위가? 감히?”

    “미안, 너무 흥분하다 보니 말이 헛나왔나 봐. 용서해 줘.”

    손태호는 이것저것 잴 것 없이 무릎을 꿇었다. 비굴하게 양손을 비비며 용서를 구했다.

    그럼에도 손태호를 내려다보는 이민호의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

    손태호가 선을 넘는 순간, 이민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이민호는 손태호가 아닌 이믿음의 손을 들어 주기로 결심했다.

    백번 생각해도 이믿음은 이런 간계를 펼칠 위인이 못 됐다.

    그가 본 이믿음은 환자밖에 모르는 동시에 바보 같을 정도로 정의로운 녀석이었다.

    의대 OT 시절 교통사고가 발생했을 때.

    주점에서 칼부림 사건이 터졌을 때.

    KTX 심장 이송 사건 때 등등.

    이믿음은 항상 사람과 정의의 편에 섰다. 그런 이믿음이 자신의 마음을 뒤흔드는 계략을 짰을 리 없었다.

    -맞아, 그래서 지금도 네가 이해 못할 행동을 하고 있는 거야. 난 이득보다 정의와 공정을 좋아하니까.

    분명했다.

    이믿음은 그저 이민호 자신과 정의롭고 공정하게 경쟁하기 위해 손태호의 정체를 밝힌 것이었다.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손태호, 일어나.”

    “이제 용서해 주는 거야?”

    “아니, 넌 오늘부로 우리 패밀리에서 영구 제명이다.”

    “아… 안 돼! 민호야, 네가 나한테 이런 안 되는 거잖아.”

    손태호가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애걸복걸했지만 이민호는 손태호를 걷어차고 휴게실을 빠져나왔다.

    그제야 꽉 막혔던 속이 시원해졌다.

    * * *

    터벅, 터벅.

    손태호는 빠른 걸음으로 흉부외과 병동으로 복귀했다.

    땅바닥으로 꺼지는 듯한 절망에 빠진 것도 잠시뿐.

    손태호는 금방 기운을 차리고 다음 계획을 세웠다.

    고뇌에 고뇌를 거듭한 가운데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 줄 단 하나의 방법을 발견했던 것이다.

    내가 그동안 이민호 새끼 시중드느라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암, 절대로 이렇게 포기는 못하지.

    생각에 깊게 빠졌던 덕분일까, 손태호는 순간 이동을 한 것처럼 흉부외과에 도착한 기분이 들었다.

    “선생님, 믿음이 어디 있어요?”

    손태호는 스테이션에서 근무 중인 간호사에게 물었다.

    “방금 수술실로 갔는데.”

    “얼마 전예요?”

    “바로 직전이요. 한 2, 3분 됐으려나?”

    손태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수술실 방향으로 걸음을 돌렸다. 간호사가 밀린 처치를 해야 한다며 다급하게 말했지만 못 들은 척했다.

    이 다급한 상황에서 처치 따위, 알 게 뭐란 말인가.

    숨이 찰 정도로 뛰던 손태호는 마침내 앞서 걷는 이믿음을 발견했다.

    모퉁이를 한 번 꺾으면 수술실에 도착하는 복도쯤이었다.

    타이밍이 기가 막힌 걸 보면 아직 하늘이 그를 버린 것 같지는 않았다.

    “이믿음!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손태호는 휴대폰의 녹음 기능을 켜 놓은 뒤 이믿음에게 말을 붙였다.

    이믿음과의 대화를 녹음해 이민호에게 자신의 결백함을 밝힌다.

    이것이 손태호의 작전이었다.

    “나 바쁜데.”

    “잠깐이면 돼. 아주 잠깐이면.”

    손태호는 가까스로 이믿음의 걸음을 멈춘 뒤 이믿음을 마주 보았다.

    이믿음의 면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울컥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믿음이 한 헛소리 때문에 자신은 벼랑 끝까지 내몰렸으니까.

    “너 왜 민호한테 가서 헛소리했어? 내가 왜 네 편이냐고! 씨발, 사람 곤란하게 할래?

    “태호야.”

    이믿음이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쿵. 쿵. 쿵.

    긴장과 설렘으로 손태호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 진실을 말하는 거야.

    날 그저 골탕 먹이기 위해서 이민호에게 거짓말을 한 거라고.

    그러면 난 이 녹음 파일을 가지고 민호에게 돌아가 결백을 인정받을 수 있어.

    “네 마음은 고마운데, 난 민호랑 정정당당하게 경쟁하고 싶다.”

    “응? 뭐라고? 그게 뭔 개소리인데?”

    “모르는 척하지 말고. 어쨌든 너도 민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서 후련하잖아? 그거면 됐지.”

    “아니, 너 왜 헛소리하냐고. 사실을 말하라니까. 여긴 우리 둘뿐이잖아!”

    손태호는 끝내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손태호가 원하는 말을 이믿음이 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녹음한 파일을 이민호에게 들려준다?

    그럴 경우 오히려 손태호의 입지가 완전히 박살 나게 생겼다.

    “이믿음, 너 미쳤어? 돌아이야? 아니면 다중인격자야? 사실만 말하라고!”

    “그래, 지금처럼 이민호의 그늘을 떨쳐 내는 게 쉽지는 않겠지. 하지만 앞으로는 도와줄게.”

    황당하다는 얼굴을 한 손태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믿음이 수술실로 들어갔다.

    수술실에 들어선 순간 이믿음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이믿음은 손태호에게 받은 대로 돌려주었다.

    손태호가 자신과 황은우 사이를 이간질한 것처럼, 그는 손태호와 이민호 사이를 이간질했다.

    급하게 찾아온 손태호를 보니 그 결과는 대성공인 듯했다.

    실로 깨소금 맛이었다.

    손태호, 이 반푼아.

    난 네가 대화를 녹음하려고 찾아왔던 것까지 다 알고 있어.

    1살부터 모략질을 해 온 나를 따라오려면 아직 멀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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