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145화 (145/257)

145화 제4장 격돌(5)

“허… 참. 녀석도.”

양순재는 수술방으로 향하던 중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방금 전까지 자신과 대화를 나눴던 이믿음이 떠올라서였다.

이 과장의 통화를 녹음했다는 사실부터가 이믿음의 비범함을 증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보통 사람은 그렇게까지 철저하지 않다.

우연히 통화를 엿들었는데 누가 못된 계획을 꾸미고 있다더라,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구전이 되다 보니 신빙성이 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만약 이믿음이 녹음 파일을 들려주지 않았다면

입으로만 엿들은 통화 내용을 들었다면

양순재는 이믿음의 말을 반 정도만 믿었을 것이다.

적당한 의심만 품은 채 차일피일을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3개월 뒤에 꼼짝없이 이 과장의 덫에 걸려 피를 흘렸을 것이다.

‘알고 보니 여우도 늑대도 아닌 호랑이 새끼였군.’

양순재는 이믿음이 천재라는 것을 믿었으며 천재라는 것을 알고도 있었다.

의대 시절부터 진작 펠로우급 지식을 갖췄으며 손놀림도 예사롭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오늘에야말로 이믿음의 새로운 면모를 보게 되었다.

환자를 생각하는 참 의사다운 면모가 아닌 책략가다운 면모를 말이다.

이 과장의 위협을 타개하기 위해 흉강경 폐암 수술을 제안하다니.

그런 제안을 할 수 있을 만큼 큰 간덩이.

그런 제안을 할 수 있을 만큼 해박한 지식.

이 두 가지를 고작 인턴인 이믿음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양순재는 놀라웠다.

지금도 잠이 덜 깬 기분이 들 정도였다.

-이번 일은 하나부터 열까지 제게 맡겨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동안 교수님께 받은 은혜, 이번 기회에 조금이라도 갚고 싶습니다.

심지어 이믿음은 이번 흉강경 수술의 컨트롤 타워를 자처했다.

이믿음의 패기가 워낙 대단했고

또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는 걸 알았기에 양순재는 순순히 이믿음에게 모든 걸 맡겼다.

놀라운 점은 그랬더니 불안으로 파도치던 마음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는 점이었다.

양순재는 이믿음이 어느새 자신이 기대도 될 만큼의 수준으로 올라섰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카데바로 같이 실습을 하던 시절이 엊그제 같거늘…….

“선배, 같이 갑시다.”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와 호칭만으로 양순재는 상대를 알았다.

이 과장.

4년 후배이자 지금은 흉부외과 과장을 맡고 있는 녀석.

동시에 자신을 의국 바깥으로 내몰 생각을 가진 음흉한 녀석.

녹음 파일을 듣고 나니 이 과장을 도무지 좋게 볼 수가 없었다.

벌써부터 팔다리가 분노로 바들바들 떨렸다.

“오늘은 무슨 수술 있습니까? 긴 수술이에요?”

이 과장이 평소처럼 살갑게 말을 붙여 왔다.

레지던트 때부터 친화력만큼은 알아주던 인간이었으니까.

지금의 이 과장을 만든 건 팔 할이 인맥이었다.

“다한증 수술.”

“선배 실력이면 못해도 2시간 안에 끝나겠네. 오후 스케줄은 없는 걸로 아는데 푹 쉬세요.”

“그러지.”

“오늘따라 유독 말이 짧으시네?”

이 과장이 눈썹을 치켜뜨며 말을 이었다.

‘이런…….’

양순재는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지만 무의식까지 통제하지는 못했다.

말이 계속 퉁명스럽게 나왔던 것이다.

“어제 컨퍼런스 때 내가 뛰쳐나간 것 때문에 화났습니까? 화 푸세요. 내 성질머리가 못된 거 선배도 잘 아시잖아요.”

“알긴 아는구나. 난 까맣게 모르는 줄 알았는데.”

“하… 선배 오늘따라 많이 이상하네. 어쨌거나 제가 선배를 많이 의지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 두세요.”

“…….”

“같이 의사 생활 시작한 사람 중에 본 원 의국에 남은 사람은 선배와 저밖에 없잖아요. 그러니까 서로 의지해야죠.”

이 과장은 자기 할 말만 하고 쌩하니 양순재를 앞서갔다.

겉과 속이 다른 이 과장의 표리부동한 행태에 양순재는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날 내쫓을 생각이면서 저런 낯 뜨거운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얼굴에 철판이 몇 개나 있어야 저런 행태가 가능하단 말인가.

더불어 양순재는 스스로를 자책도 했다.

이믿음의 녹음 파일을 듣지 않았더라면 이 과장이 방금 했던 사탕발림에 바보처럼 감동했을 테니까.

이 과장이 자신을 내쫓는 그 순간까지도 이 과장을 의심하지 못했을 테니까.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 낭떠러지까지 몰렸지만 더 이상 당하진 않는다.

반드시 흉강경 폐암 수술에 성공한다.

그래서 위선자 이 과장에게 불의의 일격을 선물하리라.

수술방에 들어서는 양순재의 표정이 비장해졌다.

* * *

‘휴. 다행히 잘 해결 됐네.’

양 교수와 헤어지고 돌아오면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화 내내 사실 걱정이 많았다.

양 교수가 이 과장의 배신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고.

(배신당한 사람은 때때로 자신의 상처를 감추기 위해 반대로 배신자를 감싸는 경우가 있으니까.)

흉강경 폐암 수술에 도전함으로써 현 위기를 타파할 각오를 가질지도 의문이었다.

그런데 양 교수는 고맙게도 현실을 직시했다.

미래로 나아갈 의지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이번 수술 준비의 컨트롤 타워를 맡고 싶다는 내 당돌한 제안까지 받아들여 주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양 교수가 나를 믿어 준 것에 대한 몇 갑절의 이자를 쳐서 돌려줄 것이다.

‘제일 큰 퍼즐은 맞췄고, 이제는 나머지 차례인가?’

수술방으로 향하면서 나는 흉강경 수술 도전에 필요한 전개도를 그렸다.

첫째, 흉강경 해외 논문을 찾아서 정리하고 스태프들이 잘 볼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한다.

둘째, 논문에서 부족한 지식을 회귀한 내 지식으로 보완한다.

2005년도인 현시점에서 펼치는 흉강경 수술은 먼 미래에 펼치는 흉강경 수술보다 당연히 모자란 부분이 많았다.

이제 막 유행해서 수술 횟수가 적다 보니 경험과 노하우가 덜 쌓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귀한 나는 먼 미래에 노하우를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즉, 2005년도 임에도 불구하고 2020년대급 흉강경 수술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환자의 상태나 기술은 감안해야겠지만.

2020년대 흉강경 수술의 성공률은 90퍼센트에 육박했다.

그러니까 나는 양 교수에게 지지 않는 싸움을 제안한 것이었다.

‘수술 멤버로는 서인석이 퍼스트, 허성호가 세컨드, 내가 써드로 들어가면 될 것 같은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도착한 수술방.

나는 스크럽을 하고 수술 복장을 갖추다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람을 떠올렸다.

손태호.

약삭빠르고 사악한 이민호의 왼팔.

내가 간호사를 추행하게끔 유도하고 나와 2년 차 황은우 사이를 이간질한 못된 송아지.

손태호를 먼저 손보지 않는다면 흉강경 수술 준비는 찜찜해서 못할 것 같았다.

* * *

끼리리릭.

딸칵!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환한 무영등 아래.

나는 환자의 벌어진 가슴을 봉합하고 있었다.

승모판막 치환술의 중요하고 핵심적인 부분은 이미 끝났다.

그래서 서 교수는 다음 수술을 위해 먼저 수술실을 떠났다.

지금은 나와 허성호만 남아서 수술 부위를 닫는 중이었다.

허성호가 피곤한 듯 보였다는 점.

허성호는 이미 내 실력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

이 두 가지 점 때문에 나는 환자의 개흉 봉합을 직접 하겠다고 자처했다.

허성호는 별다른 저항 없이 그러라고 대답했다.

나는 차분하게 환자의 가슴을 꿰매어 나갔다.

봉합침으로 벌어진 상처 양쪽의 피부를 꿰뚫고

왼손과 오른손을 현란하게 움직여 매듭을 완성한 뒤

봉합사를 적당한 힘으로 당겨 벌어진 상처가 오므라지도록 만들었다.

딸칵!

매듭이 완성되면 맞은편에 있는 허성호가 봉합사를 잘라 주었다.

봉합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단순 단속 봉합이었다.

전생의 수전증을 극복한 나는 놀라운 속도로 봉합을 진행했다.

봉합사가 벌어진 상처를 조여 주는 장력의 일관성.

매듭의 완성도와 매듭 간의 이상적인 간격 등등.

나는 마치 기계가 봉합하는 것처럼 일정하게, 그리고 이상적인 봉합법을 이어 나갔다.

물 만난 고기가 이런 느낌일까.

수술 도구를 만난 손은 신나서 알아서 날뛰었다.

기저귀를 차고 있던 시절도 아직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건만…….

나는 어느덧 흉부외과까지 도달했으며 수술대에서 직접 봉합도 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나는 바랐다.

그래야 집도의가 되고 강태섭에게 복수의 칼날을 휘두를 수 있을 테니까.

“수고하셨습니다.”

게 눈 감추듯이 봉합을 끝내고 나는 수술 도구를 손에서 떼었다.

“하… 너 진짜 괴물이구나. 서 선생님 관상동맥 우회술 제1 보조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어.”

허성호가 질렸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허성호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있었던 사실.

방금 나는 오른손잡이임에도 왼손으로 봉합을 했다.

그러니까 허성호가 방금 극찬한 봉합술조차 나의 100퍼센트 솜씨는 아닌 것이다.

거기까지 말하면 허성호가 까무러칠 것 같아서 나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나저나 이 정도면 왼손도 단순히 보조용은 아니었다.

충분히 실전에서 쓸 수 있는 수준이었다.

당직 근무를 설 때 틈틈이 훈련해 두면 금방 오른손 수준으로 올라오지 않을까.

“손재주는 어렸을 때부터 좋았습니다. 유치원 때 인형 눈을 꿰맨 게 도움이 된 것도 같고요.”

나는 내 솜씨의 이유를 대충 둘러 냈다.

“앞으로 내가 피곤할 때는 너한테 봉합 맡겨도 되겠다.”

“얼마든지 맡겨 주세요.”

장장 4시간의 수술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나는 환자를 중환자실로 옮긴 뒤 휴게실에서 허성호와 대화를 나눴다.

캔 커피로 당분과 카페인을 충전하기도 했다.

다음 수술까지 남은 여유 시간은 2시간.

놀랍게도 다음 수술의 집도의는 이 과장이었다.

실적에 눈이 멀어 의국 식구들을 참기름 짜듯 짜는 악당.

내 스승 양 교수를 쫓아내지 못해서 안달인 악당.

다만 내 기억 속에서 이 과장의 악독함이 희미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먼 훗날 부임하는 강태섭의 그림자가 너무 거대해서.

‘가만… 과장 어시스트라면…….’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전생에서도 이맘때쯤 과장 어시스트에 들어간 기억이 있었다.

그때 무슨 사고가 터졌던 걸로 기억하는데.

“선배, 죄송한데 깜빡한 처치가 있어서요. 병동으로 먼저 올라가 볼게요.”

“오냐.”

황급히 병동으로 돌아간 나는 당직실 컴퓨터로 환자의 이름부터 검색했다.

유정해.

62세 여성으로 관상동맥 협착증으로 인한 관상동맥 우회술이 예정되어 있었다.

집도의는 이 과장, 퍼스트는 의국장, 세컨드가 바로 나였다.

머릿속에 구체적인 정보가 입력되자 과거의 흐릿한 기억이 떠오를 것 같기도 했다.

“이믿음, 너 표정이 왜 그렇게 심각해? 너답지 않게 무슨 사고라도 쳤냐?”

황은우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요.”

“아니면 뭔데?”

“뭔가 중요한 게 기억이 안 나서요.”

“기억이 안 날 때는 그 기억과 관련된 사람을 떠올려. 그럼 은근히 도움이 되더라.”

“사람이라… 선배 말대로 해 볼게요.”

이 과장과 의국장으로 떠올릴 수 있는 정보는 이번 수술에서 문제가 생긴다는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황은우의 조언을 따른다면 다른 사람을 만나 봐야겠지.

나는 곧바로 문제의 환자가 있는 병실로 이동했다.

수술을 앞두고 축 처져 있는 환자 곁에 안경 쓴 젊은 여성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갇혀 있던 기억들이 기억의 댐을 부수고 머릿속으로 범람하기 시작했다.

안경에 김이 서릴 정도로 서럽게 울고 있는 보호자.

수술이 끝났음에도 차마 걷히지 못한 하얀 방포.

내 기억이 맞다면 유정해 환자는 테이블 데스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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