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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143화 (143/257)
  • 143화 제4장 격돌(3)

    쪽방에서 세어 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이 과장이었다.

    좀 전에 나와 복도에서 마주친 뒤 곧바로 회의실에 온 듯했다.

    이 과장의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했기에 나는 오히려 강렬한 호기심을 느꼈다.

    하지만 문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던 중 발걸음을 멈췄다.

    남의 통화를 엿듣는 일이 그리 떳떳하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내용인지 간단하게 확인만 해 보지, 뭐.’

    나는 멈췄던 발을 이끌고 기어이 문 앞에 바짝 붙었다.

    어둠에 발을 디디지 않고 악(이 과장)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테니까.

    결심을 굳히고 쫑긋 귀를 세우자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래, 그래. 그 양반 우리 과에 붙어 있는 것도 몇 개월 안 남았어.”

    -…….

    “3달 뒤에 인사고과 있는 거 알지? 내가 그 양반 점수를 완전히 뭉개 놨다고. 진료 부원장님 뵐 때마다 슬쩍슬쩍 양념도 쳐 놨지.”

    이 과장이 말하는 그 양반이 누구인지 나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내 스승 양 교수를 지칭하는 것이리라.

    두 사람은 오늘 오전 컨퍼런스 때 치고받듯이 싸웠다.

    특히 이 과장은 양 교수의 실적을 문제 삼기도 했다.

    ‘상황이 생각보다 심하구나.’

    이 과장의 이야기를 엿들으면 엿들을수록 몸이 식어 갔다.

    이 과장은 양 교수와 단순히 사이가 안 좋은 게 아니었다.

    양 교수를 내치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고 있었다.

    전생에 이맘때쯤.

    양 교수가 흉부외과에서 근무하지 않았기에 회귀한 나조차 그 이유는 알 수 없어 답답했다.

    다만 중요한 건 이 과장의 말대로 진행된다면 존경하는 양 교수가 쫓겨날 확률이 높다는 것이었다.

    이 과장은 꽤 오래전부터 성실하게 양 교수를 쳐 낼 계획을 실행하고 있었다.

    나는 이 과장의 간악한 계획에 치를 떨었다.

    스승인 양 교수를 향해서는 안타까움과 위기감을 느꼈다.

    “웃기는 양반이지. 지가 성인군자인 줄 알아. 고생하는 후배들하고 고통받는 환자를 위해서 복귀했다잖아.”

    -…….

    “혼자 깨끗한 척하는 거 역겨워서 못 봐주겠단 말이지.

    -…….

    “그 양반 쫓아내면 부교수 자리는 무조건 네 거야. 그때부터 의국 스태프들도 한번 싹 갈아 보자고.”

    양 교수를 쫓아내고 그 자리에 자신의 심복을 앉힌다.

    이 과장은 벌써 몇 발자국을 내다보고 있었다.

    과연 전생의 별명인 여우처럼 약삭빠른 행동이었다.

    통화의 핵심적인 내용을 전부 파악했기에 나는 조심스레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텅 빈 휴게실로 이동해 휴대폰을 작동시켰다.

    이 과장의 대화를 엿들으면서 휴대폰의 녹음기 기능을 켜 놨던 것이다.

    회귀한 나는 중요한 순간에 녹음기를 사용하는 버릇을 들였다.

    이건 좀 애매한데?

    저절로 찌푸려지는 이맛살.

    이 시기에 휴대폰 녹음 기능은 허접하기 짝이 없었다.

    주변 잡음에 이 과장의 목소리가 뭉개져서 들렸다. 몇몇 단어나 문장이 간혹 선명하게 들릴 따름이었다.

    이 과장이 양 교수를 확실히 지칭하지 않고 그 양반이라고 뭉뚱그린 것도 문제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양 교수라면 이 정도 내용만 들어도 알아차릴 것이다.

    나는 한동안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 내용을 양 교수에게 들려줘야 할까, 말까.

    잠시 고민에 빠졌던 것이다.

    녹음 파일을 들으면 양 교수는 분명 마음의 상처를 받으리라.

    이 과장은 양 교수를 미워하지만 양 교수는 이 과장을 미워하지 않았다.

    이 과장처럼 병원의 입장에 서는 의사도 필요하다고 본인의 입으로 말했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니 녹음 파일을 듣고 양 교수가 이 과장에게 느낄 배신감과 실망감과 허탈함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구경꾼처럼 마냥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몇 달 뒤 인사고과에서 스승은 쫓겨날지도 몰랐다.

    스승의 강제 은퇴를 뒷짐 진 채 구경하라?

    그건 내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절대로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깊은 고뇌 속에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곧 화장실을 나왔다.

    병동 복도로 들어서자 맞은편에서 통화를 끝낸 이 과장이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이 과장을 스쳐 지나갔다.

    * * *

    “하아아암.”

    나는 하품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벽시계를 확인하니 2시간 정도 잠을 잔 듯했다.

    부족한 수면 시간으로 인해 머리가 무겁고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태엽이 다 돌아간 태엽 인형 같았다.

    나는 꾸역꾸역 일어난 뒤 욕실로 들어가 세수하고 머리를 감았다.

    본래 인턴과 레지던트는 거지꼴이 기본 옵션이었지만 나는 위생에 특히 신경 쓰는 편이었다.

    내가 환자를 보는 것만큼.

    환자가 나를 보는 것도 중요했으니까.

    ‘너무 무리했나?’

    나는 손목을 왼쪽으로 360도, 오른쪽으로 360도 돌렸다.

    뻐그덕, 뻐그덕.

    관절에서 묵직한 뼈 소리가 들렸다.

    어제 나는 자기 전까지 모형으로 봉합 연습에 몰두했다.

    왼손을 오른손처럼 쓸 줄 알아야 한다.

    …는 소아 심장 수술의 대가 박 교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서 말이다.

    오랜만에 봉합 연습을 했더니 손가락과 손목에 통증이 심하게 올라왔다.

    손목과 스트레칭을 끝내고 당직실로 복귀했다.

    당직 근무자인 황은우는 오더 및 차트 입력 중이었다.

    당직 인턴이었던 손태호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선배, 잠깐 쉬세요. 제가 작업하고 있을게요.”

    “됐어. 네 볼일이나 봐.”

    황은우의 대답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내게 무슨 앙금이 남아 있는 것처럼.

    웃긴 건 내가 황은우에게 실수를 한 기억이 눈곱만큼도 없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잘해 주면 잘해 줬지 말이다.

    차트 대신 입력해 줘, 응급실 가서 환자 대신 봐 줘 등등.

    하루아침에 우리 사이가 뒤틀린 이유를 알고 싶어서 나는 질문을 던졌다.

    “혹시 새벽에 무슨 일 있으셨어요?”

    첫 질문은 가장 합리적인 질문이었다.

    황은우는 내게 화가 난 것이 아니다.

    그저 안 좋은 사건이 있었고, 그때의 감정을 나에게 투사하는 것이라는 추리였다.

    “없어. 없으니까 그냥 네 일 보라고.”

    황은우는 여전히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목소리 역시 쌀쌀맞았다.

    이쯤 되면 무슨 사건 터졌던 게 아니라 단순히 내게 억하심정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나오신다면 물어뜯는 수밖에…….’

    나는 황은우 옆자리에 앉아서 집요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의 기분이 상한 이유를 꼭 듣고 싶다며.

    황은우는 다 좋은데 힘든 일을 마음속에 꼭꼭 묻어 두었다가 한 번에 터뜨리는 경향이 있었다.

    전생의 레지던트 3년 차 시절 아무도 모르게 탈주한 것도 같은 이치였다.

    그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나는 황은우의 마음속 고름을 곧바로 짜내려 했다.

    더 심하게 곪아 버리기 전에.

    “너 어지간히 귀찮게 군다?”

    팔짱을 낀 채 눈을 치켜뜨는 황은우.

    하지만 나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절 떼어 내고 싶으면 이유를 말해 주세요. 안 그러면 컨퍼런스 시작할 때까지 이러고 있을 거니까요.”

    “어휴, 징글징글한 놈.”

    결국 백기를 먼저 든 사람은 황은우였다.

    드디어 황은우가 내게 삐졌던(?) 이유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제 당직 근무 서는데 태호가 그런 이야기 하더라.”

    “무슨 이야기요?”

    손태호의 이름이 나온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감지했다.

    “네가 레지던트들을 x밥으로 보고 있다고. 양 교수님하고 인연이 있는 데다가 천재라서 처치도 잘하니까 선배를 다 잡아먹을 계획이라고 말이야.”

    “그놈 말을 믿으세요?”

    나는 어이가 없어서 혀를 찼다.

    속사포처럼 내 할 말을 쏟아 냈다.

    “태호랑 저 견원지간인 거 아시잖아요. 당직 스케줄 조율이 안 돼서 선배가 정해 줬잖아요.”

    “그건 확실히 그랬지.”

    “절 미워하는 놈이 저에 대해 좋게 말하겠어요? 선배에게 했던 이야기는 다 저를 골탕 먹이려고 했던 거라고요.”

    말을 하다 보니 열이 나서 머리 뚜껑이 열릴 것 같았다.

    이 쓰레기 같은 놈은 나를 간호사 희롱범으로 유도했던 것도 모자랐단 말인가.

    그래서 황은우와 나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퍼뜨렸단 말인가.

    손태호의 괘씸한 행동에 나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선배, 이제 대충 감이 오시죠?”

    “어? 어. 야, 미안하다. 어제 들을 때는 되게 그럴듯했는데 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말도 안 되는 거였네.”

    황은우가 민망했는지 머리를 긁적거렸다.

    하지만 황은우는 죄가 없었다.

    모든 죄는 손태호의 혀끝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손태호에게 분노하는 한편 손태호의 교묘함과 악랄함에 위기감 또한 느꼈다.

    간호사 사건만큼 이번 이간질 사건 또한 손태호의 간사함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이믿음은 양 교수의 제자이자 처치까지 능숙한 천재다.

    그러니 인맥과 실격을 갖춘 이믿음은 황은우를 무시할 개연성을 가졌다.」

    이런 논리로 손태호는 황은우 마음속에 있는 어둠을 건드렸을 것이다.

    내가 주목을 받으면 황은우가 상대적으로 떨어져 보일 수 있다는 점을 악용했을 것이다.

    그 수법이 워낙 교묘했으니 황은우는 손태호를 믿을 수밖에 없었을 테고.

    손태호와 내가 원수지간이라는 것조차 까맣게 잊어버린 채.

    ‘하루라도 빨리 손을 보지 않으면 안 되겠어.’

    나는 손태호 소탕 작전을 당장 개시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전생에서 갈등을 빚어 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손태호는 내 생각보다 훨씬 간사한 인물이었다.

    지금까지 내게 펼친 수법을 보면 리틀 강태섭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했다.

    맙소사, 세상에 한 명만 있어도 끔찍한 게 강태섭 같은 인간인데…….

    그런 인간이 무려 두 명이나 곁에 있다고?

    나는 회귀까지 해서 그런 끔찍한 그림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을 견딜 자신도 없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까 손태호, 이 새끼 완전 못돼 처먹었잖아? 결론적으로 너랑 나를 이간질하려고 했던 거 아니야?”

    황은우가 뒤늦게 진실을 깨닫고 얼굴을 찌푸렸다.

    두 뺨은 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상기 되었다.

    “쥐방울만 한 게 졸라 건방 떨었네? 믿음아, 태호 새끼 좀 불러와라. 혼구멍을 내 주지 않으면 분이 안 풀릴 것 같다.”

    “이번 일… 선배가 잠깐만 눈 감아 주시면 안 될까요?”

    “나 속 터지라고?”

    “당분간은 태호가 착각하게 내버려 뒀으면 좋겠어요. 태호가 방심하고 있을 때 해 보고 싶은 게 있거든요.”

    나는 차갑게 웃으며 황은우 설득에 나섰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기원전부터 내려오던 유서 깊은 처벌 방식을 오랜만에 사용해 볼 생각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손태호가 잠시 방심할 필요가 있었다.

    “으음… 일단 네 방식대로 처리하고 싶다는 거지?”

    “네.”

    “일단 네 뜻대로 해 줄게. 대신 네 보복이 끝나면 내 차례다?”

    “물론이죠.”

    나와 황은우는 전우애로 가득 찬 눈빛을 주고받았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었다.

    드르르륵.

    때마침 문이 열리고 문제의 손태호가 당직실로 들어왔다.

    “이믿음, 일 잘하는 건 아는데 당직실 정리도 좀 하고 그러자. 인턴이 할 일을 레지던트가 해야겠니?”

    “아닙니다.”

    황은우는 즉흥적으로 나를 혼내는 척 연기했으며 나는 그의 연기를 자연스럽게 받았다.

    고개를 숙인 채 황은우의 꾸지람 아닌 꾸지람을 듣던 나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당직실 정리를 하던 손태호와 눈이 맞았다.

    손태호는 눈과 입으로 나를 비웃는 중이었다.

    머저리 같은 놈.

    누가 누구에게 속고, 누가 누구에게 당하고 있는지는 금방 밝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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