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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142화 (142/257)

142화 제4장 격돌(2)

관상동맥 우회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나는 환자를 중환자실로 옮겼다.

그리고 Post.op(수술 후 처치)를 한가득 입력했다.

항생제 투여, 진통제 투여, 소염제 투여, 항응고제 투여, 바이탈 사인 4시간마다 확인 등등.

심장 수술이 끝난 환자는 지극히 허약해서 집중 관리가 필요했다.

위태롭고 응급한 상황에서.

열약한 인원으로 CABG를 만족스럽게 마쳤기 때문일까.

전생의 멘토 서인석을 멋지게 도울 수 있었기 때문일까.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 손가락은 유난히 가벼웠다. 오더를 다 입력한 후 나는 고일섭의 침상 앞에 섰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고일섭의 바이탈과 심전도를 살폈다.

다행히도 특이 사항은 없었다.

‘진짜 힘 빠지는 환자였지.’

나는 고일섭을 내려다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분초를 다투었던 다급한 상황에서 고일섭은 심장 초음파가 필요함에도 받지 않겠다며 뻗대었다.

병원이 돈에 눈이 멀어서 불필요한 검사를 하려고 한다고.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고구마가 가슴에 얹힌 것처럼 답답했다.

고일섭은 말이 안 통하는 진상 환자였으니까.

그런 고일섭을 살리기 위해 나는 후벽부 심전도를 펼쳤다.

그것도 모자라 동기 오경민을 교수로 둔갑시켜 고일섭이 심장 초음파를 받도록 꼬드기기까지 했다.

수술까지 끝난 후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니 쓴웃음만 나왔다.

지난 몇 시간 동안 생난리를 피운 것 같아서.

무사히 깨어난다고 해도 고일섭은 아마 의료진에게 절대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본인의 의지로 초음파 수술을 거부했으면서.

왜 초음파 수술을 빨리 받으라고 강하게 나오지 않았냐며 도리어 화를 낼 것이다.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 경험상으로는 그럴 확률이 높았다.

스태프를 함부로 대하고 윽박지르던 사람이 갑자기 착해지는 경우는 한 번도 못 봤다.

예의를 아는 사람이라면 초면부터 예의를 차렸으리라.

의식을 되찾고 병동으로 돌아와 투정을 부릴 고일섭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환자들 대부분은 까맣게 모를 것이다.

의사가 환자에게 상처를 주는 것처럼.

환자도 의사에게 상처 줄 수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나는 무거운 마음을 훌훌 털어 버렸다.

의사로서 살리고 싶은 사람과 살리기 싫은 사람을 구별 짓는 건 말도 안 되는 것 아닌가.

내게 힘을 북돋워 주는 환자가 있으면.

반대로 힘을 빼앗아 가는 환자도 있는 것 아닌가.

최대한 넓은 시야에서 이번 사건을 바라보기 위해 애썼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중환자실을 나오자 고일섭 환자의 가족들이 내게 말을 걸었다.

“저희 남편 때문에 힘드셨죠?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워낙 거칠게 살아온 양반이라…….”

“저희 아버지 발목 수술을 잘못 받아서 제대로 못 걸으세요. 그때부터 병원을 별로 안 좋아하세요.”

가족들은 마치 피고 측 변호사가 되어 환자를 필사적으로 변호했다.

그들의 말에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사연이 담겼기 때문일까.

고일섭의 향한 앙금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것 같기도 했다.

병원은 생과 사뿐만 아니라 애증도 교차하는 곳이었다.

* * *

4층 휴게실.

나는 서인석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화제는 당연히 방금 막 끝난 관상동맥 우회술이었다.

수술이 잘 끝나서 그런지.

아니면 이때의 서인석이 쾌활했던 건지.

서인석은 생각보다 수다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근 10분 동안 그의 입술은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물론 재잘거리는 서인석이 보기 싫었던 건 아니었다.

반대로 보기 좋고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내가 존경하던 사람의 풋풋한 시절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이번 생에서는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서인석의 수다를 들으며 나는 굳은 결심을 했다.

먼 미래에 교수가 되는 서인석은 나와 마찬가지로 강태섭에게 팽을 당한다.

강태섭을 뛰어넘는 의술 솜씨.

환자들의 절대적인 지지.

차차 늘어나는 유명세로 강태섭이 서인석에게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환자만 생각하는 의사들의 최후가 그러하듯.

서인석은 의국 정치의 희생양으로 선택되어 반강제로 쫓겨나게 되었다.

그 후로는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

서인석의 전생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더욱 아픈 건 사실 나 때문이었다.

나 역시 서인석을 몰아내는 데 한몫했다.

서인석을 존경하고 따랐음에도 강태섭의 간사한 혀에 홀랑 넘어가 서인석을 미워하게 되었으니까.

이번 생에서는 반드시 서인석을 지켜 내자.

나중에 과장으로 부임하는 간사한 강태섭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서인석을 앉히자.

먼 훗날의 목표를 나는 미리 씨앗으로 만들어 놓은 뒤 가슴속 텃밭에 뿌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아까부터 대답이 없다?”

서인석에 지적에 머쓱해진 나는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죄송합니다. 어제 잠을 못 잤더니 피곤해서…….”

“하긴, 한참 힘들 때긴 하지.”

서인석이 나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인생을 다시 산다고 해도 인턴 때하고 레지던트 1년 차를 다시 보내야 한다면 사양이야.”

서인석의 농담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농담으로 한 말이지만 나는 실제로 회귀한 뒤 인턴 생활을 다시 하고 있었으니까.

“쓸데없는 말이 많았지만 어쨌든 결론은 하나다.”

서인석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정리하는 말을 했다.

“고맙다. 네 덕에 수술이 무사히 끝났어. 앞으로도 급할 때는 신세 좀 지자?”

서인석이 나와 눈을 마주치며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를 향한 신뢰가 듬뿍 담긴 행동이었다.

전생의 나는 레지던트 때도 서인석에게 꾸지람을 듣고 혼나기 바빴거늘…….

이번 생에서는 무려 인턴 때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다.

전생과는 근본부터 달라졌다고 해야 할까.

내가 변하면 세상도 함께 변한다는 사실은 언제 깨달아도 놀라운 것이었다.

“네, 선생님.”

“고생했고, 오늘은 가능하면 푹 쉬렴.”

휴게실을 나온 우리는 금방 헤어졌다.

쉬는 날인 그는 연구실로 향했고, 나는 병동으로 복귀했다.

때마침 흉부외과 병동 복도에 들어선 나는 뜻밖의 인물을 발견했다.

나보다 몇 걸음 앞서서 이 과장이 걷고 있었던 것이다.

일과도 끝난 마당에 과장이 병동에는 무슨 일일까.

“안녕하십니까, 과장님.”

나는 이 과장의 걸음을 따라잡은 뒤 고개를 숙였다.

“으음… 미안한데 누구지?”

“흉부외과 인턴 이믿음입니다. 이번 달 수련이 끝나면 흉부외과 전공을 선택할 예정입니다.”

“오? 그래?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이 과장이 빙그레 웃었다.

이름도 몰랐던 나라는 인간이 좋았을 리는 없을 테고…….

분명 본인이 수족처럼 부릴 일개미가 합류한다는 사실이 기뻤을 것이다.

이 과장에게 의국 식구들이란 자신의 출세를 위해 필요한 희생양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이 선생님 이름은 하도 특이해서 안 까먹겠어. 나도 잘 기억해 두지.”

“감사합니다, 과장님.”

“내년까지는 많이 힘들겠지만 다 인생의 경험이다, 하고 버텨 봐요.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도 없으니까.”

“조언 감사합니다.”

이 과장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그 의미는 앞서 서인석이 했던 행동과는 의미가 많이 달랐다.

서인석의 손짓이 나를 동료로 인정하는 것이었다면.

이 과장의 손짓은 조폭이 부하에게 고생하라는 의미에서 하는 다독임이었다.

즉, 전자가 수평적이라면 후자는 수직적인 것이다.

자기 할 말을 마친 뒤 이 과장은 쌩 하니 회의실로 이동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했던 ‘어쩔 수 없다.’라는 말에 나는 지독한 역겨움을 느꼈다.

이 과장은 항상 어쩔 수 없다는 말 뒤에 숨어 다녔으니까.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방패 삼아 각종 더러운 짓을 일삼았으니까.

교수들의 논문을 훔치고.

의료사고를 감쪽같이 숨기고.

의국 식구들을 시적으로 들들 볶았으니까.

과연 이 과장이 어쩔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나는 나중에 따져 물어보고 싶었다.

잡념을 물리치고 들어간 당직실.

2년 차 당직 근무자 황은우와 나보다 먼저 수술을 끝낸 허성호, 이민호의 수족 손태호가 저녁을 먹고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고소한 피자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덕분에 수술하는 동안 잊고 있었던, 잊어야만 했던 식욕이 되살아났다.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저만 쏙 빼놓고 드시다니.”

“엥? 벌써 왔다고? CABG 어시스트 들어간 거 아니었어?”

“CABG 어시스트 한 것도 맞고 벌써 온 것도 맞아요.”

“서 선생님하고 거의 둘이 수술했잖아. 근데 엄청 빨리 끝났네?”

황은우가 나를 바라보며 경악했다.

하긴, 스태프들의 구성을 보면 절대 제시간에 끝날 수 없는 수술이었으니까.

“혹시 환자가… 테이블 데스?”

“아뇨, 중환자실에서 회복 중이에요. 특이 사항도 없고요.”

“휴, 다행이네. 고생 많았다. 너무 섭섭해하지 말고 빨리 와서 먹어.”

“네.”

나는 일행에 합류에 피자를 먹었다.

흉부외과 인턴 근무를 시작한 지 고작 이틀 정도 지났을까.

그럼에도 돌이켜 보면 내 하루는 무척 스펙터클하고 기구했다.

양 교수님 수술에 참여했으며 응급으로 실시한 CABG에서는 무려 제1 보조로 활약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이 녀석도 제대로 손 봐줘야 하는데.’

피자를 먹던 나는 문득 손태호를 흘겨보았다.

하루 종일 수술실을 들락날락거리다 보니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얼마 전 손태호는 무려 나를 간호사 추행범으로 만들려고 했다.

등 뒤에서 내 손을 조종해.

내가 간호사의 엉덩이를 만지도록 유도하는 교묘한 수법을 사용했다.

손태호의 의도는 사악했으며 그 수법은 악독했다.

그 당시에는 고작 쓴소리 몇 마디와 멱살잡이로 상황을 마무리했지만 그것은 결코 완전한 복수가 아니었다.

손태호는 제대로 된 보복을 받아야 했다.

“…….”

“…….”

문득 나와 눈이 마주친 손태호.

녀석은 부리나케 내 시선을 피하더니 해야 할 처치가 있다면 당직실을 빠져나갔다.

보면 볼수록 미꾸라지 같은 놈이었다.

“우리 막내, 하루 종일 고생했으니까 좀 쉬어. 내가 1시간 정도는 빼 줄게.”

황은우가 내게 다가와 아량을 베풀었다.

혹시라도 내가 중간에 딴마음 먹고 흉부외과를 버릴까 봐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황은우의 탈주를 걱정하고.

반대로 황은우는 나의 탈주를 걱정하고 있는 이 기묘한 상황은 퍽 재미있었다.

“그래야 선배 마음이 편하다면 그렇게 할게요.”

“그래, 내 마음 좀 편하게 해 주라. 네가 쉬는 게 내가 쉬는 거니까.”

“근데 과장님은 오늘 퇴근 안 하셨던데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화제를 돌렸다.

“중요한 볼일이 있으신가 봐. 요새 자주 회의실에 오시더라고.”

“아, 네.”

“왜? 회의실에서 뭐 할 일 있어?”

“모형으로 봉합 연습을 할까 해서요.”

나는 짜투리 시간도 알차게 사용할 작정이었다.

회귀를 한 후에도 이상하게 손놀림은 전생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덕분에 인형 눈을 꿰매서 부모님이 집을 사는 데 일부 보탬을 드리기도 했고.

하지만 그럼에도 외과의로써 내 손놀림이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외과의로서 정점을 찍고 싶다면 오른손잡이도 왼손잡이인 것처럼 왼손을 쓸 줄 알아야 한다.]

이는 소아 심장 수술의 대가 박 교수가 내게 직접 했던 말이었다.

그 말에 비추어 보면 나는 아직 갈 길이 남았다.

오른손잡이를 기준으로, 다른 의사들에 비해 왼손을 잘 쓰는 편이지만.

고난이도 처치에서는 여전히 오른손을 사용했으니까.

“인마, 그게 쉬는 거냐?”

“저한테는요.”

“에휴, 너를 말릴 바에는 짱구를 말리는 게 낫지. 어쨌거나 너 편안한 대로 해.”

“감사합니다. 선배.”

나는 당직실을 벗어나 봉합에 필요한 모형이 있는 회의실로 향했다.

그런데 회의실 안쪽에 존재하는 쪽방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자석처럼 나를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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