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제3장 물러서지 않을 때(4)
판독지를 훑고 나니 미간이 저절로 좁아졌다.
일반적인 심전도 검사.
그러니까 천장을 바라보고 누운 상태에서 실시한 심전도 검사에서는 정상이었던 심전도 결과가 이번에는 비정상으로 나왔다.
환자의 V6-V7 구간의 ST 분절이 심하게 상승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일섭은 후벽부 심근경색을 앓고 있었다.
그것도 당장 수술이나 시술이 필요한 중증이었다.
“환자분, 흉통은 아까와 똑같은 수준인가요?”
“뭐, 비슷하지.”
고일섭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옷을 추슬렀다.
그제야 나는 전생에 벌어졌던 비극의 퍼즐을 전부 맞출 수 있었다.
환자가 통증을 크게 호소하지 않는 무증상 심근경색.
일반 심전도로는 파악할 수 없는 후벽 부 심근경색.
마지막으로 병원비가 비싸다며 한사코 초음파 검사를 거부하던 환자의 고집.
평범하지 않은 세 가지의 요소가 결합되면서 고일섭은 두 번째로 응급실을 방문했다가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환자의 상태가 심각했으므로 나도 살짝 초초해졌다.
째깍, 째깍.
환자의 치료를 재촉하는 내면의 타이머가 작동해 나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환자분, 이젠 심전도 검사 정도로 안 됩니다. 더 정밀한 검사를 받으셔야겠습니다.”
“뭐야? 또 그 소리야? 이 사람들이 정말 장난하나?”
고일섭이 성난 목소리로 눈을 부라렸다.
끝내 비싼 돈을 주고 더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영 못마땅한 눈치였다.
“환자분은 쉽게 말해 급성 심근경색입니다. 당장 시술이나 처치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나는 후벽 심전도를 실시한 이유, 심전도 검사 결과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환자는 내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듯했다.
충분히 설명을 들은 후에도 대뜸 나를 몰아붙였다.
“검사 결과 제대로 본 것 맞아? 심근경색 맞냐고? 뉴스 같은데 보면 심근경색 걸린 사람들 말이야.”
“…….”
“엄청 아파하고 힘들하고 쓰러지기까지 하던데 나는 그 정도는 아니란 말이지.”
급기야 고일섭은 내 의사로서의 자질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론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돈이었다.
심하지 않은 병인데 난리를 쳐서 검사비를 뜯어내려고 하는 게 아니냐고.
상황이 여기까지 흐르니 내 인내심도 슬슬 바닥이 나기 시작했다.
대체 언제 어디까지 이 진상의 입맛을 맞춰져야 한단 말인가.
환자에게 감정 이입을 하려고 노력하는 나조차 고일섭에게는 정이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일섭을 죽어라 방치할 수도 없으니 나만 답답한 노릇이었다.
째깍. 째깍.
가슴속 시계 소리가 다시 한번 나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당장 초음파나 조영술에 들어가도 모자란 시간에 환자와 입씨름이나 하고 있다니…….
무분별하게 낭비되고 있는 시간이 나는 너무나도 아까워 미칠 것 같았다.
‘침착하자. 침착해야 해.’
요동치는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나는 심호흡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언제나처럼 분주하고 긴박한 응급실.
바쁘게 돌아다니는 스태프 중 익숙한 얼굴이 한 명 보였다.
오경민.
대학 동기 중 한 명으로 잡담을 나눌 정도의 친분은 가진 친구였다.
오경민을 확인한 순간 내 머릿속으로 번뜩 묘수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환자분, 잠시만요. 일단 교수님하고 상의해 보고 오겠습니다.”
* * *
환자의 침상을 벗어난 나는 일단 당직실에 전화부터 했다.
고일섭의 후벽 심전도 검사 결과를 노티했다.
상황이 급박한지라 힙합 가수가 랩을 하듯 속사포의 노티를 쏟아 냈다.
-후벽부 무증상 급성 심근경색이라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혹시 환자 구슬려서 초음파 했어?
노티를 다 들은 황은우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황은우 입장에서는 놀라는 게 당연했다.
레지던트 1년 차인 그가 허탕 친 환자의 병명을 내가 정확하게 알아냈으니까.
심지어 초음파 검사도 하지 않은 상태로.
어쨌거나 황은우의 질문에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환자가 검사비 난리를 쳐서 초음파 검사는 못했다고.
순환기 내과에서 수련하던 시절 비슷한 케이스를 경험해서 후벽 심전도 검사를 통해 병명을 확진했다고 전했다.
-너도 어지간하다. 비슷한 케이스가 있었다고는 해도 그걸 이런 상황에서 적용할 생각을 하다니.
황은우가 나를 칭찬했으나 그 칭찬은 내 한쪽 귀를 통과해서 다른 귀로 흘러나가 버렸다.
다 고일섭 때문이었다.
고일섭을 안전하게 치료할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째깍. 째깍.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나를 재촉하는 마음속 타이머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추가 검사를 통해 우회술을 해야 할지 풍선술을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선배가 오더 좀 내려 주세요.”
-근데 그 아저씨가 순순히 말을 들을까? 너도 경험해서 알잖아. 구두쇠라서 돈 안 쓰려는 거.
“어떻게든 구슬려 봐야죠. 그렇다고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잖아요?”
나는 통화 도중 고일섭이 앉아 있는 침상 쪽을 응시했다.
어느새 자식으로 보이는 20대 남녀 두 명이 고일섭 곁에 서 있었다.
고일섭이 얄밉긴 해도 가족들에게는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버지일 수 있지 않을까.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그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자.
나는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진짜. 너도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하고 올라와라.
“…….”
-성호 선배한테는 내가 말해 둘게. 너 수술방에 못 들어간다고. 이런 상황이면 다른 과 인턴 빌려도 되는 거니까.
“교통정리 감사합니다, 선배.”
-아니다, 내 대신 네가 고생이 많다. 특이 사항 있으면 연락하고.
통화가 끝난 뒤 나는 곧바로 오경민에게 다가갔다.
고일섭을 설득한 비장의 무기가 바로 오경민이었기 때문이다.
오경민에게는 미안하지만 오경민은 초 노안이었다.
20대임에도 40대 같은 중후한 분위기를 풍겼다.
가뜩이나 머리숱이 적은데 벌써부터 새치가 있었으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듯한 얼굴 주름도 있었다.
“경민아, 잘 지냈냐?”
“어? 이믿음? 오랜만이다?”
“바쁜 건 알지만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분초를 다투는 심근경색 환자를, 가슴에 시한폭탄을 단 심근경색 환자를 전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오경민과 회포를 나눌 여유도 없이 나는 본론부터 꺼냈다.
오경민에게 응급의학과 교수인 척 연기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부탁에 오경민은 퍽 곤란해하는 눈치였다.
“좀 황당한 부탁이네. 대체 왜 그러는 건데?”
“환자가 우리 말을 곧 죽어도 안 들으니까. 네가 연기를 해 주면 잘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환자 설득에 오경민을 끌어들인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레지던트의 말과 교수의 말은 울림이 달랐다.
울림이 다른 이유는 바로 권위였고.
나는 그 권위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물론 오경민이 교수 행세를 한다고 해서 고일섭의 병원비를 깎아 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환자의 기분만큼은 180도 다를 것이다.
교수급의 대단한 사람까지 나서서 자신을 설득하려고 한다?
그럼 대접받는 느낌에 마음이 열리지 않을까.
“좋아, 사람 살리는 일인데 까짓거 한번 해 주지 뭐. 대신 믿음이, 너 나한테 하나 빚진 거다?”
“물론이지. 빚 받고 싶으면 언제든지 찾아와.”
나는 오경민과 합을 맞추고 함께 고일섭에게 다가갔다.
‘이제 정말 남은 시간이 없어.’
무증상이라고는 하지만 병세가 악화되면서 슬슬 통증이 심해지는 모양이었다.
고일섭은 처음 볼 때보다 훨씬 힘겨워 보였다.
검사와 치료가 더 빨리 이뤄져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이다.
“교수님, 이쪽이 제가 방금 말씀드린 환자분입니다.”
침상 앞에 선 나는 오경민의 바람을 잡았다.
“응급의학과 교수 오경민입니다.”
오경민은 뒷짐을 진 채 환자를 향해 고개 인사를 했다.
교수다운 적당한 거만함(?).
사람을 차분하게 만드는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
오경민은 내가 예상한 것보다 교수 행세를 훨씬 더 잘하고 있었다.
이런 느낌만 유지할 수 있다면 환자를 설득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경민아, 힘내라.
네 연기에 환자의 목숨이 달렸다.
“이 친구한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병원비가 너무 많이 나와서 불만이시라고요?”
“아, 네. 뭐, 그렇죠. 동네에서 진료를 받으면 보통 만원 안쪽이면 되는데 여기선 20~30만 원씩 깨지다 보니까요.”
“…….”
“또 괜히 없는 병을 만들어서 검사를 받으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내 작전은 잘 통하는 것처럼 보였다.
환자는 나와 달리 오경민에게는 꼬박꼬박 존댓말을 썼다.
내게는 하대하듯 불평불만을 쏟아 내더니 오경민에게는 공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환자분의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응급실 진료비 솔직히 아깝고 비싸게만 느껴지실 겁니다.”
“…….”
“저도 다른 대학병원 응급실 신세를 진 적이 있었는데 별로 한 것도 없이 30만 원이 나왔더군요.”
오경민은 여유롭게 대화를 주도해 나갔다.
노안을 이용해 어른 행세를 많이 해 본 티가 난다고 할까.
분위기는 좋았으나 나는 손으로 오경민의 허리를 툭툭 건드렸다.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라는 신호였다.
환자에게 필요한 건 공감이 아니라 검사와 치료였으니까.
“저희 선생들이 아직 수련 중이라서 환자분께 설명을 잘 못한 것 같습니다만… 환자분은 위독한 상태입니다. 당장 카디악 에코와 카디악 앙기오 그라피를 받으셔야 합니다.”
“네? 카디악 뭐라고 하셨죠?”
“아… 쉽게 말해서 심장 초음파 와와 심장조영술이라고 불리는 검사입니다.”
의학용어까지 써 가며 유식한 척하는 오경민의 모습에 나는 마음속으로 박수를 쳤다.
이 녀석, 완전히 꾼인데?
슬쩍 고일섭을 훔쳐보니 고일섭은 이미 오경민에게 다 넘어온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권위에 호소하자.
환자가 대접받는 느낌을 받게 하자는 내 궁여지책이 통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잘나가던 분위기에 한 남자가 찬물을 끼얹었다.
“야! 오경민 바빠 죽겠는데 거기서 뭐 하냐?”
“…….”
“내 말 안 들려? 빨리 안 튀어 올래? 딱 셋 센다. 하나… 둘…….”
응급의학과 레지던트 1년 차가 오경민을 발견하고 호출한 것이다.
이에 환자와 보호자 오경민까지 레지던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
“…….”
순간 숨 막히는 침묵과 지독하게 어색한 분위기가 침상 근처를 휘감았다.
지금까지 연기를 잘해 오던 오경민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여기서 삐끗하면 지금까지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교수님과 동명이인인 경민이를 호출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재빨리 사태를 수습했다.
그 덕분에 영혼이 가출했던 오경민이 정신을 되찾았다.
환자와 보호자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응급의학과 레지던트에게 시선을 거뒀다.
내 임기응변은 일단 성공적이었다.
“아? 그 친구? 자네가 좀 찾아 줘. 난 환자분과 대화 하고 있을 테니까.”
“네, 교수님.”
나는 서둘러 응급의학과 레지던트에게 달려갔다.
레지던트는 팔짱을 낀 채 오경민을 노려보고 있었다.
“선배, 안녕하세요.”
나는 응급의학과 레지던트 1년 차 문성규에게 살갑게 인사했다.
문성규는 나와 같은 심봉사 동아리의 회원이었기에 친분이 두터운 편이었다.
“오랜만이다, 믿음아. 근데 경민이 저 새끼 지금 뭐 하는 거냐?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네? 말턴이라고 빠져 가지고 말이야.”
“선배님이 너그럽게 용서해 주세요. 지금 사람 한 명 살리는 중이거든요.”
“사람을 살려? 내가 보기엔 돌 아이 짓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어처구니없어하는 문성규에게 나는 사정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문성규는 다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개똥도 약에 쓴다더니 노안도 다 쓸모가 있구나. 가 봐, 너희 교수님이 부른다.”
“네, 선배.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성규의 익살맞은 말을 뒤로하고 나는 침상으로 복귀했다.
졸지에 응급의학과 교수가 된 오경민이 나를 바라보며 빙긋 웃고 있었다.
“이 선생, 환자분이 너그럽게 우리 사정을 이해해 주셨으니 빨리 에코부터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