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제3장 물러서지 않을 때(2)
“하… 씨발 이게 이렇게 실패하나?”
손태호는 직원 전용 화장실로 들어가 머리를 벅벅 긁어 댔다.
실패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던 이번 작전.
이믿음이 병동 간호사의 신체에 손을 대도록 하는 작전.
이번 작전의 목적은 간호사 성추행범으로 몰아세워 이믿음의 평판을 추락시키는 것이었다.
오래전부터 흉부외과 전공 사실을 밝혔던 이믿음이었다.
그런 이믿음이 흉부외과에서 망신을 당한다?
다른 것도 아니고 간호사 성희롱범으로?
그렇다면 제아무리 철면피라도 흉부외과 수련을 할 수 없을 테고, 이믿음이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꿈은 허망하게 꺾일 것이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작전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눈치 빠른 이믿음은 손태호가 뒤에서 접근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녀석은 미리 손에 잔뜩 힘을 주고 있었다.
손태호가 이믿음의 손목을 낚아채자 반대로 이믿음이 그의 손목을 낚아채는 날렵한 동작도 선보였다.
그 순간 손태호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얼마나 낙담했는지는 아마 세상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이믿음을 골탕 먹일 상상에 어젯밤 잠도 설쳤던 손태호였으니까.
너무 아쉬웠다.
이번 작전만 성공하면 누명을 쓴 이믿음은 억울함에 치를 떨었을 텐데…
스태프들의 송곳 같은 시선에 찔려 피를 철철 흘렸을 텐데…….
저벅. 저벅. 저벅.
손태호는 원을 그리며 세면대 앞을 빙빙 돌았다.
후회와 한탄, 낭패 같은 감정이 물러가고 새로운 감정이 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바로 초조함이었다.
그 새끼, 보통 눈치가 아닌데 벌써 눈치챘겠지?
아냐, 의외로 아무 생각이 없을 수도 있지. 설마 내가 이런 작전을 세웠을 거라곤 상상 못했을걸?
손태호의 머릿속에서 두 가지의 추측이 격렬한 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믿음이 그의 작전을 알아챘냐, 아니냐의 싸움이었다.
현재로서는 후자에 좀 더 마음이 쏠리긴 했다.
후자의 근거가 더 뚜렷하다기보다는 단순한 희망사항이었지만.
지이이잉.
가운 주머니에 넣어 둔 콜폰이 몸을 떨어 댔다.
심신이 불안정했던 손태호는 그 작은 떨림에도 화들짝 놀랐다.
병동 콜인가?
지금 이믿음을 마주치고 싶지는 않은데?
다행히 전화가 온 것은 콜폰이 아닌 개인 휴대폰이었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이민호.
손태호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전화를 받았다.
“어, 민호야. 수련은 잘 받고 있지?”
손태호는 여자 친구에게 말하듯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민호.
손태호의 알파이자 오메가.
흉부외과 인턴 수련이 끝나는 대로 그는 이민호와 함께 성형외과 레지던트에 지원할 것이다.
아주 먼 훗날, 그러니까 대략 7, 8년 후에는
이민호가 강남 한복판에 개원할 성형외과에 한 자리를 차지하며 돈을 긁어모을 것이다.
이민호의 비위를 맞춰 주는 건 예나 지금이나 힘들지만 뭐 어떤가.
그에 따른 보상만 충분히 받을 수 있다면 말이다.
-됐고, 이믿음 건은 어떻게 됐는데? 네가 속 시원하게 처리한다며.
이민호의 추궁에 손태호는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이민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는 이민호에게 약속했다.
이믿음을 제대로 골탕 먹인 후 그 소식을 이민호에게 전해 주겠다고.
오늘 실시한 작전이 실패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게… 거의 다 됐는데 직전에 실패했어. 작전은 진짜 끝내줬는데 말이야.”
손태호는 이믿음에게 펼쳤던 작전을 이민호에게 설명했다.
하지만 이민호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휴대폰 너머로 전해지는 냉기가 고막이 얼어붙을 정도였다.
-그래서 어쩌라고? 결국 실패했다는 거 아닌가?
“…….”
-네 쓸데없는 실패담으로 내 소중한 시간과 귀를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미안, 근데 진짜 한 번만 더 믿어 봐. 내가 이런 쪽으로 잔머리 잘 돌아가는 건 너도 잘 알잖아.”
-다음 번에는 성공하고 연락해.
뚝!
일방적으로 통화가 끊긴 뒤 손태호는 휴대폰을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믿음 만큼 재수 없는 새끼.
네가 잘난 게 아니라 네 집안이 잘난 거라고.
착각하지 마.
차마 휴대폰에 대고 하지 못했던 말들을 손태호는 거울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쯤이면 이믿음도 없겠지?’
혼자 분을 삭이던 그는 시간을 확인하고 화장실을 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화장실 출입구를 막아섰다.
그토록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사람, 이믿음이었다.
* * *
“야, 너 재미있는 수작을 부렸더라?”
나는 손태호의 앞을 가로막으며 빈정거렸다.
다음 수술까지 아직 20분 정도의 여유가 남아 있었다. 병동에 쌓여 있던 처치도 순식간에 끝낸 터라 손태호를 손봐 주고 싶었다.
현재 나는 손태호를 향해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하나는 분노였다.
아까 전 손태호가 내게 했던 행동의 의도는 명백했다.
내가 간호사의 신체에 접촉하게 만들어 추행범으로 모는 것.
즉,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견원지간인데 이런 얍삽한 음모를 꾸민다?
손태호를 가만둔다면 나는 가마니임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손태호를 향해 느끼는 두 번째 감정.
그것은 감탄이었다.
의료 솜씨로 따지면 나는 백두산 정상에 있었고 손태호는 백두산 초입부에 있었다.
그러니까 의료에 관해서는 손태호가 나를 해코지 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손태호는 이를 깨닫고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나를 엿 먹이려 들었다.
어떻게 이런 작전을 생각할 수 있었는지.
나는 손태호의 머릿속에 들어가 보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사실 엄청나게 위험했어.’
좀 전의 상황을 떠올리자 가슴이 다시 쿵쾅쿵쾅 뛰었다.
손태호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불상사를 대비해 몸을 각성시켜 두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지금쯤 나는 간호사 사이에서 쓰레기로 분류되었을 것이다.
소문이 돌고 돌아 환자와 레지던트들에게 퍼질 수도 있었고.
나는 분명 악몽과 같은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겠지.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는데?”
손태호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녀석이 오리발을 내밀 것이 자명했던 터라 딱히 당황할 것도 없었다.
내가 그랬다고 고백할 양심이 있었으면 애초에 이런 일도 벌이지 않았을 테니까.
“하늘은 속여도 난 못 속인다. 내 손을 붙잡아서 간호사의 엉덩이를 만지게 하려고 했잖아.”
“미친 새끼, 소설 쓰고 앉아 있네. 멀쩡한 사람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지 마.”
“…….”
“애초에 너야말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고 있었던 아니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지?”
“넌 진짜 개새끼구나. 아니, 너와 비교하기에 개는 너무 훌륭한 동물일지도 모르겠다.”
“뭐라고?”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는 상황.
나와 손태호의 대화는 앞으로도 평행선을 달릴 게 분명해 보였다.
그럼에도 내가 손태호를 찾은 것은 경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너의 악행을 꿰뚫어 보고 있다고.
“내가 아무리 미워도 선은 지키자. 응?”
나는 와락 얼굴을 구기며 손태호의 멱살을 잡았다.
손태호가 멱살을 풀기 위해 버둥거렸지만 소용없었다.
육체 능력으로 보나.
과거 운동 경험으로 보나 손태호는 내 상대가 되지 않았으니까.
“나를 괴롭히고 싶으면 나만 괴롭혀. 죄 없는 간호사는 왜 끌어들이는 건데?”
“씨발, 이거 안 놔. 새끼야.”
“원한다면 놔줄게.”
내가 갑자기 손을 놓자 손태호가 뒤로 벌러덩 자빠졌다.
퍽 꼴사나운 모습이었으나 내 분노를 풀기엔 한참 모자란 수준이었다.
“내 코털을 건드려 봐야 좋을 거 없어.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또 이런 짓을 하다 걸리면 그때는 네가 상상도 못할 방법으로 내가 널 괴롭혀 줄 거야.”
“…….”
“내가 널 어떻게 괴롭힐지 궁금하다면 또 까불어 봐.”
나는 손태호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고 화장실을 나왔다.
오늘 미처 갚지 못한 빚은 조만간 다 청산하리라.
* * *
손태호를 혼내 주고 당직실로 복귀했더니 허성호가 나를 반겼다.
당직 근무자인 황은우는 응급실에 내려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믿음, 너 제법이더라? 괜히 양 교수님 제자가 아니던데?”
“…….”
“네가 제2 보조로 들어간다고 해서 걱정 많았는데 다 기우였네.”
허성호는 입이 마르도록 나를 치켜세우기 바빴다.
나는 적당한 겸손한 반응을 보며 그의 칭찬을 받았다.
전생에 이맘때쯤 나는 벌써 지옥을 경험하고 있었다.
얼마 전 황은우의 참관 아래 실시한 흉관 삽관에서 수차례 실패하고 쌍욕을 처먹었기 때문이다.
급기야 황은우가 이를 선배 레지던트들에게 퍼뜨리면서 내 입지는 1평짜리 방보다 좁아졌다.
그런데 그랬던 내가 현생에서는 벌써부터 선배들의 칭찬과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었다.
“양 교수님하고는 무슨 이야기했냐?”
“수술 중 갑자기 출혈이 생긴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제 근황에 대해서도 물으셨고요.”
“인턴 주제에 교수님하고 벌써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건가?”
“저는 선배님하고도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고 싶습니다.”
“짜식, 손만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입도 살아 있네?”
내 농담에 허성호가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드르르륵.
때마침 문이 열리고 황은우가 당직실로 들어왔다.
“응급실 다녀왔습니다.”
“선배, 환자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뭐에?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놀란 황은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곤란한 일이 생겼을 때 황은우는 이를 딱딱거리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버릇이 방금 막 나왔던 것이다.
내가 황은우의 버릇을 언급하자 황은우는 한 번 더 놀랐다.
“넌 의사가 아니라 탐정해도 되겠다.”
황은우는 버릇을 증명하듯 이를 한 번 더 딱딱거리고 허성호를 쳐다보았다.
방금 막 응급실에서 진료를 본 환자에 대해 노티(Notify, 의료적인 부분을 상대에게 알리다)했다.
황은우를 곤란하게 만든 환자의 상태가 궁금했기에 나 역시 귀를 쫑긋 세웠다.
환자는 50대 남성.
지병으로는 고혈압과 당뇨가 있었으며 충수돌기 절제술 이외에 수술 병력은 없었다.
가족력의 경우 환자의 아버지가 췌장암으로 사망을 했다고 한다.
C.C(주 호소)는 흉통과 호흡곤란.
응급실에서 흉부외과를 찾는 환자들이라면 누구나 흉통과 호흡곤란을 호소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어떤 질병을 특정하기란 불가능했다.
“심해 보이진 않길래 심전도랑 피 검사랑 흉부 촬영했거든요?”
“그래서?”
“그런데 이게 좀 애매해서요. 심전도랑 흉부는 아무 이상 없는데 피 검사 결과가 조금 이상해요.”
황은우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설명을 이었다.
피 검사 중 이상하게 troponin과 CK-MB 수치가 정상 이상이라는 것이다.
이 두 수치는 심장 표지자 검사에 들어가는데 심장 손상이 있을 경우 수치가 증가한다.
“심전도는 멀쩡한데 Troponin하고 CK-MB 수치만 높다고? 심전도 제대로 한 거 맞아?”
“선배, 저도 이제 2년 차예요. 심전도를 잘못 찍었을 리 없잖아요.”
허성호가 심전도를 의심하자 황은우는 그럴 리 없다며 맞받아쳤다.
두 사람이 환자의 상태 해석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는 사이.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환자의 환자 번호를 입력했다.
응급실에서 작성한 응급 기록지.
흉부외과에서 작성한 초진 기록지를 낱낱이 살폈다.
고생한 것에 비해 얻어 낸 것은 적었다.
방금 전 했던 황은우의 노티가 그만큼 핵심을 잘 요약했으니까.
핵심은 심전도 결과와 피 검사 결과가 서로 충돌한다는 것이고.
문제는 전생의 나조차 이런 환자를 진료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고.
더 큰 문제는 이 환자에 대한 전생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는 것이었다.
응급실을 두 번 찾았다가 두 번째 방문에 사망한 환자였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