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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133화 (133/257)
  • 133화 제2장 공공의 적(3)

    지이이잉.

    때마침 수술실 문이 열리면서 양 교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수술모와 가운과 마스크를 쓰고 있음에도 나는 양 교수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비단 양 교수가 수술방에 들어와서는 아니었다.

    같은 복장을 한 의사가 수천 명 있더라도 나는 양 교수를 구별할 자신이 있었다.

    양 교수와 내가 지금까지 함께 해 온 시간들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기에.

    “드디어 이런 날이 오는구나.”

    양 교수가 집도의 자리에 서서 나를 쳐다보았다.

    감개무량한 눈빛.

    양 교수를 바라보는 내 눈빛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스승과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함께 수술실에 들어오는 날을 꿈꿔 왔다.

    학생과 교수가 아닌

    비록 직급 차이는 있지만 의사 대 의사로서 현장에서 마주하는 날을 기다려 왔다.

    양 교수는 흉부외과 세대교체의 바람을 내가 이끌어 주길 바랐고, 이를 위해 은퇴를 번복하고 흉부외과로 돌아왔다.

    지금부터는 내가 양 교수에게 받은 은혜를 갚아야 했다.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외과의로서의 감각.

    전생에서 물려받은, 환자를 위하는 우직한 마음.

    이번 생에서 얻은 영리한 잔꾀와 정치력 등등.

    나는 충분히 은혜를 갚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믿음이, 너라고 예외일 수는 없지. 환자 브리핑을 해 보거라.”

    다시 차갑게 식어 버린 양 교수의 눈빛.

    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환자는 3주 전 흉통 및 잦은 기침으로 본원 호흡기 내과 내원하였습니다.”

    “…….”

    “엑스레이 촬영 후 이상 소견은 없었으며 이후 진행된 약물 치료에 차도가 없어 촬영한 CT에서 폐의 종양을 발견하였습니다.”

    “…….”

    “이어진 조직 검사에서 원발성 T3N2M0 비소세포암 진단받고 폐엽 절제술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브리핑이 끝나자 양 교수는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허성호는 눈을 치켜뜬 것이 살짝 놀란 눈치였다.

    하긴, 그럴 수밖에…….

    보통 수술방에 인턴이 환자의 경과나 병세를 꿰뚫고 있는 경우는 없었다.

    폐암 환자라서 폐엽절제술을 받는구나.

    이 정도의 가장 기초적인 정보만 기억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나는 평범한 인턴과 달랐다.

    환자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의사로서 환자에게 해 줄 것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환자의 A부터 Z까지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참고로 전생에서 내가 만난 명의 중에 환자를 홀대하거나 무시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명의들은 본인이 진료하는 환자의 상태와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결국 의사는 환자를 위할 때만 의사로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돈을 버는 것은 조금 다른 영역일 수도 있겠지만.

    “교수님, 수술 전에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허성호가 양 교수에게 물었다.

    “뭐든지.”

    “정말 믿음이를 세컨드(제2보조)로 두실 겁니까? 은우나 태평이한테 맡기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허성호는 나의 세컨드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번 반응 역시 상식적인 반응이었다.

    수술방 인턴은 잘해 봐야 써드, 보통은 수술 시야를 확보하는 일 정도만 맡기 마련이었다.

    더군다나 오늘 수술이 어디 보통 수술인가.

    무려 폐암 3기 환자의 폐엽을 절제하는 수술이었다.

    고작 인턴이 집도의 옆에서 집도의를 보조한다면 누구나 놀랄 것이다.

    “성호야, 내가 종종 말한 적이 있을 거란다. 의대에서 교수로 근무 중 비밀 병기를 교육했었다고.”

    “아… 혹시 그 친구가 믿음이었습니까?”

    “그래,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 없단다.”

    “어쩐지 수술 준비가 너무 깔끔하고 빨리 끝났다 싶었습니다.”

    이제야 납득이 간다는 듯 허성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주변에 내 이야기를 하셨구나.’

    새롭게 알게 된 정보로 나는 조금 쑥스러워졌다.

    그나저나 제자라는 표현이 딱 좋았을 텐데, 비밀 병기라니…….

    조금 낯 뜨거웠다.

    “믿음이 네 진짜 실력은 성호 정도만 알고 있단다. 내가 의국에서 믿는 녀석은 성호뿐이니까.”

    “…….”

    “앞으로 힘든 일이 있으면 성호한테 말하고 도움을 받거라.”

    “네, 교수님.”

    “여담은 이쯤 하고, 본격적으로 수술을 시작해 보자꾸나.”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나는 옆으로 돌아누운 환자의 오른쪽 가슴을 베타딘으로 소독한 후 방포로 덮었다.

    이 방포가 망자의 몸을 가릴 하얀 천이 될 것인지.

    아니면 무사히 벗겨져 환자의 회복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인지.

    남은 숙제는 이 자리에 있는 우리에게 달려 있었다.

    * * *

    “성호, 넌 평소에 고생이 많으니 오늘 개흉술은 믿음이에게 맡기자꾸나.”

    “아. 네.”

    허성호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양순재는 이믿음을 말도 안 되게 신뢰하는 것처럼 보였다.

    인턴에게 제2 보조를 맡긴 것도 모자라 개흉술을 시키겠다니…….

    사실 인턴이면 흉관삽관이나 중심정맥관 삽입도 무서워서 벌벌 떨 시기거늘.

    “이믿음, 이리 와.”

    “감사합니다, 선배.”

    허성호가 자리를 비켜 주자 이믿음은 그 자리를 무척 자연스럽게 차지했다.

    단순히 교수의 지시라서 억지로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눈빛도, 목소리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으니까.

    이믿음은 정말 개흉술에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너무 빠르지 않나?’

    허성호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이믿음을 지켜보았다.

    환자의 수술 부위를 닫을 때면, 그러니까 수술이 한결 여유로울 때면.

    양순재는 종종 자신이 예전에 키웠던 천재 제자에 대해서 말을 하곤 했다.

    습득력이 스펀지처럼 빠르고, 참의사가 될 인성과 재능을 갖춘 제자에 관해서.

    물론 허성호는 그 당사자가 이믿음이라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게 되었지만.

    하지만 이믿음이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모형이 아닌 사람을 상대로 개흉술을 하는 건 처음일 것이다.

    지금 이믿음이 느낄 두려움과 압박감은 장난이 아닐 것이다.

    과거의 자신도 그랬으니까.

    ‘하… 이건 진짜 아닌데…….’

    허성호는 이믿음을 말리는 게 좋지 않겠냐는 눈빛을 양 교수에게 쏘았다.

    하지만 그의 간절한 눈빛을 읽고도 양 교수는 고개를 가로저을 따름이었다.

    양 교수는 무사 만루를 지켜보는 감독.

    이믿음은 무사 만루에 마운드를 밟고 선 투수.

    허성호 자신은 그런 감독과 투수를 지켜보는 관객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세 사람이 자아내는 삼각관계로 수술방 분위기는 잔뜩 잡아당겨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고무줄처럼 위태로웠다.

    “우상엽 절제술 전, 후측방 개흉술부터 시작하겠습니다. 10번이요.”

    스크럽 간호사는 대답 대신 스칼펠(칼대)에 10번 칼날을 꽂아 이믿음에게 건넸다.

    이믿음은 능숙한 솜씨로 후측방 개흉술을 실시했다.

    스으으윽.

    메스가 우아한 우상향의 곡선을 그렸다.

    환자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등 쪽으로 말끔한 절개창이 생겨났다.

    놀라운 것은 15센티 정도 되는 꽤 긴 절개창을 만드는 동안, 이믿음의 손은 한 번도 멈추지 않았으며 한 번도 떨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거즈 부탁드립니다.”

    피부와 근막이 갈라지면서 생긴 핏물을 거즈로 닦아 내고, 이믿음은 개흉술을 이어 갔다.

    허성호의 도움을 받아 절개창을 좌우로 벌린 뒤 견인기를 설치했다.

    최적의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견인기 나사를 조였다가 풀고.

    시야를 넓혔다고 좁히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이래서 비밀 병기라고 하셨던 건가?’

    이믿음의 일거수일투족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허성호는 어느새 이믿음의 야무진 손놀림에 빠져들었다.

    그의 걱정이 무색할 만큼 이믿음의 처치는 사소한 부분까지 정확하고 완벽했으니까.

    “…….”

    “…….”

    문득 양순재와 시선을 마주치니 양순재의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웃고 있었다.

    거 봐, 내가 뭐라고 했어? 믿음이가 잘 해낼 거라고 했지?

    …라고 양순재의 눈은 말하고 있었다.

    “수술 시야는 이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견인기를 고정한 이믿음이 다시 한번 메스를 쥐었다.

    환자의 갈비뼈 사이의 공간을 거침없이 갈라놓았다.

    종양을 제거해야 할 부위의 시야를 확보한 것이다.

    ‘와…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네.’

    허성호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인턴 이믿음의 무결점 개흉술은 상식을 뛰어넘었다.

    제아무리 양순재의 개인 수련을 받았다고 해도.

    그래서 허성호는 경이로움을 넘어 두려움마저 느꼈다.

    부교수인 양순재의 후광.

    그리고 지금 눈앞에서 펼치고 있는 놀라운 솜씨.

    이 두 가지를 앞세워 이믿음은 윗 선임들을 자기 발밑에 두려고 하지 않을까.

    이믿음의 의도는 알 수 없었으나 이믿음이 마음만 먹는다면 못할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심할 수 없는 후임이 들어왔다.

    허성호는 최종적으로 이믿음을 그렇게 평가했다.

    * * *

    “후측방 개흉술, 마쳤습니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메스를 내려놓으며 아쉽게 말했다.

    조선 시대의 기미상궁이 꼭 이런 기분이었을까.

    진수성찬을 코앞에 두고도 음식을 딱 한 점만 입에 넣을 수 있는 안타까운 기분 말이다.

    제일 중요하고 핵심적인 우상엽 절제술을 나는 펼칠 수 없었다.

    왜냐고?

    아직 한낱 인턴에 불과했기에.

    마음 같아서야 당장이라도 양 교수의 가르침을 따라 환자를 집도해 보고 싶었지만 그건 지나친 욕심이었다.

    “나와 수련할 때보다 실력이 더 좋아졌구나. 특히 왼손 쓰는 게 훨씬 능숙해졌는걸?”

    “감사합니다, 교수님.”

    나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역시 양 교수님이었다. 내가 소아 흉부외과에서 왼손 수련을 했던 것을 바로 알아보다니.

    “믿음이는 자리로 돌아오고, 성호는 제 위치로 가고.”

    “네, 교수님.”

    “네, 교수님.”

    양 교수의 곁으로 복귀한 나는 맞은편에 서 있는 허성호의 표정을 살폈다.

    마스크를 써서 정확한 표정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미간에 잡힌 주름이나 가라앉은 목소리를 보면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분명 개흉술 솜씨를 보고 긴장했겠지.

    허성호는 듬직한 곰 같은 사내였지만 의외로 겁과 걱정이 많은 타입이기도 했다.

    수술이 끝난 후 달래 주지 않으면 내게 미운털이 박히고 말 것이다.

    “믿음이가 수술 시야를 잘 확보해 줬으니 이제 암 종양을 떼어 내는 일만 남았구나.”

    양 교수가 혼잣말을 하며 루뻬(광학안경)을 조정하고 수술 부위에 얼굴을 가까이했다.

    “우상엽 폐첨부(최상단)가 늑막과 살짝 유착(결합)되어 있구나. 성호야, 보이니?”

    “네, 보입니다. 다행히 흉막까지 유착이 되어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나는 곧바로 보비를 준비(전기 소작기)했다.

    “말하지 않아도 척척이구나.”

    소작기를 건네받고 눈으로 빙긋 웃는 양 교수.

    “교수님 생각이 제 생각 아니겠습니까?”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군. 이 기회에 한번 시험해 볼까?”

    치이이이익.

    양 교수는 전기 소작기로 폐첨부와 늑막이 결합된 것을 지져서 분리시켰다.

    조직이 타면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달고나 타는 듯한 냄새가 퍼졌다.

    이어지는 수술에서 나와 양 교수는 고집스럽게도 단 한마디조차 주고받지 않았다.

    마치 이심전심이란 사자성어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시험하는 것처럼.

    서로를 시험하는 듯한 묘한 긴장감이 나는 오히려 좋았다.

    무려 1년 만에 스승과 함께하는 수술이었다.

    그것도 수술대에 누운 것은 카데바가 아닌 실제 환자였다.

    사제 간의 끈끈한 호흡을 확인하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이 있을까.

    양 교수가 마치 한석봉의 어머니 같았고, 나는 마치 한석봉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던 건 덤이었고.

    사제가 함께 펼치는 수술은 한동안 환상적인 케미를 자랑했다.

    수술 시간이 채 2시간을 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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