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131화 (131/257)

131화 제2장 공공의 적(1)

흉부외과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아침.

흉관 삽관술을 멋지게 성공한 나는 황은우를 도와 컨퍼런스 준비를 했다.

회의실로 들어가 청소를 하고, 빔 프로젝트를 연결하고, 테이블에 유입물을 세팅해 놓았다.

‘다 추억이구나.’

전생을 거슬러 돌아온 회의실은 내 기억 속 모습과 똑같았다.

낡은 원목 책장에 꽂힌 빛바랜 의료 서적들.

그중에서 내가 책장이 반질반질해질 정도로 읽었던 흉부외과 개론서.

더 넓은 세상을 봐야 한다며 과장이 전시해 놓은 지구본 등등.

회의실의 풍경은 어느 것 하나 변한 것이 없었다.

전생의 수련 시절 내게 회의실은 아픔의 장소이자 치유의 장소였다.

처방 입력 실수 또는 처치 실수를 한 뒤 나는 꼭 회의실에서 선배에게 정강이를 까였다.

귀에서 피가 날 정도의 심한 욕설도 들었다.

그래서 회의실을 싫어했지만 막상 쉴 곳도 회의실밖에 없는 역설이 발생했다.

당직실에서 쉬면 선배의 눈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과거 회의실에서 혼자서 흘린 눈물이 아마 다른 평생 흘린 눈물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나는 자신할 수 있었다.

추억에서 빠져나온 나는 회의 준비를 마무리하고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황은우가 내 곁에 앉았고.

손태호는 나와 멀찌감치 떨어져서 앉았다.

한쪽 입가가 말려 올라간 것을 보면 손태호는 어딘가 심술이 나도 제대로 난 것 같았다.

혼자 오전 루틴 잡을 다 해서.

그게 아니라면 흉관 삽관 환자 엑스레이 촬영을 위해 검사실로 내려보내서.

추측해 보건대 손태호가 삐질 이유는 이 두 가지밖에 없었다.

더 근본적인 원인을 따져 보면 나와 자신이 차별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테고.

‘너희 족속들은 진짜 이해관계를 너무 심하게 따진단 말이지.’

나는 손태호를 바라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내가 고의로 루틴 잡을 안 했던가?

응급환자의 경과를 관찰하다가 흉관 삽관을 펼쳤던 것뿐이었는데?

환자 침상을 끌고 검사실로 가는 일이 그렇게 힘들고 억울한가?

어제 병동 근무를 했던 나는 하루 종일 검사실을 왔다 갔다 했는데?

누가 이민호 패거리 아니랄까 봐.

손태호 역시 본인의 이득에 지극히 민감했다.

이렇게 응어리가 몇 가지 더 쌓인다면 녀석은 아마 직접적으로 나를 공격해 올 것이다.

순순히 당해 줄 내가 아니었지만.

“오랜만이구나, 믿음아.”

불쑥 어깨 위로 올라오는 손, 다정하면서도 익숙한 목소리.

나는 뒤를 돌아보며 기쁘게 웃었다.

“교수님, 잘 지내셨습니까?”

나를 부른 사람의 정체는 다름 아닌 양순재 교수였다.

의대 시절 일반 흉부외과 파트의 정수를 전수해 준 은사.

나와 함께 수술을 하고 싶다며 은퇴를 번복하고 흉부외과로 복귀한 일반 흉부외과 분야의 대가.

인턴 근무를 시작한 뒤로는 나도 바쁘고, 양 교수도 수술로 바빠서 간간이 통화만 하곤 했다.

“나야 별 탈 없지. 믿음이 너도 건강해 보이는구나.”

“교수님은 살이 조금 빠지신 것 같습니다.”

못 본 사이 양 교수의 턱이 갸름해지고 볼살은 줄어들었다.

수술 스케줄에 치여서 살이 빠졌는지.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어서 살이 빠졌는지는 아직 알 길이 없었다.

어느 쪽이 됐든 예감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그러니? 소아 흉부외과에서는 잘 배웠고?”

“네, 무려 8개월 동안 수련했으니까요. 특히 박 교수님하고 이 교수님이 잘해 주셔서 더 많은 걸 더 빨리 배울 수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박 교수가 네 칭찬을 많이 하더구나. 일을 빠릿빠릿하고 꼼꼼하게 한다고 말이야.”

양 교수가 뿌듯한 표정으로 껄껄껄 웃었다.

제자가 다른 교수에게 칭찬을 받았으니 기쁠 수밖에…….

흉부외과 회의실에서 이렇게 양 교수와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양 교수는 전생의 흉부외과에서는 없었던 인물이니까.

양 교수처럼 올곧고 실력 있는 서전이 합류했으니 이번 생의 흉부외과 형편은 조금 나아졌겠지?

나는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저 오늘 수술방 근무하는 날입니다. 이따가 교수님 수술 때 수술방에서 뵙겠습니다.”

“오냐,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순간이 찾아왔구나.”

대화를 마친 후 양 교수가 뒷자리로 이동했다.

“뭐야? 이믿음, 네가 양 교수님을 어떻게 알아?”

“본과 때 외과학 교수님인데 저를 특별히 예뻐해 주셨어요. 도움도 많이 주셨고요.”

“그래? 듣고 보니 양 교수님하고 너하고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점에서요?”

“고생을 사서 한다는 점.”

황은우의 한마디가 돌멩이가 되어 내 마음속 호수의 파문을 일으켰다.

고생을 사서 한다라…….

바꿔 말하면 양 교수님이 사서 고생을 하는 중이라는 거고.

나 역시 조만간 사서 고생을 할 거라는 뜻인데.

황은우는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아는 듯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썩 좋은 것이 아닌 듯했다.

“그게 무…….”

말을 채 꺼내기도 전에 치프의 진행에 따라 회의가 시작되었다.

* * *

황은우가 은근슬쩍 드러낸 불행의 씨앗.

살이 빠져 홀쭉해진 양 교수의 두 볼.

이 두 가지의 상관관계를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회의가 끝날 무렵 이 과장과 양 교수가 팽팽한 신경전을 펼쳤다.

선공을 날린 것은 물론 이 과장이었다.

“양 교수님, 수익률 좀 신경 써 주셔야겠습니다. 검사도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해 주시고 수술할 때 비급여 항목도 적극적으로 사용해 주세요.”

“…….”

“통계를 보면 진료 시간이 길어서 환자 처리 속도도 느립니다. 병원이 상담소도 아니고 환자들 하소연을 어떻게 다 들어줍니까?”

이 과장은 노골적으로 양 교수를 저격했다.

이용수.

차기 진료부원장을 꿈꾸는 흉부외과 과장.

양 교수의 4년 후배로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이자 지독한 실적주의자였다.

이 과장이 성과를 달성하는 방식은 간단했다.

성과가 나올 때까지 밑에 사람을 닦달하고 들들 볶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밑에 사람이 불평, 불만을 해도 이 과장은 그저 개소기로 치부할 따름이었다.

-나는 목표를 쟁취하기 위해 고난과 맞서 싸우는 투사(鬪士)다.

이 과장은 스스로를 그런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본인이 잔다르크쯤 되는 인물인 것처럼.

이용수가 마침내 목적을 이루고 지방 분원 진료부원장으로 차출되던 날.

나는 바보처럼 쌍수를 들고 반겼다.

진짜 악마 강태섭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도 모르고.

여우 대신 사자가 온 것도 모르고.

한편 환자에 관해서는 양보가 없는 양 교수 역시 이 과장에게 당당히 맞섰다.

“과장님, 검사가 필요 없는 환자에게 검사를 하고 비급여 항목을 남발하니까 환자들이 대학병원을 불신하는 것 아닙니까?”

“…….”

“진료 시간이 길어서 환자를 많이 볼 순 없는 건 사실이지만 그만큼 환자 재 진료율이 높기도 하고요.”

양 교수는 조근조근, 그리고 데이터를 근거로 해서 이 과장의 논리를 맞받아쳤다.

퇴원 전 실시하는 입원 환자의 만족도 평가가 높다는 점과 수익률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게 주요 골자였다.

나는 속으로 양 교수를 힘껏 응원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강태섭이라면, 세상에서 두 번째로 싫어하는 사람이 이 과장이었다.

아랫사람을 맷돌로 갈아 버리는 그의 악행에 누군가 제동을 걸어 줄 필요가 있었다.

“양 교수님, 지금 자기만족을 할 때가 아닙니다. 과 수익을 올려야 한다니까요?”

“과장님, 지나치게 수익에 집착하시는 것 아닙니까? 병원의 본질은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참 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에 환장하는 게 왜 죄가 되죠? 병원은 땅 파서 진료합니까? 양 교수님이 입고 있는 가운, 진료실, 수술방, 전부 다 돈으로 만든 거라고요.”

한 번 불이 붙은 두 사람의 언쟁은 쉽게 꺼질 줄 몰랐다.

둘 다 고집이 셌던 탓에 자신의 뜻을 다른 사람에게 굽히질 않았다.

회의실 분위기가 점차 엉망으로 변하는 가운데 치프가 간신히 대화에 껴들었다.

“과장님, 교수님. 죄송합니다만 회진 도실 시간이 됐습니다.”

“에이 씨, 지금 회진이 문제야? 꼴에 선배라고 과장 말을 개똥으로 알아 쳐 듣는데 말이야.”

이 과장이 저급한 화법을 사용하며 포악질을 부렸다.

이 과장의 주특기 중 하나인 사람 속 긁기였다.

과연 효과가 있었는지 양 교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나도 저 화술에 몇 번 당해 모욕감을 느껴 본 적이 있어서 양 교수의 기분을 잘 알았다.

열도 받고, 어이도 없고, 짜증도 나고, 똑같은 수준으로 받아치기도 그렇고.

“회진은 잘난 양 교수님께서 도시라고 해. 난 나갈 테니까.”

이 과장이 자리를 떠나면서 회의실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이제 모든 스태프의 시선이 양 교수에게 집중되었다.

“오늘 회진은 내가 돌지.”

공개적인 자리에서 하극상을 당한 채 양 교수가 먼저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이 처량해 보인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 * *

‘설마 이렇게 꼬일 줄이야.’

회진 내내 나는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양 교수가 합류함으로써 흉부외과 분위기가 더 나아질 줄 알았다.

교수와 레지던트들이 하나로 똘똘 뭉쳐 각박한 의료 환경을 이겨 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부 내 머릿속에서 펼쳐진 착각일 뿐이었다.

이 과장이 4년 선배이자 일반 흉부외과의 대가인 양 교수를 설마 이렇게까지 푸대접할 줄은 몰랐다.

그러니까 이 과장은 전생의 내가 기억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악질이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회귀를 하면서 이 과장에 대한 기억이 희석된 모양이었다.

‘살이 빠지실 만하지.’

나는 회진하는 동안 홀쭉해진 양 교수를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양 교수는 외과의로서의 권위와 명예를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과거 소문에 불과했던 성추행 소문만으로도 양 교수는 은퇴를 결심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몸에 튀는 한 방울의 흙탕물조차 용납하지 않는 백로.

그 백로가 바로 양 교수였다.

그런데 그런 양 교수를 이 과장이 계속 흠집 내고 있으니…….

양 교수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했다.

어떻게 하면 양 교수를 도울 수 있을까.

이 과장에게 시원하게 한 방 먹여 줄 수 있을까.

병실을 옮겨 다니는 동안, 나는 깊은 고민과 번뇌에 빠졌다.

집도를 할 수 있는 교수급.

아니, 최소한 펠로우라도 됐으면 뛰고 날아다녔을 텐데 아쉽게도 지금의 나는 인턴에 불과했다.

혼자서 프로젝트를 이끌어갈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이윽고 회진이 끝난 후 뿔뿔이 흩어지는 의국 스태프.

“…….”

“…….”

그 속에서 나는 드라마 속 주연 배우들이 그러하듯 그림처럼 양 교수와 눈이 맞았다.

양 교수의 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은 입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고 나는 그것들을 남김없이 들을 수 있었다.

환자밖에 모르는 늙은 교수는 권력의 중심에 있는 과장과 외로운 싸움을 펼치고 있었다.

양 교수의 눈은 지쳐 있었고, 불안해 보였으며 그럼에도 이 현실을 이겨 내겠다는 심지는 꺼져 있지 않았다.

양 교수 혼자라면 헤쳐 나가기 힘들겠지만 내가 함께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비록 인턴에 불과하나.

내 솜씨는 이미 웬만한 교수들을 뛰어넘었으며.

1살 때부터 키워 온, 전생에서는 미처 갖지 못했던 모사꾼 기질은 나의 새로운 무기였다.

스승이 내게 베풀었던 것을 이제는 내가 갚을 차례.

나는 양 교수가 쓰러지지 않게 받쳐 주는 지지대가 될 것이고, 양 교수가 휘두를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짧은 눈 맞춤으로 충분히 대화를 나눈 나와 양 교수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우리는 헤어졌지만 곧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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