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129화 (129/257)
  • 129화 제1장 리턴(4)

    “선배가 맡긴 차트, 다 작성했습니다.”

    나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며 후련하게 대답했다.

    일을 자정까지 끝내는 게 목표였는데, 현재 시간은 밤 11시밖에 되지 않았다.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를 뽐냈던 것이다.

    업무를 단축한 시간만큼 나는 전생보다 성숙하고 성장했다.

    생각이 그쯤 미치자 뿌듯했다.

    “고생했다. 좀 쉬어.”

    피곤에 찌든 황은우는 내 말에 성의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미지근한 반응에서 나는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다.

    “입원, 퇴원, 경과 기록지까지 다 적었어요. 선배도 금방 쉬실 수 있을 겁니다.”

    “응? 퇴원만 한 거 아니었어?”

    그제야 황은우도 이상한 점을 느꼈던 모양이다.

    눈을 살짝 치켜뜨고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퇴원만 해도 엄청 빠른 건데 다른 차트까지 다 작성했어?”

    “네.”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윽고 황은우는 내가 작성한 환자들의 차트를 모니터에 띄우고 눈대중으로 훑더니 무릎을 탁 쳤다.

    “미쳤네, 미쳤어. 아까 퇴원 요약 하나만 뽀록으로 잘한 게 아니었구나?”

    “말씀드렸잖아요. 소아 흉부외과에서부터 꾸준히 차트 작성했다고.”

    “아이고, 내 새끼. 이런 보물이 어디 있다가 이제 와서 내 앞에 나타났는지.”

    본인의 감정을 과장해서 표현하는 황은우를 바라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전생에서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황은우의 칭찬을 이번 생에서는 인턴 첫날부터 받았다.

    황은우는 분명 까맣게 모를 것이다.

    전생의 미운 오리 새끼였던 내가 그에게 얼마나 칭찬받고 싶어 했는지를.

    하지만 황은우는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흉부외과에서 앞으로 내가 상대해야 할 인연은 수도 없이 많았다.

    타락하는 것을 막아 줘야 하는 인연.

    복수를 해야 하는 인연.

    새롭게 동료로 엮여야 하는 인연 등등.

    과거엔 무력하게 지켜보기만 했던 인연들을 나는 내 손으로 지켜 내고, 반대로 내 손으로 처단할 것이다.

    지금의 나는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다.

    “고생했는데 야식이라도 시켜 먹자.”

    “바쁘지 않으세요?”

    “병원 일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야식 먹을 시간을 못 내서야 되겠어?”

    황은우는 책상 서랍에 있는 전단지를 꺼내 야식을 주문했다.

    야식 메뉴는 치킨으로, 30분 만에 병원 스테이션까지 도착했다.

    나는 스테이션에서 치킨 세 마리를 받아 당직실로 돌아왔다.

    그때는 라운딩을 돌고 온 짝꿍 인턴 손태호도 당직실로 복귀한 상태였다.

    “맛있게들 먹어라.”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밤늦게 먹는 치킨은 꿀맛이었다.

    황은우도, 손태호도, 심지어 나조차도 치킨을 한 번 입에 대고서는 품위를 잃었다.

    흉부외과 스태프는 병원 밥도 못 먹어서 라면이나 빵 따위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다.

    그런 상황에서 기름진 치킨이 위장으로 들어간다?

    미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노릇이었다.

    1인 1닭을 마치고 정신을 차려 보니 닭 뼈만이 포장 비닐 위에 나뒹굴고 있었다.

    뒷정리를 마친 뒤 우리 셋은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4년 차는 기숙사에.

    3년 차는 회의실에서 내일 있을 케이스 스터디를 준비 중이었다.

    윗 선배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

    “너희 근무는 정했어?”

    “아니요, 아직.”

    “믿음아, 내일부터 네가 계속 병동 근무해라.”

    황은우는 일찌감치 나를 병동 근무자로 점찍었다.

    흉부외과 전공 예정자이니 곁에서 챙겨 줄 요량인 듯했다.

    “선배, 죄송한데 원래 병동 근무랑 수술방 근무는 번갈아서 하는 거 아닌가요?”

    손태호가 불만 섞인 목소리로 이의를 제기했다.

    원칙적으로는 손태호의 말이 옳았다.

    “손태호, 너 인턴 끝나면 무슨 전공할 건데?”

    “저는 성형외과 갈 겁니다.”

    “그럼 잘됐네. 흉부외과에서 빡세게 어시스트 배우고 성형외과 가서 날아다니면 되잖아.”

    “…….”

    “왜? 불만 있어? 불만 있으면 솔직하게 말하고.”

    손태호에게 수술방 근무를 강요하는 황은우의 말투와 눈빛은 불량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그의 말을 거절하면 본때를 보여 주겠다는 듯.

    황은우는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못 되고, 적당히 예의를 차리고, 적당히 무례할 줄 아는 특이한 캐릭터였다.

    “선배, 그냥 퐁당퐁당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날카로운 분위기 속에 내가 한마디 했다.

    그러자 황은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기껏 나를 챙겨 주려고 했는데 내가 그의 호의를 걷어찬 그림이 됐기 때문이다.

    “왜?”

    “저 수술방 근무 좋아합니다. 외과의는 결국 수술방에서 싸우는 사람이니까요. 태호랑 차별받는 것도 싫고요.”

    “뭐, 평양 감사도 본인이 싫다면 어쩔 수 없는 법이지.”

    황은우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내 의견을 받아들였다.

    뜻밖의 상황에 손태호만 당황한 듯했다.

    설마 내 입으로 근무를 반반 나누자고 할 줄은 몰랐을 테니까.

    하지만 근무를 반반으로 나눈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오로지 나만을 위한.

    [Right upper lobectomy(우상엽 절제술) by yang/Am: 11:00]

    손태호를 도와 차트를 작성하던 중 나는 한 환자의 기록을 확인했다.

    내일 양순재 교수의 폐 절제술 수술이 있었고.

    나는 그 수술의 어시스트로 들어가고 싶었다.

    양순재 교수.

    의대 시절 내게 폐·식도 파트의 지식을 전수해 주었던 은사.

    내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며 은퇴를 번복하고 흉부외과로 복귀한 스승.

    내일이면 나는 양 교수와 병원에서 마주칠 것이다.

    학생과 교수가 아닌 의사 대 의사로 마주할 것이다.

    카데바를 이용한 연습이 아닌.

    실전에서 스승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 나는 벌써부터 흥분되고 기대가 됐다.

    “수술방 근무랑 병동 근무는 번갈아서 한다고 치자. 그럼 당직 근무는 어떻게 할래?”

    황은우의 말에 나와 손태호는 어색한 침묵을 지켰다.

    평소 사이가 안 좋았던 탓에 근무 조율이 하나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긴, 오는 길에 마주쳤을 때도 이를 드러내며 독설을 주고 바빴으니까.

    “하루가 다 지나가는데도 당직 근무 스케줄도 안 정했어? 너희 사이 별로 안 좋구나?”

    “사실 별로 안 좋은 게 아니라 그냥 안 좋습니다.”

    나는 대놓고 사실을 고백했다.

    예전의 나라면 안 친해도 친한 척하고, 그 친구의 쓸데없는 일까지 도맡았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는 없다.

    그러니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에게 집중하자.

    날 싫어하는 사람은 나도 싫어하자.

    이런 식으로 가치관을 바꾸어 버렸던 것이다.

    “믿음아, 너 은근히 화끈한 구석이 있다? 설마 나한테도 그럴 건 아니지?”

    “걱정 마세요. 제가 원래 위아래는 확실히 구분하니까.”

    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선배, 오늘 당직은 제가 설게요. 손태호, 네 생각은?”

    “너 좋을 대로.”

    손태호는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반반 근무를 제안한 사람도 나이고

    첫 당직을 선다고 한 사람도 나이거늘 손태호는 내게 고마워하는 기색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역시 눈치가 빠른 녀석이었다.

    내 행동들이 사실 손태호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라는 걸 손태호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긴, 이 정도 눈치도 없으면 이민호 곁에서 붙어 있을 수도 없겠지.

    근무 정리 후 대화는 30분 정도 이어졌다.

    내가 당직을 서기로 했으므로 손태호가 침대에 누웠다.

    황은우는 밀린 차트를 작성하느라 바빴다.

    나는 병동 콜을 대기하며 모처럼 폐·식도 파트 공부를 복습했다.

    양 교수님과의 수술이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 * *

    흉부외과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새벽이 밝았다.

    눈이 빠져라 보고 있던 폐·식도 파트 자료들을 멀리하고 나는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당직실은 파도 없는 바다처럼 잔잔했다.

    같이 근무 중이던 황은우는 책상에 엎드린 채 색색 잠들어 있었다.

    2시간 전부터 병동과 응급실 콜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오지 않았다.

    나는 소리를 내지 않고 일어나 창가 쪽으로 이동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병원 바깥 풍경을 응시했다.

    문득 어디선가 주워들었던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라는 명언이 생각났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과연 얼마나 어두운 걸까.

    지나간 어둠은 무엇이고,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어둠은 무엇일까.

    나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전생에서 보낸 흉부외과의 나날들을 돌이켜 보았다.

    ‘아직 멀었구나.’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

    흉부외과 인턴 근무를 갓 시작한 나는 어둠은커녕 어둠을 모르는 아침에 있는 단계였다.

    진정한 어둠은 아마 원수 강태섭을 처치할 때쯤 마주하게 되지 않을까.

    “어, 음… 일어났냐?”

    황은우는 어느새 몸을 일으킨 뒤 비몽사몽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네, 선배는 더 주무세요.”

    “안 돼, 바빠. 아직 밀린 차트가 얼마나 많은데.”

    “어제 제가 도와드려서 다 끝낸 거 아니에요?”

    “…아. 맞네, 맞아. 잠깐 정신이 나갔나 봐.”

    멋쩍게 웃는 황은우가 나는 안쓰러웠다.

    잠도 못 자고 일에 치이다 보면 자기 무슨 일을 했는지.

    그 일을 제대로 끝냈는지조차 까먹을 때가 있었으니까.

    레지던트 1년 차가 되는 순간 나 역시 황은우의 길을 고스란히 밟게 될 것이다.

    “더 자고 싶기는 한데, 잠은 이미 다 깼다. 컨퍼런스 준비나 하고 있어야지.”

    “저는 태호랑 루틴 잡하고 있을게요.”

    “병실 환자 중에 흉관 삽관해야 하는 환자 있는데… 괜찮겠냐?”

    황은우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어제 새벽 3시.

    교통사고를 당한 후 응급실을 통해 병동에 입원한 환자가 있었다.

    이름은 도현신, 나이는 34세.

    흉부 엑스레이 및 혈액 검사, 심전도 검사 등을 받았는데.

    4, 5번 갈비뼈 미세 골절이 있었고 경미한 심근좌상이 의심되었다.

    심근좌상이란 쉽게 말해서 심장 근육에 손상이 간 상태로, 외적인 충격을 받아 발생된다.

    도현신 환자의 경우.

    증상이 심하지 않아 경과 관찰 중이었는데, 1시간 전부터 뚜렷하게 병세가 악화되었다.

    급기야 20분 전에 실시한 심초음파 결과 혈흉이 관찰되었다.

    응급으로 흉관 삽관이 필요한 상황인 것이다.

    “소아 흉부외과 있을 때도 많이 해 봤습니다. 걱정 마세요.”

    나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사실 나는 도현신 환자에게 흉관 삽관하는 날을 오래전부터 기다려 왔다.

    전생의 나는 황은우의 감독하에 도현신 환자에게 흉관 삽관을 했는데.

    그 당시 황은우에게 엄청난 욕을 먹고 환자에게는 멱살을 잡힐 뻔했다.

    고질적인 수전증 탓에

    삽관을 잇달아 세 차례나 실패했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 봐도 부끄럽고, 지우고 싶은 흑역사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과거를 거슬러 온 만큼 예전의 실수와 실패는 있을 수 없었다.

    ‘두 번은 안 당하지.’

    나는 옛 상처를 떠올리며 각오를 불태웠다.

    사실 흉관 삽관이 실패한 데는 내 수전증만의 문제가 있었던 아니었다.

    감독 중이었던 황은우의 부주의와 환자의 과오 또한 명백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즉, 세 명이 최악의 조화를 이루면서 처치가 꼬였던 것이다.

    다만 그중에서 내가 제일 약자였기에 모든 책임을 뒤집어쓴 부분이 있었고.

    “네가 아무리 일을 잘해도 이번 처치는 불안해서 안 되겠다. 같이 병실로 가자.”

    당직실을 떠나려는 나를 황은우가 뒤쫓았다.

    아직까지는 전생과 전개가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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